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AI를
두려워하랴

역사를 통해 살펴보는
기술과 예술의 공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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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son M. Allen, “Théâtre D'opéra Spatial”, 2022, Digital Image.
Jason M. Allen, “Théâtre D’opéra Spatial”, 2022, Digital Image. 이미지 출처: 뉴욕타임즈

이 그림은 2022년 콜로라도 주립 박람회 미술대회 디지털 아트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한 제이슨 앨런(Jason M. Allen)의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Theatre D’opera Spatial)”이다. 옅은 상아색 빛이 쏟아지는 둥근 포털과 극적인 명암대비를 이루는 실내 공간, 그리고 그 포털을 바라보는 우아한 복장을 갖춘 인물들을 보라. 이 그림은 아름답다. 인간이 아닌 AI가 만들어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미드저니 시작페이지. 이미지 출처: 미드저니

이 그림에 사용된 프로그램은 미드저니(Midjourney)로 사용자가 프롬프터에 키워드를 입력하고 생성하기 버튼을 누르면 몇 초 후, 그림이 완성된다. 사용자는 심지어 직접 원하는 참조 이미지를 입력해 그림을 생성할 수도 있고, 또 생성된 그림을 바탕으로 계속 세부를 수정해 나갈 수도 있다. 미드저니 외에도 달리(DALL·E)나 스테이블 디퓨전(Stable Diffusion) 등 AI 이미지 생성 프로그램은 점점 더 많아지고 정교해지고 있다. 이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도 존재하지만, 기존의 방식과 다르게 인공지능이라는 기술로 그림을 만들어내는 AI아트에 대한 비판 역시 쇄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AI아트가 비판의 대상이 되는 주요한 두 가지 이유는 바로 AI가 학습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창작물을 무단으로 도용한다는 것과 이러한 AI의 등장이 예술가의 설 자리를 없앤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AI는 미술 업계를 분탕질 치는 나쁜 기술일까? 과연 기술이 예술을 위태롭게 만드는지 과거의 사례를 통해 살펴보고 이를 고찰해보자.


역사를 통해 보는
인간과 기술의 대립

공장에서 일하는 모습의 그림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기계를 배척하고자 하는 시도는 처음이 아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18세기 말 영국에서 일어난 러다이트 운동(Luddite Movement)이다. 세계사 수업에서 빼놓지 않고 거론되는 러다이트 운동은 산업혁명 시기 기계가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을 막고자 일어난 노동운동으로, 정말 기계를 부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 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상황을 알아야만 하는데, 18세기 영국의 노동자들은 매우 비참한 현실에 놓여있었다. 그들은 엄청나게 긴 시간 고강도의 노동으로 착취당하면서도 제대로 된 임금조차 받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기계는 자본가들에게 인건비도 들지 않고, 지치지도 않는 노동력을 제공했고, 기계에 대체된 많은 인간 노동자가 실업 상태로 내몰렸다. 당연히 분노는 자신들을 몰아낸 기계로 쏠렸다. 이들은 밤을 틈타 몰래 공장의 기계들을 파괴하기 시작했고, 이는 곧 강력한 제제의 대상이 되었다.

인간이 일하는 모습
이미지 출처: Unsplash

아마 많은 독자가 예상했을 텐데, 이 운동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아무리 많은 기계를 파괴해보았자, 곧 다른 기계가 그 자리를 메웠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이 있다. 기술을 파괴하는 것은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기술을 둘러싼 제도를 형성하고, 기술과 문화가 같이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기술을 제어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노동자가 연합해 운동을 벌였다는 점에서 러다이트 운동은 의의를 찾을 수 있지만, 사실 그들이 해야 했던 일은 기계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계를 악용하는 자본가들에게 대항하여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법을 만들고, 노동자가 법을 만드는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참정권을 얻어내는 것이 진정 그들이 해야 하는 일이었다. 결국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토대가 되었던 운동은 러다이트가 아닌 참정권 운동인 차티스트 운동이었다.


