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신호가 차단된 곳에서 화장실에 가지 말고 하루 한 판씩 두자. 만약 내가 잘못된 의혹을 제기했다면 깔끔하게 은퇴하겠다.”
영화 <타짜2> “벗고 칩시다”라는 대사가 연상되는 저 말은 실제 지난해 12월, 중국의 프로 바둑기사 양딩신 9단이 인공지능 부정행위(치팅) 의혹을 받는 동료 기사 리쉬안하오 9단에게 던진 말이다. 바둑계에 ‘알파고’ 충격파가 불어닥친지 7년이 지났지만 바둑계는 여전히 인공지능 치팅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번 사건의 발단은 지난해 12월 리쉬안하오 9단이 춘란배 세계 바둑 선수권 대회 준결승에서 세계 랭킹 1위 신진서 9단을 꺾는 ‘이변’을 일으킨 것이었다. 이날 리쉬안하오는 인공지능 일치율 85%라는 말도 안 되는 정확성을 보였는데, 여기에 그가 이전 대회부터 매경기 5~6번 화장실에 다녀왔다는 등 수상한 행적이 알려지며 프로기사들이 의혹을 제기하고 나섰다. 중국 프로기사들까지 선수 생명을 걸고 공개저격에 나섰으나, 중국바둑협회는 되려 목소리를 낸 쪽을 처벌하며 ‘부정행위가 발생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못을 박았다. 하지만 중국바둑협회가 일축한 이후에도 ‘와이파이 차단기를 설치했더니 리쉬안하오의 승률이 줄더라’는 등 구설수가 나오면서 의혹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똑같은 논란이 해외 체스계에서도 있었다. 지난해 9월 대형 체스 대회인 싱크필드 컵에서 한스 니먼(Hans Niemann)이라는 19살 유망주가 세계 챔피언이자 53대회 연속 무패행진을 달리던 마그누스 칼슨(Magnus Carlsen)을 무너뜨리는 이변이 발생했다. 니먼은 흑으로 칼슨을 잡았는데 통상 백이 더 유리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모두가 놀랄 만한 이벤트였다. 니먼의 승리가 치팅 의혹으로 번진 건 칼슨이 다음 라운드 경기가 진행되기 전 돌연 대회 기권을 선언하고 귀국길에 오르면서였다. 게다가 칼슨이 떠난 직후부터 몸수색이 강화되고, 생중계 송출 시간을 15분 늦추는 등 보안이 강화되며 ‘칼슨이 니먼의 치팅을 의심하고 있다’는 풍문이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의혹은 유명 체스 유튜버들과 레딧 커뮤니티를 통해 순식간에 번졌다. 대회 심판장이 나서 니먼이 치팅하지 않았다는 공식 입장을 내놓았지만, 칼슨이 ‘치팅은 물증으로 잡을 수 없다’고 맞서며 결국 대규모 소송전으로 치달았다.
인공지능이 등장한 이후 바둑·체스·장기처럼 유구한 역사를 가진 ‘마인드스포츠’들의 문화도 달라지고 있다. 최상위권 선수들마저 맥을 못추릴 정도의 인공지능이 몰고 온 충격파는 각 종목의 흥망까지 결정할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다. 가령 한국 바둑계는 ‘알파고 쇼크’ 이후 하향일변도를 걸으며 멸종위기에 처했다. 반면 체스계는 ‘딥블루 쇼크’ 이후 30년이 지났는데도 팬데믹 동안 두 배 넘게 성장하며 무시할 수 없는 시장 규모가 됐다. 인공지능이 미친 영향은 동시에 긍정적이기도, 부정적이기도 했다. 정형화된 틀을 부수며 인간의 지평을 넓혀줬다는 시각도 있지만, 치팅 수단으로 악용되며 순수하게 즐기려는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있기도 하다. 이번 글에서는 인공지능 등장 이후 마인드스포츠 문화와 해외 체스계는 흥하고, 바둑계는 망해가는 현상을 파헤쳐보려 한다. 인공지능은 어떻게 마인드스포츠 문화를 바꿨을까. 왜 두 종목의 희비는 엇갈렸을까. 바둑계는 이대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까. 우선 인공지능이 처음으로 인간을 넘어섰던 현장으로 가보자.
