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는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의 뉴룩(New Look)이 가진 차별적인 시선을 열심히 지적했지만, 사실 이게 디올만의 문제였을까? 디올이 대중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면 성공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디올은 해외로 진출하면서 프랑스 패션의 위상을 드높였고, 아뜰리에나 하우스로만 존재했던 오뜨 꾸뛰르를 기업화시킨 대표적인 사례다.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디올을 좋아하고 소비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왜, 이 많은 사람들은 디올의 뉴룩에 열광했을까?
패션은 사회문화적 시스템이다
뉴룩이 인기 있었던 이유는 당시의 사회적 상황 때문이다. 디올이 뉴룩을 발표한 시점은 1947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다. 전쟁 동안에는 물자 부족으로 인해 많은 여성들이 짧고 좁은 스커트를 입었고, 장식도 달 수 없었다. 노동 현장에 참여하면서 유니폼을 입는 여성도 많았다. 이렇게 고된 나날을 보냈던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고 혼란과 평화가 공존하는 복잡한 시기에 뉴룩을 만난 것이다. 뉴룩은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프랑스 궁정에서 연회를 즐기던 에드워드 시대의 모래시계 모양 실루엣을 표방하고 있다. 사람들은 뉴룩을 보며 평화로웠던 옛날을 떠올리고 전쟁이 드디어 끝났음을 실감했을 것이다. 전후 시기에 뉴룩은 옛 평화에 대한 향수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느낄 수 있는 상징이었다.
한편, 뉴룩의 인기는 당시 오뜨 꾸뛰르(haute couture)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구조 자체의 영향도 받았다. 오뜨 꾸뛰르는 엘리트, 상류층을 뜻하는 ‘haute’와, 맞춤복이라는 뜻의 ‘couture’가 결합한 말이다. 당시 오뜨 꾸뛰르라는 고급 맞춤옷을 입는 사람은 상류층이었고, 대부분의 상류층 여성은 스스로 돈을 벌어서 부유해진 게 아니라 아버지 또는 남편의 금전적 능력에 기댄 것이었다. 당시 여성의 패션은 남성의 부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존재했다는 시각도 있다. 즉, 당시 사회에서 상류층 여성의 위치가 수동적이었기 때문에 모래시계 실루엣에 담긴 차별적인 시선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이 뉴룩을 환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디올의 뉴룩 하나로 당시의 많은 사회적 상황이 설명된다. 패션은 단순히 옷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한 시기에 형성된 공통적인 스타일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반면, 패션은 옷이라는 일상적인 매개물이 있기 때문에, 그 어떤 예술장르보다 사회와 밀접한 시스템을 형성한다. 사람들은 매일매일 옷을 입으며 패션을 형성하고, 패션은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대중의 관심사, 가치관, 관습, 집단적 정체성 등을 잔뜩 담게 된다. 또 전시장과 같이 특정 장소에서만 관람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일상적인 소재와 연결되기 때문에 대중에 쉽게 공유되고, 그만큼 빠르게 확산된다. 이렇게 유행이 형성된다. 이처럼 패션은 사회적 상황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된 하나의 사회문화적 시스템인 것이다.
고급화 전략 vs 대중화 전략
디올의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디올은 전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글로벌 브랜드다. 디올의 성공 스토리는 두 가지 전략에서 나온다. 하나는 오뜨 꾸뛰르로 대표되는 고급화 전략과 기성복으로 대표되는 대중화 전략이었다. 당시 미국은 프랑스의 럭셔리 패션에 대한 동경이 있었고, 산업화된 시스템을 바탕으로 기성복 산업이 발달한 상황이었다. 디올은 프랑스 오뜨 꾸뛰르 라인의 퀄리티와 세련미를 담으면서, 미국의 값싼 소재를 활용한 ‘뉴욕 컬렉션’을 발표했다. 파리와는 다른 별도의 디자인을 발표함으로써 뉴욕의 고객도 특별한 대우를 느끼게끔 의도했다. 이렇게 디올의 기성복 컬렉션이 탄생한다. 동시에, 프랑스의 오뜨 꾸뛰르 라인은 절대적인 퀄리티와 디자인을 유지하면서 독보적인 고급스러움을 유지했다. 당시 디올의 포스터를 보면 ‘Expressly for Christian Dior’라고 강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에밀리 인 파리(Emily in Paris)>에서는 두 가지의 마케팅 전략이 나온다. 미국인 에밀리(Emily)는 럭셔리 라이프를 동경하는 모두를 향해 문을 활짝 열고 싶어하지만, 프랑스인 실비(Sylvie)는 진입장벽을 높이고 소수만이 즐길 수 있는 특별한 브랜드로 만들고 싶어한다. 실비와 에밀리 둘 중에 어느 누가 맞다고 말할 수 없다. 전자는 디올의 대중화 전략, 후자는 디올의 고급화 전략과 연결되는데, 디올의 이 두 가지 전략은 아주 제대로 통했기 때문이다. 디올은 이렇게 ‘대중을 위한 럭셔리(luxury for the masses)’와 ‘럭셔리 중의 럭셔리’로 구분되는 두 개의 컬렉션을 운영했고, 결국 전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디올 이외에 찰스 프레데릭 워스(Charles Frederick Worth)나 폴 푸아레(Paul Poiret) 같은 초창기 오뜨 꾸뛰르 디자이너들도 기성복 라인의 잠재성에 주목하고 있었다. 소수의 고객만을 위한 오뜨 꾸뛰르보다는 다수를 타겟으로 하는 기성복의 기대 수익이 훨씬 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당시에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대량생산 시스템이 발전한 점도 영향을 미쳤다. 오뜨 꾸뛰르는 희소성과 배타성을 유지하면서도, 인지도와 소득의 확대를 위해 대중의 유입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게 바로 프랑스어로는 ‘프레타포르테(Pret-a-Porte), 영어로는 ‘레디투웨어(Ready-to-Wear)’ 라인이다.