AI아트를 둘러싼 논쟁

모니터 속 개발자 코드
이미지출처: Unsplash

다시 우리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AI아트, 그리고 AI를 기반으로 하는 다양한 기술에 대한 반감은 당연한 일이다. 지금까지 기술과 기술을 기반으로 한 기계는 우리의 노동을 수없이 대체해왔다. 여기서 말하는 노동은 좁은 의미의 노동으로 물적 생산을 위한 행위를 말한다. 즉, 산업 혁명기 대체된 노동들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지금 AI가 대체 하려 하는 것은 이러한 과거의 노동이 아니다. 예술이라는 신적이고 능동적인 창조 능력이, 인간 외에는 감히 그 무엇도 범접하지 못 하리라 생각하던 분야가 인공지능으로 대체되고 있다. 물론 기계적 두뇌를 사용하는 새로운 기계장치가 등장한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전자두뇌를 흡수한 디지털 기기를 완전히 생활에 받아들이고 있다. 디지털 기기 없이 사는 인간이 이제 얼마나 존재할까? 그러나 이렇게 혁신적으로 장치(apparatus)가 인간의 사고능력을 대체한 일은 AI 이전에는 없었다. 이는 곧 AI에 대한 공포와 거부로 이어지고 있는데, 현재 네오 러다이트 운동이 실제로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AI 아트를 반대하는 운동의 배너
AI 아트를 반대하는 운동의 배너

그러나 우리는 과거로부터 이미 많은 것을 배웠다. 기술을 두려워하는 것은 절대 기술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안다. 현재 많은 사람이 AI아트에 반감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세계적인 이미지 공유 사이트 게티이미지(gettyimage)도 AI 이미지와의 싸움을 시작했다. 이들은 AI를 이용한 이미지를 업로드하고 판매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또한 이미 올라간 AI 이미지를 구분해 축출하겠노라 선언했다. 일부 개인 창작자들 역시 ‘No to AI Generated Image’라고 외치며 AI 아트를 예술계에서 몰아내려 노력하고 있다. AI의 딥러닝이 현재 매우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저작권이 침해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는 반드시 어떤 조치가 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과연 AI 기술을 틀어막는 것이 예술가―다르게 말하자면 예술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고 일자리를 유지하는 좋은 방법일까? 러다이트 운동을 통해 배운 것을 다시 상기해보자.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기계의 파괴가 아니다. 기계를 둘러싼 제도와 문화의 변화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한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인간은 유희하는 동물이다

“기계에 대항하여 투쟁하지 마라. 기계를 통해 유희하라.”

하늘 그네 타는 사람들
이미지출처: Unsplash

이미 우리는 호모 파베르(Homo Faber)의 단계를 지났다. 다시 말해 우리는 더 이상 노동하는 인류가 아니다. 현대 사회의 많은 일이 새로운 매체에 의해 발생함에 따라 물질을 산출하는 노동을 주요한 사회적 활동으로 간주하는 단계를 넘어서 정보를 산출하고, 산출된 정보를 통해 유희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과거에는 생산 능력이 곧 힘과 권력이었다. 즉 자본과 하드웨어를 가진 사람이 권력을 가졌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단순히 도구에 대한 추구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제 물리적 실체 위로 쌓아 올려진 수많은 정보와 소프트웨어 그리고 항상 메타적으로 기능하는 사회의 프로그램이 우리의 삶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이제 질료성이 존재하지 않는 수많은 정보와 프로그램들을 어떻게 이용하는지가 더 중요한 사회다. 필자가 주목하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변화다.

need / dream / hope / desire / human / human
이미지 출처 : unsplash

노동 중심의 사회와 경제는 대체로 필요에 기반을 둔다. 왜냐하면 물질의 생산은 근본적으로 한정되어있기 때문이다. 생산이 제한되어있는 환경에서는 필요가 더 우선된다. 그러나 정보 기술 중심 사회는 다르다. 이 사회는 필요가 아닌 욕망에 기반을 둔다. 정보 기술과 디지털 매체가 가진 가장 큰 능력은 바로 수적인 사고방식을 기반으로 인간이 헤아리기 힘든 방대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 방직기가 일 년에 생산할 수 있는 직물의 양은 한정되어있지만, 한 컴퓨터가 계산할 수 있는 식의 형태는 거의 무한하다. 이는 욕망과 닮아있다. 끝없이 무한으로 나가는 가능성의 상태. 그것이 욕망이다. 그리고 우리는 호모 루덴스, 유희하는 인간으로서 이를 철저하게 활용해야만 한다. 기계장치의 욕구, 무한으로 증식하는 가능성의 욕구를 기반으로 우리도 기계와 유희하며 기계를 우리의 지배하에 놓는 것이다.


