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라는 말에 어떤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캔버스 앞에서 고뇌하는 화가의 모습? 거침없이 석고를 깎는 조각가의 모습? 혹은 벽면에 테이프로 바나나를 붙이고 그것이 예술이라 설명하는 누군가의 모습? 떠오르는 것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겠지만, 어쩐지 예술가란 날카로운 재능과 괴짜의 아우라를 지닌, 보통의 삶과는 동떨어진 인물들일 것만 같다.
오랜 세월, 예술계는 예술가의 천재성과 작품들의 순수한 미학적 가치를 강조하며 대중이 그사이에 무수한 ‘노동’의 과정을 자꾸만 잊게 만들었다. 그러나 사실 예술가들은 우리 사회 속의 직업인이다. 예술을 향한 열정만이 아닌 자신의 생계와 커리어를 건. 이번 글에서는 직업으로서의 예술이 갖는 의미와 가치를 드러내고, 그러한 담론의 상징으로서 우리 시대의 ‘예술 계약서’가 가져야 할 방향성을 고민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지난 반세기 동안 많은 시도를 거친 예술 계약서의 모습들을 살피며 궁극적으로 예술가, 예술계 종사자, 그리고 대중까지 모두가 상생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계약서는 어떤 모습일지 그려보려 한다.
예술가의 권리를 고찰한 아트 딜러
1971년 3월, 뉴욕 맨해튼의 스쿨 오브 비쥬얼 아트(School of Visual Arts)에서는 굵직한 글씨체로 ‘아티스트 권리 양도 및 판매 계약(The Artist’s Reserved Rights Transfer and Sale Agreement)’이라 쓰인 포스터 형태의 인쇄물이 학생들의 손을 타고 배포됐다. 이것은 그동안 획기적인 행보를 이어왔던 아트 딜러이자 개념 예술을 세상에 알린 큐레이터 세스 시겔롭(Seth Siegelaub)이 당시에 패기 넘치는 젊은 변호사였던 로버트 프로잔스키(Robert Projansky)와 협업한 프로젝트였다. 배포된 포스터에는 세스 시겔롭이 작성한 ‘예술계의 불공정성을 바로잡겠다’는 선언문과 실제로 적용 가능한 법률 조항들이 상세히 적혀 있다. 곧 ‘아티스트 계약(The Artist’s Contract)’이라는 약칭으로 알려진 이 기념비적인 출판물은 작품이 거래될 때 판매자와 구매자 간의 합의 내용을 새롭게 표준화하여 예술가의 저작권에 대한 경제적 처우를 개선하려는 과감한 시도였다.
이 계약서의 내용은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의 기준에도 혁신적인 부분이 많다. 가장 먼저 주목할 점은 작품에 대한 예술가의 권리를 1차적인 판매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발생하는 2차, 3차 재판매에서도 보장한다는 것이다. 그를 위해 이 계약서는 예술가가 작품의 모든 재판매 수익의 15%를 로열티로 청구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한다. 이것은 누군가가 무명 시절에 저렴한 값으로 판매했던 작품이 이후 이름이 알려지게 됨에 따라 시장에서 훨씬 증폭된 가치로 거래될 때 사실상 원소유권자인 예술가를 제외한 옥션, 갤러리, 컬렉터들만 이득을 보는 예술 시장의 폐단을 정확히 꼬집은 것이다. 더욱이 세스 시겔롭은 이 계약이 회화, 조각, 프린트 등 전통적인 물질성을 가진 매체뿐만 아니라 개념 예술, 미디어 아트 등 그 어떠한 새로운 형태의 작품에게도 적용될 수 있고, 또 적용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여 현대 예술의 지평을 넓혔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계약서가 세스 시겔롭 혼자만의 사상을 담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치밀한 고찰을 위해 모든 내용을 500여 명의 예술가, 아트 딜러, 변호사, 컬렉터, 미술관 관계자, 평론가 등의 의견을 수렴하여 작성했음을 계약서 1면에 밝힌다.
