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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는 존재의
의미를 묻는 사이버펑크

복제되지 않는 인간성에 대한 서브컬쳐
'정이'와 '공각기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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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연상호 감독의 <정이>가 공개와 동시에 넷플릭스 전 세계 시청 순위 1위를 차지했습니다. 영화 자체에 대해선 호불호가 갈리지만, 국내 SF영화가 글로벌 시장에서 이목을 끌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인데요. SF 서브컬쳐 사이버펑크(Cyberpunk)의 문법을 빌려 기존 SF물의 클리셰를 적절히 배합했다는 점이 주요했습니다. 사이버펑크는 고도로 발달한 과학 기술과 무너진 사회체계 속 다채로운 인간 군상을 그리는 SF 장르입니다. 그 속에는 기술만능주의와 인간의 존재론적인 고민과 성찰이 담겨있죠. 사이버펑크가 던지는 인간 존재론적인 담론을 영화 <정이>와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를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미래에 대한 반항적인 경종,
사이버펑크

이미지 출처: <블레이드 러너>

사이버펑크의 펑크(Punk)에서 알 수 있듯이, 사이버펑크는 근미래에 과학이 가져올 풍요와 그로 인한 파국을 그리는 장르입니다. 그래서 사이버펑크 속 사회는 국가나 정부보다 과학기술을 개발하는 기업의 영향력이 크게 묘사됩니다. 철저히 자본주의의 원리로 굴러가는 과학 사회는 계급이 철저히 구분되어 있고, 하층민 사이에는 ‘허무주의’와 동시에 투쟁적인 의식이 짙게 깔려있죠. 투쟁은 기술을 보유한 기업이나 독재자와의 갈등의 양상으로 나타나는데요. ‘펑크’스러워야 한다는 점은 다른 SF 장르와 구분되는 사이버펑크만의 뚜렷한 특징입니다.

미학적인 측면에서 장르적 특징을 구분하기도 합니다. 1982년 개봉한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에서 묘사한 빼곡한 빌딩 숲, 어두운 골목길 사이사이마다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네온사인 간판, 안개가 가득 낀 듯 흐릿한 시야와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풍경이 대표적입니다. 혹자는 이런 요소들 때문에 사이버펑크는 ‘분위기’가 자체가 장르를 정의하는 주요한 요소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과학 기술과 자본주의의 산물인 빌딩들과 부를 누리는 부촌과 폭력과 난잡한 섹스, 마약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는 뒷골목 하층민의 삶, 자욱하게 깔린 고독과 허무주의, 기계화로 인해 잠식된 인간 본성 등 ‘발전’의 부정적인 면모를 묘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죠.

이렇듯 사이버펑크는 미래 사회에 대한 불신과 불안을 가감 없이 표출하면서, ‘자본과 과학’을 대표하는 절대자를 향한 투쟁을 강조하는데요. 그 근간에는 인간 존재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담겨있습니다. 과학의 발달 덕에 누리는 물질의 풍요 속 인간이 느끼는 고독감. 기업의 가파른 성장과 기술의 혜택 속 파편화된 개인. 202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아주 먼 얘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1980년대 사이버펑크가 상상한 과학 기술이 오늘날 대부분 실현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그들이 예견한 미래가 마냥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인간 복제에 대한 윤리적 고찰
<정이>

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정이>는 ‘사이버펑크’로 장르적 구분을 하기에는 조금 모호한 면이 있습니다. 인류는 이미 우주로 진출했으며, 지구에 남은 이들은 우주에 정착한 인류 간의 내전에 필요한 군수품을 생산하고 있죠. 인물 간의 대화를 통해 빈부격차가 극심하고, 기업의 역할이 적지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만, 우리가 가늠할 수 있는 가까운 미래는 아득히 넘은 듯 합니다. ‘근미래’로 국한되는 ‘사이버펑크’의 시대적 구분에서는 벗어나는 감이 있죠.

하지만 <정이>를 사이버펑크에 편입할 수 있는 건, 우리 시대에도 익숙한 과학적 산물인 ‘AI’와 ‘로봇’에 대해 밀도 있게 다루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끊임없이 ‘AI’의 윤리적 타당성을 실험합니다. 군수업체 ‘크로노이드’의 전투 AI 로봇 ‘정이’는 우주 내전에서 활약한 전설적인 베테랑이었으나, 식물인간이 된 ‘윤정이’의 뇌를 복제 이식해 탄생한 모델입니다. 뇌 복제 실험의 담당자인 윤서현 팀장은 윤정이 팀장의 딸로, 엄마의 생전 모습과 똑같은 AI 로봇의 전투력을 측정하고, 분석합니다. 엄마가 뇌사 상태에 빠지던 그날을 전제로 한 전투 시뮬레이션을 바탕으로 말이죠.