예술과 기술의 연회

왼쪽부터 아니카 이, “역삼투압”, 2022, 체리 액자의 실크 스크린에 UV 프린트, 148.6x118.1cm. 아니카 이, “Surgery Is The New Sex”, 2022, 체리 액자의 실크 스크린에 UV 프린트, 148.6x118.1cm. 아니카 이, “Qui Cocos?”, 2022, 체리 액자의 실크 스크린에 UV 프린트, 148.6x118.1cm.
왼쪽부터 아니카 이, “역삼투압”, 2022, 체리 액자의 실크 스크린에 UV 프린트, 148.6×118.1cm. 아니카 이, “Surgery Is The New Sex”, 2022, 체리 액자의 실크 스크린에 UV 프린트, 148.6×118.1cm. 아니카 이, “Qui Cocos?”, 2022, 체리 액자의 실크 스크린에 UV 프린트, 148.6×118.1cm. 이미지 출처: 제주 비엔날레 공식 홈페이지

이에 대한 좋은 예시가 되어주는 일군의 예술가들이 있다. 필자가 과거 아티클에서도 주목한 바 있는 이안 쳉과 문경원&전준호 그리고 현재 제주 비엔날레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아니카 이 등 많은 현대 미술 작가들에게서 필자는 호모 루덴스의 희망을 본다. 이들은 새로운 기술을 배척하지 않는다. 예술가로서 새로운 기술과 어떻게 유희할 것인지를 탐구할 뿐이다. 이들은 오히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다르게 말하자면 한계―를 기술로 뛰어넘으며 이 사이를 흐리고 있다. 바로 이곳에서 근대 계몽주의 신화가 무너져내리고 있다. 인간의 이성과 과학기술이 전통적인 종교를 대체해 또 다른 신격으로 뛰어오른 그 자리, 바로 그 안에서부터 그들은 신화를 해체하고 있다. 이들이 사용하는 방법은 바로 기계(그리고 AI)가 인간을 대신해 발화하거나, 담론을 제시하거나, 예술에서의 확장된 장을 표현하게 하는 것으로, 비인간의―그러나 너무나도 인간적인―관점을 우리에게 작품으로 제시한다. 우리는 그 작품들을 통해 얼마나 우리가 인간이라는 단일 종의 시각에 갇힌 채 세상을 편협하게 사유해왔는지 느낄 수 있다. 필자는 이러한 행위가 바로 예술이 기술과 유희하는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AI가 그림을 생산함으로써 예술계 일자리가 줄어들 것을 염려하기보다는 어떻게 효과적으로 그 기술을 이용할지를 궁리해야 한다. 결국 누군가는 다른 이들보다 더 효과적으로 AI기술과 유희할 것이고 이런 예술가가 분명 더 쉽게 새로운 미술로 접근하게 될 것이다.

얼굴 하관만 있는 조각상
이미지출처: Unsplash

필자는 AI아트가 만들어낼 일자리의 소멸이 사소한 문제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예술가의 생계를 보장하는 사회적 제도와 법의 마련이지, AI아트에 대한 반대 운동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너무 성급한 예단일 수 있으나, 아마 전통적인 예술은 앞으로도 살아남을 것이다. 아날로그가 디지털의 시대에서 취향의 영역으로 살아남았듯, 그리고 사진술이 등장한 이후에도 회화가 살아남았듯. 사진술이 등장하자 많은 예술가와 평론가들이 회화가 멸종할까 공포에 떨었지만, 결국 회화는 살아남았다. 아직도 회화는 예술이라는 영역 안에서 모습을 슬쩍 바꾼 채 공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이 예술이 기술과 유희하는 방식이다. 인류는, 예술가는 항상 유연하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왔다.


필자는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가 AI에 유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는 것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포스트 휴먼’, 기계를 통해 신체와 정신을 확장한 새로운 인류이기 때문이다. 당신 손 위에 놓여있는 전자기기를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라. 당신은 이미 스마트폰이라는 확장된 신체를 통해 이 글을 읽고 있다. 혹자는 아마 안경 혹은 콘택트렌즈라는 기술로 보완된 시력으로 이 글을 읽을 것이다. 당신은 이미 기술과 인간의 잡종이다.

누가 AI를 두려워하랴?

  • 빌렘 플루서.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 커뮤니케이션북스, 1999.
  • 블로터, 게티이미지, AI 창작품 금지…예술 정의 두고 갑론을박, 2022.09.25.
  • 중앙일보, 제품인가 창작품인가…美 미술전 우승 AI그림에 커지는 논쟁, 2022.09.04.

유진

유진

예술과 사회, 그 불가분의 관계를 보고 기록하고 탐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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