‘아티스트 계약’은 그 양식이 1970년대 초반에 걸쳐 프랑스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었으며, 수많은 예술 저널, 매거진, 법률 참고서 등에 실리며 국제적으로도 알려졌다. 또한, 다수의 예술가가 이 계약을 실제로 적용하여 주목받았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1987년 크리스티(Christie’s) 경매에서 독일 출신 개념 예술가 한스 하케(Hans Haacke)의 작품 “사회의 기름기에 대하여(On Social Grease)”가 9만 달러에 재판매된 경우가 꼽힌다. 최대한 많은 사람이 이 계약서를 알게 하고자 모든 것을 오픈 소스(open-source)로 배포한 세스 시겔롭의 초심을 이어받아 현재는 절판된 예술 출판물을 전문적으로 복간하는 비영리단체 ‘프라이머리 인포메이션(Primary Information)’의 웹사이트에서 무료로 양식을 다운로드할 수 있다.
반세기 후,
한국 예술계의 ‘표준’
오늘날에도 권리와 의무에 대한 표준을 고민하는 예술계의 시도는 갱신되고 있다. 그중 한국의 상황에 바탕을 둔 논의의 결과물로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도한 ‘문화예술 분야 표준계약서’가 있다. 여기서 ‘문화예술 분야’는 미술, 공예, 공연예술, 대중문화 등 총 11개 분야¹를 포함한 것으로, 각 분야에 맞춰 특화된 상세 계약서 양식으로 세분화되어 공개됐다. 2018년부터 예술경영지원센터, 여러 법무법인 등과의 공개토론회를 거쳐 구성된 이 계약서는 2022년 2월 최종 도입된 후로 많은 예술가와 예술계 종사자들에게 상생을 위한 기준을 제시해왔다.
계약서와 함께 배포된 ‘가이드북’에 따르면 표준계약서는 3가지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1) 산업적 특성을 반영한 공정한 계약 문화를 정립하고, 2) 계약 체결 시 판단의 근거를 제시할 수 있도록 하고, 3) 관련 법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높이는 것. 그러나 표준계약서의 의의는 단순히 법률적인 확실성이나 일의 편리를 위한 양식을 제공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1971년의 ‘아티스트 계약’이 작품에 대한 예술가의 권리 증진을 제창했다면, 2022년의 표준계약서는 그에 더해 예술가뿐만 아니라 큐레이터, 아트 딜러, 컬렉터 등 예술계를 이루는 모든 구성원이 서로의 권익을 침해하지 않고 협업을 위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도록 다양한 영역에 대한 이해를 강조하고 있다. 그 단적인 예로 ‘전시 및 판매위탁계약서’ 제 2조 1항에서는 ‘작가와 화랑은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신의를 좇아 행동한다’는 것을 ‘당사자의 기본적인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전속계약서’, ‘전시계약서’, ‘대관계약서’, ‘공동창작계약서’ 등 거의 모든 세부 양식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문화예술 분야 표준계약서’는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웹사이트에서 그 양식과 계약 내용의 해설을 담은 가이드북을 다운로드할 수 있다.
- 11개 분야: 1) 미술, 2) 공예, 3) 공연예술, 4) 만화, 5) 애니메이션, 6) 대중문화, 7) 방송, 8) 영화, 9) 출판, 10) 저작재산권, 11) 표준근로계약서
그리고 예술의 낭만을 보장하는 것
표준계약서가 한창 구상 중에 있던 2020년, 서울청년예술인회의에서는 또 다른 시각의 담론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미래를 여는 예술문≫이라는 스터디 모임을 통해 청년 예술가들이 각자의 경험을 모아 ‘예술가를 위한 낭만적인 계약서’라는 일종의 선언문을 작성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낭만계약서는 실제적인 양식을 갖추는 데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일한 시간에 따라 정확한 노동의 값을 매길 수도, 회사의 업무처리처럼 구체적인 결과물을 규칙적으로 배출할 수도 없는 문화예술 현장의 특수성을 공론화하기 위해, 예술을 계약서라는 조건적인 틀에 맞춰 넣으려 할 때 발생하는 ‘간극’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간극에 대해 예술문의 구성원인 문화예술기획자 강정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창작 영역에서의 계약이나 일은 협업과 협력이 필요하고, 협업과 협력은 계약 당사자 상호 간의 긴밀한 소통을 통해 이뤄진다. 이것을 구체적인 계약서 항목으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대다수의 계약이 표준계약서 형태로 이뤄지고, 세부적인 것을 기재하기보다 ‘합의한다, 논의한다’ 등으로 마침표를 찍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막상 일을 하며 의문이 생길 경우에도 대부분 눈치코치 혹은 경험에 의거해 문제를 해결하거나 결정하게 된다.’
