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동양
'오리엔탈리즘'

왜 우리의 문화는 서양에 의해
재현되어야만 하는가


아트
Oct 4, 2021
Edited by 
주현우


쿵푸팬더, 닥터 스트레인지, 인디애나 존스, 알라딘, 300. 누구나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봤을 유명한 영화들이다. 주변에서 모르는 사람을 찾는 일이 더 어려울 정도다. 글머리에 장르도, 감독도 전부 다른 영화들을 나열한 이유는 무엇일까. 눈치챘을지 모르나 이 모두를 꿰는 하나의 공통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로 서구 문화권에서 동양을 소재로 만든 영화들이라는 점이다. 동양의 모습을 때로는 신비롭고 숭고하게, 때로는 야만적이고 문란하게 묘사한 영화들. 재밌게 봤다면 다행이지만, 그 이면에는 우리가 무시해서는 안 될 중요한 논의가 숨어있다. 바로 동양을 바라보는 서양의 왜곡된 시선, 오늘 살펴볼 주제인 '오리엔탈리즘'이다.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은 동양(the East)을 뜻하는 단어 오리엔트(Orient)에 '-주의'를 뜻하는 접미사가 붙어 만들어진 단어다. 오리엔트는 '해가 뜨는 방향'을 의미하는 라틴어 오리엔스(Oriens)에서 유래했으며 서양 문화권에서 지중해 너머 동쪽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돼 왔다고 한다.

보통 우리가 '주의'라는 말을 쓸 때는 '무언가를 중시하는 사상이나 경향'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가령 자본주의(Capital-ism)가 자본과 시장을 중시하는 경제 체제를, 무정부주의(Anarchy-ism)가 무정부 상태를 가장 이상적인 정치 체제로 여기는 사상을 통칭하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동양주의,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도 말 그대로 동양을 이상적인 존재로 떠받드는 사상을 뜻할까?


오리엔탈리즘,
동양을 바라보는 서양의 시선

이미지 출처: pixabay, @sasint

1) 오리엔탈리즘,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오리엔탈리즘의 정의는 모호하다. 뭉뚱그려 동양을 바라보는 서양의 시선 혹은 태도라 말할 수 있는데, 보다 구체적으로 정의하는 방식은 학자마다 다르다. 동양에 대한 논의가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으로 이뤄진 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동서양의 교류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학자의 고민과 논쟁이 이어져 왔다. 그 모두를 한데 모아도 온전한 정의 내리기가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수많은 학자 중에서도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팔레스타인 출신의 학자 에드워드 사이드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을 '동양에 대한 서양의 지배 방식'으로 규정하고, 권력 관계의 틀로 새롭게 해석한 인물이다. 그는 동명의 저서에서, 서양이 동양에 야만적이고 뒤떨어진, 열등한 타자의 프레임을 씌워 '동양정복은 침략이 아닌 해방'이라는 제국주의적 사상을 정당화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프레임 씌우기가 오리엔탈리즘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오늘날 오리엔탈리즘의 정의는 이전보다 포괄적으로 규정되고 있지만, 사이드의 정의가 여전히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건 분명하다. 사전의 정의도 '제국주의적 지배와 침략을 정당화하는, 동양에 대한 서양의 왜곡된 인식과 태도'라 돼 있는 점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이 같은 정의는 오리엔탈리즘이 품은 수많은 함의 중 일부에 불과하다. 오리엔탈리즘의 역사를 살펴보면, 학자마다 이에 대한 모든 논의를 포괄할 수 있는 새로운 분류법을 제시해 왔다.


2) 오리엔탈리즘의 다양한 분류

미시간주립대학의 교수 아서 버스루이스는 오리엔탈리즘이 "동양을 보는 단일한 방식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이라 말하며, 오리엔탈리즘을 동양의 종교나 문화를 긍정적으로 여기는 '긍정적 오리엔탈리즘'과 이를 경시하는 '부정적 오리엔탈리즘'으로 구분했다. 버스루이스의 분류에 따르면 사이드의 정의는 후자에 속하게 된다. 국내에서는 인도 역사를 연구한 연세대 이옥순 교수가 '박제 오리엔탈리즘'과 '복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용어를 도입했다. 동양의 이미지가 서양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기존의 담론을 박제 오리엔탈리즘이라 한다면, 동양이 자신보다 열등한 또 다른 동양을 보는 시선, 즉 '서양이 구성한 동양이 구성한 동양'은 복제 오리엔탈리즘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우리 안의 또 다른 오리엔탈리즘을 꼬집은 셈이다.

