의류 제조업은
왜 항상 열악했나

저임금 노동을 좇은
의류 제조업 이동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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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럭셔리 패션 기업 LVMH와 파리 올림픽의 상관관계를 보며 LVMH의 비윤리성을 지적했다. LVMH의 회장인 아르노 회장은 전 세계 1위의 부자에 오른 반면, 제3세계의 의류 노동자들은 시급 몇백 원 몇천 원을 받고 일하기 때문이다. 이 대조는 패션 산업의 생산과 소비 사이의 양극단을 보여주며 불합리하고 불균형적인 구조를 나타낸다.

LVMH를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 구조는 LVMH가 다른 어떤 기업들보다 특출나게 잘못하고 있다기보다는 자본주의로 구성된 세계의 본질적인 구조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착취를 은폐함으로써 자본을 증대해가는 법칙이기 때문이다. 즉 아르노 회장과 의류 노동자의 극단적 거리는 패션 산업을 지속하게 하는 구조이자, 나아가 전 세계의 모든 산업을 유지하는 비법이다. 의류 제조업을 통해 그 메커니즘을 살펴보자.


의류 제조업 이동의 역사

의류 생산지가 어떻게 이동했는지 살펴보면 구조의 역학이 보인다. 20세기 초, 미국의 의류 산업이 열심히 성장하던 시절에 의류의 생산을 담당하던 지역은 뉴욕의 한복판에 있었다. 맨해튼의 텐더로인이라는 지역은 1920년대부터 ‘가먼트 디스트릭트’라 불리며 의류 제조 지구로 성장했다. 특히 가먼트 디스트릭트는 1940년대에 빛을 발했다. 당시는 패션 시장이 오뜨 꾸뛰르, 고급 맞춤복 중심에서 기성복 중심의 대중적인 시스템으로 변모하는 시기였다. 미국은 대량 생산 체제를 바탕으로 기성복 확산에 앞장섰고, 가먼트 디스트릭트는 미국 패션 산업이 성장하는 데 든든한 뒷받침이 되어주었다.

시간이 흐르고 1960년대가 되자 가먼트 디스트릭트의 공장 임대료와 인건비는 많이 오른 상태였다. 더불어 통신, 교통, 유통 기술이 발달하면서 의류 생산을 인건비가 저렴한 국가로 위탁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아웃소싱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홍콩, 대만 등의 아시아 국가가 그 대상이었다. 그 덕분에 당시 우리나라의 섬유산업은 폭발적으로 성장해 생산한 제품을 60% 가까이 수출하면서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주역이 되었다.

또 시간이 흐르고, ‘의류 수출의 빅3’라고 불렸던 우리나라, 홍콩, 대만도 인건비가 상승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80년대 파업이 이어지고 임금이 오르자 1990년대에서부터 의류 제조업이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다. 이에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의류 제조 지역이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옮겨 갔다. 우리나라 기업도 생산 비용을 감축하기 위해 이 국가들에 생산 공장을 두기 시작했다. 중국과 동남아시아 중심의 의류 생산 시스템은 패스트 패션 기업의 등장과 함께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뉴욕의 가먼트 디스트릭트
뉴욕의 가먼트 디스트릭트. 이미지 출처: The Forward

언제 어디서나 같았던
의류 공장의 모습

의류 생산의 지역은 바뀌었지만, 그 광경은 어디서나 똑같았다. 가먼트 디스트릭트에서 의류 노동자가 일했던 공간은 ‘테너먼트(tenement)’라는 주거용 아파트였다. 조명도 어둡고, 환기도 안 되며, 화장실도 열악한 공간이었다. 그 대안으로 등장한 창고형 ‘로프트 공장(loft)’도 마찬가지로 노동 인원에 비해서는 좁은 공간이었다. 이들은 하루 3달러 정도의 임금을 받았다(Michels, 2014).

아웃소싱이 시작된 이후, 1960년대 우리나라 의류 제조 공장의 모습은 어땠을까. 평화시장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분신항거한 전태일에 따르면, 당시 의류 노동자는 허리도 제대로 못 피는 좁은 공간에서 15시간 동안 똑같은 작업을 반복해야 했다. 산업이 성장한 1980년대 이후에는 창신동에 봉제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노동 환경이 조금씩 개선되었는데, 이 또한 뉴욕과 마찬가지로 주거형 건물에 들어선 테너먼트 공장이었다.