_강정아, 『우리가 예술가를 위한 낭만계약서를 만드는 이유』
즉, 예술문은 낭만계약서를 통해 ‘예술 창작과 노동이 대가로 환원되는 실질적인 기준의 부재’를 토로하고 있다. 모든 예술은 고유하고, 그렇기에 예술을 위한 모든 활동은 개개인의 맥락과 상황 속에 놓인다. 이러한 상이함은 협력 관계의 사람들 간에도 사회적 합의를 매우 복잡하게, 혹은 아주 불가능한 것처럼 느끼도록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특히 그 합의가 기존의 자본주의적 잣대로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예술 노동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한 섬세한 것이어야 할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낭만계약서는 좋아서 시작한 예술이 업이 되고, 다시 삶이 될 수 있길 바라는 예술가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또 그렇게 만들어진 예술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눌 수 있기 위해 사회의 비호하에 예술 노동을 ‘안전하게 할 권리’를 주장한다. 때로는 그 일이 비물질적이고 비생산적일지라도.
‘예술가를 위한 낭만적인 계약서’는 아직 완성을 앞두고 있다. 그것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대한 예술문 구성원들의 생각과 기록은 서울청년예술인회의 웹진 단행본 『숨은참조: 청년-예술인』(2021)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표준이 되는 날을 위하여
결국 예술에 있어 ‘표준’을 제시한다는 것은 사실 무수히 많은 상황 중 고작 하나의 시나리오를 공상하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상황의 평균값이라는 의미에서의 표준이 아닌, 모든 것을 최대한 포용하겠다는 사회적 의미에서의 표준은 필요하지 않을까.
앞서 살펴본 3가지의 예술 계약서는 예술 노동과 그 가치에 대한 담론이 지난 반세기 동안 어떻게 진화해왔는지에 대한 경로를 보여준다. 세스 시겔롭이 노동의 결과물인 작품을 시장에 판매한다는 전제하에 예술가의 권리를 고찰했다면, 표준계약서는 그 작품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생태계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한 예술가와 협력자들의 의무를 조명했고, 낭만계약서는 그러한 의무적인 표준은 너무 모호한 것이라 관련자들 간의 좀 더 본질적인 토론이 있어야 예술 노동의 가치가 정립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지금부터의 담론은 어디를 향해야 할까. 필자는 다음과 같은 논점들을 추천하고 싶다.
- 예술가, 예술계 종사자, 그리고 대중 모두는 ‘예술은 예술만으로도 의미 있다’는 생각을 위안 혹은 무기 삼아 예술 노동의 가치를 희생시키지 않아야 한다. 기획자 강정아가 말하듯이, ‘예술의 지위가 예술가의 삶을 지탱해주진 않는다.’ 예술을 일구기 위해 일하는 많은 이들이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정당한 보상을 제공하기 위한 사회적 담론은 계속되어야 한다.
- 예술가와 예술계 종사자는 예술 활동 고유의 모호함이 있을지라도 서로의 직무를 이해하고 존중하여 본인이 추구하는 바에 대해 협력자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직업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토론을 공론화하여 대중 또한 예술이 사회적 공공재가 아닌,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점을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 마지막으로 대중은 모든 담론의 장에 본인들의 자리 또한 마련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복합문화공간’이라는 총칭 하에 예술을 선보이는 장소가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대중이 기관들에 의해 걸러지지 않은 다양한 모습의 예술을 접할 기회 또한 많아졌다. 이는 대중도 예술의 가치 평가와 실현에 참여할 수 있는 현장이 늘어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한 지금, 대중은 예술을 누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 생태계의 지속을 위해 시선을 갖고, 목소리를 내어주었으면 한다.
- 강정아, 우리가 예술가를 위한 낭만계약서를 만드는 이유, 예술人, 2022. 04.
- 서울청년예술인회의, 숨은참조: 청년-예술인, 2021. 02.
- 연합뉴스, 미술 분야도 표준계약서 도입… 불공정 관행 없앤다, 2019. 03. 12.
- 한국예술인복지재단 공식 홈페이지, 표준계약서 보급, 2023. 01. 26.
- Frieze, Can Artists Use Their Sale Contracts to Game the System?, 2021. 03. 10.
- MoMA 공식 홈페이지, This is the Way Your Leverage Lies: The Seth Siegelaub Papers as Institutional Critique, 2023. 01. 26.
- Seth Siegelaub & Robert Projansky, The Artist’s Reserved Rights Transfer and Sale Agreement, 1971
- The New York Times, When Artists Seek Royalties on Their Resales, 1987. 05.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