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서쪽과 인왕산 동쪽 기슭 사이를 일컫는 동네. 서촌은 효자동부터 사직동, 통의동 등 13개 행정구역을 아우르는 별칭으로 과거에는 ‘윗동네’라는 뜻의 ‘웃대’라고 불렸습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거주지였던 북촌과 달리 문인과 예술가 등 재주 많은 중인 계급이 모여 살던 곳이었죠.
인왕산 자락은 과거부터 경치가 수려한 명승지로 권문세가와 지식인들이 풍류를 즐기는 지역이었는데요. 한국 가사문학의 정수를 보여준 관동별곡의 저자 송강 정철 또한 서촌 태생이기도 합니다. 겸재 정선부터 추사 김정희, 이상, 윤동주, 이중섭, 박노수, 이상범 등 수많은 문화예술인의 근거지였던 서촌. 미로처럼 굽이굽이 얽힌 오래된 골목에서 그들의 흔적을 따라 걸었습니다.
누하동오거리
체부동과 누하동, 필운동, 통인동의 경계가 만나는 곳. 누하동 오거리는 서촌의 여러 동네를 연결하는 다섯 갈래의 골목길입니다. 과거부터 서민과 예술가들이 거주하며 왕래하고 교류하던 삶의 터전이었죠. 막역한 동네 친구였던 시인 이상과 화가 구본웅은 이곳을 거쳐 서로의 집을 오고 갔으며, 수묵화의 거장 청전 이상범 화백의 제자들은 그림을 배우고자 이 길을 드나들었죠.
이중섭과 이봉상 화백, 천경자 화백 등 서양 화가들은 전쟁 이후 오거리 근방에 거주하며 교류를 이어나가기도 했습니다. 비록 서쪽에 필운대로가 개설된 이후로 오거리의 정체성은 희미해졌지만, 골목은 안부를 주고받던 이웃들의 정다운 마음을 간직한 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주소: 서울 종로구 필운대로2길 (누하동 221번지 일대)
박노수 미술관
박노수 미술관은 박노수 화백이 약 40년간 거주했던 집이자 작업실입니다. 공간은 2013년 9월 그가 기증한 작품을 비롯한 총 1,000여 점의 소장품을 모아 종로구 최초의 구립미술관으로 개관되었죠. 한국화 1세대를 대표하는 박노수 화백은 이상범 화백의 제자로, 강렬한 쪽빛과 절제된 선으로 동양 수묵화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해석한 인물입니다.
1930년대 건축된 2층 벽돌 건물은 서양의 입식 생활과 한국식 온돌이 조화를 이룬 절충식 가옥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1호로 등록되기도 했습니다. 건물 밖 아담한 정원에는 조각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산책로에선 경복궁 서쪽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도 있죠. 돌아오는 3월 31일까지 개관 8주년 기념 전시 ≪화가의 비망록≫이 진행되고 있어, 박노수의 작품 세계를 비롯한 사진가 조선희의 가옥 사진을 만나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효자동 옥인1길 34
영업 시간: 화~일 10시~18시 (월요일 휴무)
INSTAGRAM : @paknosoo.artmuseum
인왕산 수성동 계곡
옥인길을 따라 끝까지 올라가면 마주하는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 인왕산 동쪽 아래 위치한 수성동계곡은 조선시대 역사 지리서에 소개될 만큼 빼어난 경관으로 예술가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던 곳이었습니다. 풍류객들은 사시사철 푸르른 소나무와 우람한 바위, 그리고 시원한 물줄기 아래 그림과 시로 정취를 표현하곤 했죠.
서촌 태생인 겸재 정선은 진경산수화라는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한 인물로 인왕산 일대를 담은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요. 그의 대표작 “인왕제색도”와 “장동팔경첩”에는 위엄 있는 수성동 계곡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계곡은 중인들의 시문학 모임 ‘송석원시사’와 봄과 가을마다 열리는 백일장의 무대가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수성동 계곡은 2012년 정선의 그림을 기반으로 복원 작업을 마치고, 도심 속에서 오롯이 자연을 감상할 수 있는 장소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주소: 서울 종로구 옥인동 185-3
통의동 보안여관
경복궁 서쪽 영추문 맞은편,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낡고 오래된 갈색 벽돌 건물. 1930년대 문을 연 보안여관은 예술가들의 아늑한 보금자리 역할을 했던 한국 근대문학의 주요 거점지였습니다. 시인 서정주가 소설가 김동리 등과 함께 문학 동인지 ‘시인부락’을 펴낸 곳이자, 화가 이중섭이 문지방이 닳을 만큼 자주 드나들었다고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죠.
여관은 광복 이후 지방에서 상경한 젊은 문인들이 장기 투숙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나가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는데요. 이상부터 윤동주, 서정주 등 당대 시인들은 이곳에 모여 밤새 이야기를 나누곤 했습니다. 예술가들이 교류하는 아지트이자 살아있는 역사 현장인 여관은 현재 ‘BOAN1942’라는 이름으로 동시대 작가들의 전시가 열리는 갤러리이자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서 문화적 명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주소: 서울 종로구 효자로 33
영업 시간: 월~일 12시~18시 (월요일 휴무)
이 외에도 서촌에선 이상의 집, 이상범 가옥, 백남준 기념관, 윤동주 하숙집터 등 골목 곳곳에서 예술가들의 발자취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뿌리 깊은 동네 서촌. 그들의 발자국을 찬찬히 되짚으며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