현재,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에서 이루어지는 의류 제조의 공간도 다르지 않다. 큰 기업의 경우에는 환경이 잘 갖춰진 공장이 있지만, 테너먼트 공장은 대부분 소규모 하청업체들이다. 2021년, 한 NGO 단체에서 패스트 패션 기업 쉬인(Shein)의 공급업체를 조사했는데, 이곳의 노동자들은 주 75시간을 일하고 한 달에 하루만 쉬었다(Kollbrunner, 2021). 쉬인의 공급업체 중에는 작은 창고 같은 공간에서 작업하는 곳도 많았다.

위에서 살펴본 흐름을 보면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의류 생산지의 이동에는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 인건비가 저렴한 곳에서 생산이 이루어지다가, 인건비가 상승하고 생산 비용이 커지면, 또 다른 저렴한 곳으로 옮겨 가는 것이다. 의류 생산지의 이동은 ‘저렴한 노동’을 찾으며 이뤄졌다. 풀어서 말하면 적은 돈을 받으며 많은 시간을 일하는 대상, 즉 착취의 대상을 끊임없이 포착해냈다는 뜻이다.

착취와 포착은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본질적인 방식이다. 효과적으로 착취할 수 있는 대상을 계속해서 포착하고 이동하는 것이다.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적은 임금으로 많은 시간을 노동할 수 있는 사람에게 생산을 맡겨야 이윤이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노동자 임금의 상승은 구조의 해결로 이어진다기보다, 또 다른 피해자를 찾는 일로 이어졌다.

평화시장 노동자의 모습
평화시장 노동자의 모습. 이미지 출처: 역사공감
창신동 봉제공장의 모습
창신동 봉제공장의 모습. 이미지 출처: 경향신문

누가 노동하는가

의류 산업의 제조를 맡은 노동자들은 대부분 이민자이거나, 유색인이거나, 노동 계층 또는 빈곤한 집단이다. 아웃소싱이 시작된 이후 노동은 국제적으로 분업화되었는데, 그 분업은 평등하지 않았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등 식민지였던 국가들이 노동의 측면에서도 착취의 대상이 되었다. 이곳의 값싼 노동력으로 만든 물건은 서구의 국가에서 비싸게 팔렸고, 그 잉여의 이윤은 서구 기업에서 가져갔다.

또 의류 노동자들은 대부분 여성이다. 미국 가먼트 디스트릭트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은 90%가 유대인 이민자였고, 70%가 여성이었다(Friedheim, 2007). 우리나라에서도 ‘공순이’라 불리며 섬유공장에서 일한 1960-70년대의 의류 노동자 역시 여성이 70%를 차지했다(구대선, 2019).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의류 제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 역시 여성이 많다. 베트남에서는 의류 노동자의 80% 이상, 방글라데시에서는 90% 이상이 여성이다(Davoine, 2021; Bose, 2024). 사회학자 마리아 미즈는 국제 노동 분업의 구조가 제3세계 여성을 전 세계의 ‘가정주부’로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이들은 보이지 않는 노동자이며, 노동의 가치가 격하된 존재들이다.

이처럼 의류 산업의 스웨트숍 노동은 인종화, 식민화, 젠더화된 노동으로, 자본 중심의, 서구 중심의, 가부장적인 세계의 불균형한 구조를 대변한다. 이 모습은 언제 어디서나 똑같이 유지되었다. 그 구조야말로 의류 산업이 지속되어 온 배경이기 때문이다. 이는 패션 산업의 그림자이자, 전 세계 모든 비즈니스의 그림자이다.

동남아시아 의류 제조 공장
동남아시아 의류 제조 공장. 이미지 출처: Human Rights Watch

세상은 균형을 잃어버렸다. 아니, 역사적으로 훑어보면 균형을 갖췄던 적이 없었다. 선천적인 불평등을 정의했던 신분제가 사라졌어도 그 자리를 자본주의적 계급이 채웠지 않나. 물론 시간이 흐르며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평등을 이룬 듯한 업적도 많았지만, 불평등은 교묘하게 감춰지고 구조 속에 합리화되었다.

외줄을 타는 줄광대를 떠올려 보면 균형을 잡기 위해 끊임없이 이쪽저쪽 힘을 분배하고 움직인다. 움직임을 멈춘다면 균형을 잃고 떨어지거나 넘어지고 말 것이다. 이처럼 균형이 끝없는 움직임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거라면, 우리는 균형을 찾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어떻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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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량

패션을 애증의 시선으로 바라보니 세상이 보였습니다.
사람과 세상을 포용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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