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도서정가제를 폐지해달라는 글이 올라왔습니다. 반응은 매우 뜨거웠습니다. 청원글이 올라온 지 한달만에 무려 20만 명 이상이 도서정가제 폐지에 동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국민들의 성원에도 불구하고 2020년 11월 문화체육관광부는 다시 한번 기존 도서정가제를 유지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도서정가제의 배경
도서정가제가 도입된 배경은 무엇일까요? 도서정가제가 있기 전에는 서점끼리 과도한 할인 경쟁이 펼쳐졌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90% 할인된 가격으로도 책을 구매할 수 있었고, 책 한 권을 사면 한 권을 덤으로 주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막강한 자본을 앞세운 대형서점을 중소형 서점이 따라잡기 어렵게 되었죠. 또한 베스트셀러 순위 조작을 위한 책 사재기 현상도 발생했습니다. 이 같은 이유로 중소형 서점을 보호하고, 건전한 도서 문화를 정착하기 위해 도서정가제가 시작되었습니다.
도서정가제의 역사
도서정가제가 처음 도입된 것은 2003년입니다. 이 당시 도서정가제 적용 대상은 온라인 서점이었습니다. 출간 1년 이내의 서적만 신간으로 분류해 온라인 서점 한정 10% 가격 할인이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출간 1년이 지난 책들은 서점 재량껏 할인할 수 있게 했죠.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 서점까지 도서정가제가 확대된 것은 2007년 10월부터입니다. 출판문화산업진흥 법에 따라 발간된 지 18개월 이내의 서적을 신간으로 규정하고, 신간 10% 할인을 오프라인 서점에서도 적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후 2014년에 들어 도서정가제 개정안이 시행됩니다. 이때부터는 신간과 구간 모두 최대 10% 할인이 가능하고, 추가로 5% 이내의 포인트 적립, 사은품 증정 등이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가 2021년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도서정가제를 지지하는 사람들
출판업계와 작가협회 그리고 중소서점은 도서정가제를 지지합니다. 그들은 그 근거로 ‘창작의 다양성’을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도서 출간 종수와 출판사 수는 도서정가제 개정안 실시 이후 증가세를 보였습니다. 우선 도서 발행 종수는 2014년 67,062종에서 2018년에는 81,890종으로 상승하였고, 출판사 수 역시 2014년 47,226개에 2018년 68,443개로 상승했습니다. 가장 고무적인 부분은 독립서점의 성장입니다. 독립서점의 수는 2015년 97개, 2019년 551개에 이어 2020년 583개로 집계됐습니다. 이 같은 1인 출판사와 소규모 출판사 그리고 독립서점의 성장으로 책의 다품종 소량 생산과 유통이 가능해졌고, 이로 인해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춘 읽을거리가 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전국 서점이 20여 년 동안 감소세였으나 도서정가제 이후 그 감소 폭이 완화되었다는 점도 찬성 측 의견에 힘을 실어주고 있습니다.
표에서 보듯 매년 전국 서점 숫자는 계속 줄어들고 있지만 각각 2년 전에 비해 2009년 -12.3%, 2011년 -9.5%, 2013년 -9.5%, 2015년 -9.2%, 2017년 -3.1%, 2019년 -3.6%로 완만한 감소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도서정가제로 인해 지역 서점들이 활기를 띠고, 전국 서점 수 감소를 완충하는 역할을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도서정가제를 지지하는 또 다른 근거로 ‘책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문화적 가치를 갖는 문화 공공재’임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시장논리에 의해 책 가격이 정해지기보다는 적정한 가격이 책정되고 판매되어야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소비자들이 도서정가제를
반대하는 진짜 이유
찬성 측이 내세우는 여러 근거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이 도서정가제를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소비자들은 출판업계와 작가들이 내세우는 이야기가 설득력이 없다고 말합니다. 소비자들은 위에서 언급했던 ‘다양성’에 동감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이렇게 되묻습니다. ‘다양한 책들이 과연 좋은 책들일까요?’