마지막으로 『오리엔탈리즘의 역사』의 저자 정진농 교수 역시 앞선 흐름을 토대로 새로운 분류를 제안한다. 동양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세속적 오리엔탈리즘'과 동양의 종교·정신·심미적 가치를 존경하고 이를 배우고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일컫는 '구도적 오리엔탈리즘', 이 둘의 속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혼성적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이후 그는 혼성적 오리엔탈리즘의 틀로 역사를 재조명하며 오리엔탈리즘이 얼마나 다양하고도 복합적인 관념인지를 논증한다. 종국에는 동서양의 이원화가 흐려진 이 시대에 걸맞은 '포스트 오리엔탈리즘'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돌아와서,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을 향한 서양의 시선을 의미한다. 그 시선은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으며, 일방적일 수도 중층적인 구조를 가질 수도 있다. 이 글에서는 에드워드 사이드가 정의한 오리엔탈리즘, 즉 부정적 오리엔탈리즘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전개하려 한다. 오리엔탈리즘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며,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들여다보자. 이해를 돕기 위해 아래 몇 개의 그림을 준비했다. 사이드의 이론이 현실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여주는 사례는 많지만, 이 글에서는 19세기 유럽에 등장한 그림들을 토대로 윤곽을 그려보려 한다.


3) 동양의 이미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오라스 베르네, "The Arab Tale Teller", 1833, 유화, 월리스 컬렉션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The Turkish Bath", 1863, 유화, 루브르 미술관

장 레옹 제롬, "The Snake Charmer", 1879, 유화, 클라크 미술관

좌측 그림은 아랍의 이야기꾼과 주변 전경을 그린 프랑스의 화가 호레스 버넷의 작품이다. 마치 밀로의 비너스상을 연상시키는 자세를 한 여인과 한가로이 둘러앉아 줄무늬 두건을 쓴 이야기꾼의 만담을 듣는 사람들이 차례로 눈에 들어온다. 작가가 이를 그릴 당시 유럽은 급격한 산업혁명과 제국주의 경쟁을 겪고 있었다. 그런 서양인들의 눈에 그림 속 아랍인들이 얼마나 게을러 보였을지는 불보듯 뻔하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이론대로라면 동양인을 나태하게 묘사함으로써 이들에 대한 식민 지배와 갱생을 정당화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물론 화가가 그런 불순한 의도를 갖고 그렸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다만 이 작품이 대중에게 지속적으로 소비되며 결과적으로 비슷한 효과를 냈다는 해석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중앙의 그림을 그린 장 아우구스트 도미니크는 한 번도 아시아를 가본 적이 없는 프랑스 화가다. 주변에서 보고 들은 내용과 상상력만을 동원해 동양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이다. 그림 속에는 오리엔탈리즘 예술에서 동양 여성을 묘사할 때 흔히 나타나는 하렘적, 향락적, 수동적 특성이 모두 드러난다. 당시만 해도 저급하고 불결하게 여겨진 동성애적 요소가 포함돼 있기도 하다. 또한 피사체들의 얼굴을 유심히 보면 서양 여성의 모습에 가깝다는 걸 알 수 있다. 당시 유럽 여성의 열등한 지위를 고려했을 때 이는 '동양을 능동적이고 지배적인 성향의 서양을 보완해주는 수동적이고 열등한 짝'_정진농, 『오리엔탈리즘의 역사』로 바라보는 시선을 드러낸다고 볼 수도 있다.

우측 그림 역시 프랑스의 화가, 장 레옹 제롬의 작품이다. 이 그림은 사이드의 대표 저서 『오리엔탈리즘』의 표지가 된 그림이기도 하다. 그만큼 사이드가 정의하고 논증한 내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작품을 들여다 보면, 먼저 한 소년이 온몸에 뱀을 휘감고 묘기를 펼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주변에 둘러앉은 노인들은 권위적인 자세와 나태한 표정으로 발가벗은 소년을 바라보고 있다.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느낌으로 서양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그 안에 형성된 동양인의 이미지는 나태하고, 권위적인 변태성욕자일 뿐이다. 어쩌면 이 같은 인식이 당시 대중의 무의식 속에 팽배했기에, 그토록 피도 눈물도 없는 침략과 약탈이 가능했던 건지 모른다.

이 밖에도 동양을 바라보는 서양의 시선이 왜곡돼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료들은 많다.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대한 지배 담론을 앞에서 견인하기도, 뒤에서 정당화하기도 했다. 또한 이 같은 인식의 확산은 미술뿐 아니라 문학 등 대중예술 분야에서 전방위적으로 이뤄졌으며, 제국주의의 사상적 토양이 됐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마수를 뻗치고 있다.

오늘날 식민지나 문화말살과 같은 직접적인 억압은 종적을 감췄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오리엔탈리즘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가령 최근 동양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다시 고개를 쳐들고 있다. 서구 문화권에서 동양인은 물리적인 위해를 입는 일은 물론, 문화·예술계에서도 편견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 필자는 이 같은 현상의 기저에 동양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형태만 변했을 뿐,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문화적 착취는 사라지지 않았다고. 따라서 인종차별을 멈추라는 캠페인과 법적 제재는 수박의 겉만 핥는 식의 비본질적인 대안이 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건 영화, 문학 등 대중문화에 편재한, 동양을 향한 왜곡된 시선들을 의식적으로 걷어내는 일이다.