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정이>는 뇌 복제 기술을 기점으로, ‘정이’와 윤서현 팀장의 관계를 통해 인간을 대체할 ‘AI 로봇’의 정체성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자신의 뇌를 복제해 로봇에 이식하면, 그 로봇은 진정으로 자신을 대체할 수 있는지, 그렇다면 개인이란 객체는 무엇으로 정의되는지 묻는 것이죠. 이러한 시사점은 윤서현 팀장이 ‘뇌 복제’ 시술을 상담받는 장면에서 더욱 깊게 다루어집니다. 비용이 가장 비싼 A 옵션은 존재론적인 유일무이함을 보장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로봇에만 이식하지만, 최하위 옵션인 C는 수많은 로봇으로 양산될 수 있다는 설정은 인간 복제와 로봇 AI의 상용화에 대한 복합적인 윤리적 함의를 담고 있습니다.

기술이 대체할 수 있는 영역은 물질적인 측면에선 분명하나, 인간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윤리적인 체계에 도전받았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정이>는 ‘가족’과 ‘모성애’라는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으로 인간성의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인간은 무엇으로 스스로를 지각하는가
<공각기동대>

이미지 출처: <공각기동대>

사실 <정이>가 던진 ‘인간을 정의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1995년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에서 심도 있게 다루어진 적 있습니다.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공각기동대>는 개봉 당시에는 큰 인기를 끌지 못했으나, 사이버펑크의 장르적 요소를 듬뿍 담은 풍경과 전위적인 연출로 사이버펑크 장르를 비롯한 SF 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작품입니다. 사이버펑크를 적극 차용해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둔 <매트릭스>도 <공각기동대>를 오마주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공각기동대>의 의체라 불리는 로봇에 뇌를 이식한다는 설정은 <정이>와 동일하나, 엄밀히 말하면 <공각기동대> 속 의체는 기계로 만든 육체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정도만 다를 뿐이지 대부분 의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정이>처럼 뇌를 복사하거나 오늘날의 ‘AI’와 유사한 개념의 뇌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공각기동대>

인간의 육신이 생물학적인 정의를 내릴 수 없을 만큼 기계화되었을 때, ‘인간’임을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온전한 뇌뿐일 것입니다. 우리는 지성체이고, ‘뇌’는 모든 것을 판단하는 중추신경계의 중심이니까요. AI를 이식하면 안드로이드, 온전한 뇌를 가지고 있으면 사이보그인 셈입니다. 그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는 건 영혼의 개념과 유사한 ‘고스트’입니다만, 이마저도 프로그램을 통해 복제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사이버(Cyber)상의 네트워크가 인간 개인에게 할당되어 뇌도 해킹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공각기동대>의 주인공 쿠사나기 모토코는 모든 육체가 의체인 존재로, 자신이 안드로이드인지, 사이보그인지 끊임없이 의심합니다. 작품은 우리가 영혼의 실체를 모르는 것처럼, 의도적으로 고스트의 존재를 모호하게 표현합니다. 그러면서 쿠사나기의 의중은 더욱 깊어집니다. <정이>가 물리적으로 실존하는 ‘대상’을 기점으로 존재론적인 의문을 묻는다면, <공각기동대>는 영혼과 유일성에 대해 화두를 던집니다.


이미지 출처: <블레이드 러너 2049>

이젠 AI라는 단어가 그렇게 새롭지 않은 시대가 됐습니다. 빅데이터와 딥러닝으로 학습된 기계들이 일상에 스며들어 우리의 삶을 이롭게 하고 있습니다. 아직 멀게만 느껴졌던 ‘가상현실’도 팬데믹의 물살을 타고 상용화되기 시작했고, 전기차, 스마트폰 등 과학기술의 부산물들은 특정 기업을 통해 독점되고 있죠. 자본주의 시장의 생리는 너무나도 자명하게 여겨져서 어디서부터 뜯어고쳐야 할지 막막합니다.

<정이>와 <공각기동대>가 다룬 인간 존재론적인 논의는 기우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1980년대 사이버펑크 장르물들이 그린 미래는 이미 다가왔습니다. 이젠 낡게 느껴지는 영역인 ‘정통신기술’의 발달로 네트워크 망은 그 어느 때보다 인간을 가깝게 만들었으나, 우리가 직접 감각할 수 있는 영역들을 점점 과학에 넘겨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무언가를 하지 못하는 순간이 왔을 때, 모든 권한이 기술에게 넘어갔을 때 우린 인간으로서 어떤 것을 할 수 있을지 진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사이버펑크는 미래에 대한 유쾌하지 않은 상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필자는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늘 최악의 경우를 피하거나, 겪으면서 진화해왔습니다. 수많은 진화가 지금의 인류를 있게 한 것이죠. 그런 인간이 진화하기를 멈추고, 자신과 똑같은 무언가를 만든다면, 어떤 미래가 펼쳐질까요. 복제는 진화가 아니고, 증식입니다. 기술적 진보가 과연 진화를 확신할 수 있을까요? 두 작품이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인간 생존을 위한 진화와 개성의 다양성이 아닐까요.


지정현

지정현

새삼스러운 발견과 무해한 유쾌함을 좋아하는 사람.
보고, 듣고, 느낀 예술을 글로 녹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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