인터넷의 발달로 생겨난 여러 플랫폼 덕분에 누구나 손쉽게 글을 쓸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만큼 누구나 출판할 수 있는 가능성도 커졌고요. 쉽게 쓰인 글들이 모두 나쁜 글이라고 할 수 없지만 반대로 좋은 글을 담보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또한 출간 종수가 많아졌다는 통계가 있음에도 사람들은 체감하기 힘듭니다. 서점 베스트셀러 코너에 가면 ‘감성’적인 표지로 된 ‘힐링’에세이, 주식이나 부동산을 다루는 경제 서적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서정가제가 폐지되면 작가들이 돈 되는 책만 쓰려 하고, 사람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책들이 나오지 않아 문제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정작 도서정가제가 진행 중인 현재도 이러한 문제점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공급률’ 개선 없는 도서정가제 주장 역시 소비자들은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출판사에서 서점으로 납품하는 가격을 ‘공급률’이라고 합니다. 현재 대형서점, 온라인 서점은 판매가의 50~60%, 중소형 서점은 70~80% 정도의 공급률이 책정되어 있습니다. 만 원으로 책정된 책이 있다고 가정하면 대형서점에서는 이 책을 5000원에 구입하여 판매하고, 작은 서점은 7000원에 구입하여 판매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책 한 권을 판매하더라도 작은 서점들은 상대적으로 이윤이 적게 남습니다. ‘중소형 서점을 살리기 위해’ 도서정가제를 실시하는 것보다 같은 책인데도 대형서점에 비해 비싼 가격으로 납품되는 구조를 개선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소비자들은 말합니다. 공급률 개선 없는 도서정가제 실시는 유통 구조의 문제점을 소비자들에게 전가하려는 제도처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출판업계와 작가는 전자책에 이어 웹소설과 웹툰까지 도서정가제를 적용하려 합니다. 그동안 웹소설과 웹툰을 저렴한 가격에 소비했던 사람들은 가격 상승 걱정과 함께 그들의 이중적인 태도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전자책을 책이라고 부를 순 없다”라는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 발언에서 알 수 있듯 종이책 출판업계는 전자책에 호의적이지 않는 태도를 보여왔습니다. 그럼에도 전자책에 도서정가제를 적용하는 것을 당연시 여깁니다. 그리고 이제는 웹소설과 웹툰 영역에도 도서정가제를 적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소비자들은 그 저의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게 당연합니다.
책은 공공재인가?
책의 ‘공공성’은 인정하지만 ‘공공재’라는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려는 태도는 다소 불쾌합니다. 공공재는 비배제성과 비경합성이라는 속성을 지닙니다. 국방, 소방, 도로와 같이 그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재화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것을 비배제성, 소비를 위해 서로 경합할 필요가 없는 것을 비경합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책은 두 가지 속성 모두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서점에서 판매되는 책은 일반적인 재화이고 서비스입니다. 종류에 따라 필수재와 사치재로 분류할 수 있고, 사치재의 수요는 가격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그리고 대체재가 있을 경우 수요가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고요. 독서를 대체할 취미와 콘텐츠는 이미 많습니다. 2019년 <국민 독서 실태 조사>에 따르면 책을 안 보는 이유 중 “책 이외의 다른 콘텐츠 이용”이 29%로 최다를 차지했습니다.
요즘은 책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넷플릭스, 유튜브와 같은 콘텐츠를 시청할 수 있고 뮤지컬, 연극, 오페라처럼 좀 더 ‘문화적’으로 인식되는 콘텐츠 역시 접근이 용이해졌습니다. 과거에는 종이책만이 유일한 문화 수단이었지만 이제는 취미활동 중 하나이고 선택사항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현행 도서정가제를 고집하는 것이 다른 콘텐츠로 이탈하는 독자들을 잡기 위한 유일한 방안인지 의문이 듭니다.
도서정가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
작가들의 창작활동은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아야 마땅합니다. 또한 지역 문화 발전을 이끌고 있는 독립 서점의 행보도 존중받아야 하고요. 하지만 이 같은 이유를 등에 업고 도서정가제를 주장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지는 의문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보아도 224개국 중에 도서정가제를 실시하는 국가는 15개에 그치고, 구간 도서정가제를 적용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라고 합니다.
한편 대전시는 작년 동네 서점 활성화와 시민들의 독서문화 증진을 위해 추진한 ‘온통대전’ 연계 캐시백 지원 사업이 성과를 거두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사업은 갈수록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역 내 150개 동네 서점을 살리고 시민들이 필요한 도서를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도록 전국 최초로 추진하는 사업이었습니다. 사업 첫날인 2020년 10월 15일 지역 서점 150곳의 온통대전 사용 매출액이 1,870만 원이었으나 한 달 후인 11월 15일에는 1억 6,000만 원으로 8.5배 증가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처럼 국가와 지역단체들이 나서서 사업을 지원하고 나아가 유통 구조까지 개선하는 것이 기존 도서정가제를 유지하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의도로 만든 제도라 할지라도 그 결과가 미비하면 재고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루리 출판업계와 서점업계 그리고 작가와 소비자 모두 상생할 수 있는 제도 마련을 위한 허심탄회한 대화가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도서정가제 영향 평가 및 개선 방안 연구』,(2019.12)
-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20년도 상반기 KPIPA 출판산업 동향』
- 한국서점조합연합회, 『2020 한국서점편람』
- [웹] 한국일보, 대전시 온통대전 연계 동네서점 활성화 정책 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