문화상대주의, 왜곡된 시선에 맞서는 법

1) 옥시덴탈리즘과 문화사대주의

동양의 이미지를 제멋대로 재단하는 서양의 행태는 계속되고 있다. 서양의 TV 프로그램은 동양인 아이들을 공부만 하는 똑똑한 범생이로, 동양인 노인들을 돈만 밝히는 욕심쟁이로 공공연하게 묘사한다. 코로나19 팬데믹 발발 직후엔 동양인을 더럽고 불결한 존재로 여기는 인식이 확산돼 해외에서 활동하는 동양인들이 수모를 겪기도 했다. 오리엔탈리즘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 만연하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같은 인식에 어떻게 맞서야 할까?

오리엔탈리즘과 대척점에 있는 개념으로, 서양을 향한 동양의 시선을 뜻하는 옥시덴탈리즘이라는 개념이 있다. 상대 문화를 왜곡된 모습으로 타자화한다는 점은 같지만, 주로 부정적인 모습으로 그려내는 오리엔탈리즘과 달리, 동양인의 눈에 서양은 대체로 긍정적으로 비쳐진다. 옥시덴탈리즘을, 서구 문화를 무비판적으로 동경하고 숭상하는 태도라 갈음해도 무방할 정도다. 그리고 이는 사실 문화사대주의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져 있다.

문화사대주의란 '다른 사회권의 문화가 자신이 속한 문화보다 우월하다고 믿으며 자신의 문화에 대해서는 업신여기고 낮게 평가하는 태도'를 뜻한다. 가령 무엇이든 영어로 표기된 건 무조건 비싸고 좋다고 생각하는 인식이나 다른 문화권에서 자국민이 보인 모습을 필요 이상으로 자랑스럽게(또는 부끄럽게) 여기는 현상을 예로 들 수 있다. 바다 너머에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기치 아래 동양에 대한 편협한 잣대를 들이밀 때, 이쪽에서 문화사대주의로 맞이하는 건 어리석다고밖에 할 수 없다. 이 둘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서로를 강화시켜주는 꼴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서양의 왜곡된 시선에 맞서기 위해서는 건강한 문화적 자아를 갖추는 일이 선행돼야 한다.


2) 복제 오리엔탈리즘, 우리도 가해자는 아닌가

한편 우리 역시 가해자가 아닌지 돌아보는 일도 중요하다. 앞서 언급한 대로 연세대 이옥순 교수는 연구를 통해 '서양이 구성한 동양이 구성한 동양'을 일컫는 복제 오리엔탈리즘을 명명하고, 우리 안에 뿌리 내린 왜곡된 관점들을 성찰했다. 서양의 폭력적인 시선에 맞서기 전에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인도, 베트남, 필리핀, 태국 등 한국보다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국가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떤가. 꼭 부정적이지는 않더라도, 우리 역시 색안경을 끼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는가? 복제 오리엔탈리즘은 그 이름답게, 언제나 더 열등한 타자를 찾으며 확대·재생산된다. 그렇게 복제되고 내면화된 오리엔탈리즘은 자신을 대상으로 한 부당한 타자화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마치 부하를 때리는 중간조직원이 상사로부터 맞는 걸 당연하게 여기듯 말이다. 따라서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은 우리 안에서 시시각각 자라나는 오리엔탈리즘의 싹을 잘라내는 일이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를 향한 왜곡된 시선들을 당당하게 마주하고 시정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테다.


3) 왜곡된 시선에 우아하게 맞서는 법

위로는 문화사대주의가, 아래로는 복제 오리엔탈리즘이 극복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쉽지는 않아 보인다. 안과 밖에서 동시에 해결돼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두를 한방에 타파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문화상대주의적 관점을 갖는 일이다. 문화상대주의란 '세계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견해'다. 다시 말해 문화와 문화의 관계를 규정짓던 기성의 우열 논리를 끊어내고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태도다. 수직선을 평면으로 확장하려는 시도다. 상대성을 받아들인 문화는 더 이상 다른 문화에 의존하지 않고 각자의 모습을 재현할 수 있게 된다. 사이드가 책의 첫머리로 인용한 마르크스의 주장 '그들(동양)은 스스로를 재현할 수 없고, 재현되어져야 한다'를 완전히 뒤엎게 된다. 누군가 잘못된 이미지를 덧씌워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문화적 정체성을 갖는 일. 이게 바로 왜곡된 시선에 맞서는 가장 우아한 방법 아닐까.


오리엔탈, 하니 떠오른 이야기가 있다. 어릴 적 뉴질랜드로 어학연수를 갔을 때의 일이다. '아버지 뭐하시노'라는 현지인의 질문에 부랴부랴 '한의사'를 검색한 뒤 '오리엔탈 닥터(Oriental Doctor)'라 답한 기억이 난다. 그 말을 들은 호스트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곤충을 갈아서 마시냐느니, 침을 맞으면 영혼의 세계로 갈 수 있냐느니 지금 생각해보면 모욕적인 한 질문들에 싱글벙글 대답을 했다. 멍청했다. 훗날 인종차별로 번질 수 있는 오리엔탈리즘의 씨앗을 그대로 남겨둔 셈이니 말이다. 처방이 올바른 진단에서 비롯되듯, 해결은 문제를 제대로 아는 일에서 시작된다. 다음번에는 그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의 문화는 그저 다를 뿐이라고.


[참고문헌]
- 정진농, 오리엔탈리즘의 역사, 살림,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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