“독창성과 재생산 사이, 유일무이한 예술작품과 대량생산된 일상품 사이의 긴장감은 모더니즘 역사에서 오랫동안 중요한 문제로 간주되어 왔다.” _고현진, 2008
패션에서 재생산되는 권력 구조
디올의 두 가지 전략이 제대로 통한 이유는 뭘까? 오뜨 꾸뛰르와 레디투웨어가 구분된 근본적인 이유 말이다. 디올이 마케팅 전략까지 구분해서 별도의 두 라인을 만들어낸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 이유는 돈을 기준으로 계급이 형성된 현대의 자본주의 위계질서에 적절히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디올은 사회의 권력구조를 정확히 읽었고, 이 전략은 오뜨 꾸뛰르와 레디투웨어로 나뉘는 현대 패션 시스템의 초석을 형성했다. 이렇게 패션은 자본주의 권력구조에 제대로 안착하게 된다.
현대 패션은 기본적으로 배제와 모방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사회의 권력 구조를 재생산한다. 독일 사회학자 지멜(Simmel)은 ‘Trickle-down(아래로 흐르다)’이라는 이론을 발표했다. 유행은 위에서 아래로 확산된다는 의미다. 우월한 권력적 지위를 누리는 상위그룹은 그들만의 차별화된 스타일을 형성하고 다른 집단은 철저히 배제함으로써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한다. 하지만 상위그룹을 동경하는 하위그룹은 모방을 통해 상위그룹에 속하고 싶은 욕구를 충족하려 한다. 이렇게 하나의 트렌드가 확산되었을 때, 상위그룹은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내면서 다시 집단을 구별 짓는다. 이렇게 상위그룹에 대한 모방과 하위그룹에 대한 배제가 반복되면서 유행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확산된다.
다른 학자들은 ‘Trickle-down’ 이론을 두고 신분이 존재했던 계급사회에서나 뚜렷한 이론일 뿐, 현대의 복잡다양한 사회에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Trickle-across’, ‘Trickle-up’ 등 다양한 방향성이 논의되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는 ‘돈’이라는 수직적인 기준이 명백히 존재한다. ‘Trickle-down’ 이론이 현대 패션의 모든 성격을 정의할 수는 없어도, 하나의 경향을 설명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럭셔리 브랜드가 새로운 디테일을 유행시키면, SPA 브랜드에서 너도나도 싼값에 비슷한 스타일을 재생산하지 않는가. 누군가가 자신의 부와 지위를 증명하기 위해 럭셔리 브랜드 제품을 소비한다면, 또 다른 누군가는 럭셔리 브랜드를 동경하는 마음에 SPA 브랜드에서 비슷한 상품을 구매할 것이다. 패션이 생성되고 확산되는 구조는 기득권의 지배적인 위계질서에 찬성하고, 그 구조를 답습할 수 있는 환경을 형성한다. 사회의 권력 구조가 패션 시스템에 그대로 투영되는 것이다.
필자는 패션의 권력적인 구조를 패션의 한계라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패션은 복잡다양한 시스템이라, 이런 경향성 하나로 모든 걸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전세계 패션의 흐름에 럭셔리 브랜드가 대단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권력적 구조는 굉장히 굳건하다. 럭셔리 브랜드의 가방을 구매하는 게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는 것을 보면, 특히 그렇다.
패션은 옷이라는 아주 일상적인 소재와 예술적 표현이 만날 수 있는 지점이기 때문에,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기에 매우 효과적인 매체가 될 수 있다. 다만, 럭셔리 브랜드의 권력이 상표와 만나서 속물적인 특성을 뿜고 있는 탓에, 패션이 품고 있는 가능성이 가려진다. 필자는 패션에서 다양한 논의가 촉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럭셔리 브랜드는 예술적 표현과 사회적 메시지, 새로운 시도에 집중하고, 사람들은 상표가 아닌 아이디어에 주목한다면 많은 이야기가 가능하지 않을까. 패션의 그릇은 다양한 담론을 담기에 매우 충분하다.
이번 글에서는 패션이 어떤 시스템으로 생성되고 확산될 수 있는지, 어떻게 사회적 상황과 권력 구조를 고스란히 반영하는지 짚어보고 싶었다. 다만, 여기서 논의를 멈출 수는 없다. 내가 사랑하는 패션의 매력은 양면성이다. 사회적 구조를 재생산하는 패션이 있다면, 하위문화를 표방하고 위계질서에 저항하는 패션이 있다. 이렇게 슬며시 다음 글을 예고해본다.
- 고현진, 현대패션에 나타난 쿠튀르적 디자인, 한국복식학회(제58권 제7호), 2008
- 최경희, 크리스찬 디올 오뜨 꾸뛰르의 대중화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패션디자인에 미친 영향, 한국기초조형학회(제18권 제3호), 2017
- 최샛별, 진기남, 문화사회학적 시각에서 본 패션의 전략적 사용, 한국복식학회(제31권 제10호), 2007
- Tatiana Levchuk, Trend diffusion mechanism in the modern fashion industry, 2018, University of Twente, Master Thesis
- Yuniya Kawaura, Fashion-ology, Bloomsbury,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