바둑판과 체스판 위에 드리운
‘인공지능’의 그림자
모든 마인드스포츠를 통틀어 인공지능이 처음으로 인간을 넘어선 건 1996년이었다. 10년 넘게 체스 챔피언으로 군림해온 게리 카스파로프(Garry Kasparov)가 IBM이 내놓은 슈퍼컴퓨터 ‘딥블루(Deep Blue)’와의 1차전에서 37수 만에 패하며 인공지능 시대의 도래를 알렸다. 이후로 체스 인공지능은 발전을 거듭해 인간은 결코 넘어설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가장 최근에 나온 인공지능 프로그램인 ‘Stockfish 15’는 공식 레이팅 점수가 3500점대를 기록해 역대 최강으로 꼽히는 마그누스 칼슨의 최고기록(2882)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통상 실력이 비슷한 GM을 이겨도 5점밖에 못 받는다는 걸 감안한다면 600점 차이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실수를 하지 않는 인공지능을 상대로 인간이 이길 확률은 0%라 봐도 무방하다.
인공지능의 화려한 발전에 체스 인구가 점점 줄고, 결국 도태될 것이라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하지만 30년이 다 돼가는 현재, 이것이 기우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체스를 즐기는 사람은 딥블루 등장 이후에도 꾸준히 늘어 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마인드스포츠로 자리매김했다. 지난해 12월, 세계에서 가장 큰 온라인 체스 사이트인 체스닷컴(Chess.com)은 멤버수가 1억 명을 돌파했다고 발표했다. 2014년 1천만 명, 2017년 2천만 명, 2020년 3천 5백만 명으로 서서히 증가하다가, 드라마 ‘퀸즈갬빗’과 팬데믹 영향으로 폭증한 것이다. 새롭게 유입된 사람들을 동력 삼아 체스계는 매서운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집계된 시장 규모는 한화로 2조 8500원 정도며, 2028년 3조 5천억으로 증가할 전망이라고 한다.
한편 바둑 인공지능이 인간을 처음 넘어선 건 2016년 3월이었다. 구글 딥마인드팀이 내놓은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AlphaGo)가’ 당시 세계 바둑 랭킹 1위인 이세돌 9단을 무너뜨린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더 적을 것이다. 바둑은 체스에 비해 경우의 수가 많고(체스는 약 10^120가지, 바둑은 약 10^170가지) ‘패’라는 복잡한 규칙도 존재해 인공지능이 넘을 수 없다고 여겨지던 분야였다. 하지만 딥러닝 기술을 앞세운 알파고는 딱 한 경기를 내주고 이세돌 9단을 잡아냈다. 이후 바둑 인공지능은 수많은 프로 경기를 학습하며 더욱 정교해졌고, 체스 인공지능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넘볼 수 없는 경지에 다다랐다. 현재는 다양한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난립하고 있는 상황이며 인간을 상대로는 몇 점을 주고 시작해도 승률이 99%를 넘을 정도라고 한다.
인공지능의 등장 이후에도 폭발적인 인기를 끈 체스와 달리, 바둑계의 상황은 더 없이 어둡다고 한다. 바둑계와 관련해 마지막으로 공식적인 통계가 나온 건 2017년 1월 한국갤럽이 발행한 ‘2016 대한민국 바둑백서’인데, 해당 통계에 따르면 알파고-이세돌 대국으로 전국민적 관심사가 높았던 상황에서도 바둑을 둘 줄 안다고 답한 응답자는 5명 중 1명 꼴이었고, 평소 바둑을 즐기는 사람은 4%뿐이었다. 총인구로 계산해보면 200만 명도 안 되는 건데, 이마저도 중장년층 남성이 대부분이라서 앞으로도 꾸준히 줄어들 전망이라고 한다. 이러한 흐름 속 지난해 12월에는 오랫동안 세계 유일 바둑학과로 자리매김했던 명지대 바둑학과가 폐과된다는 발표가 나와 전망을 한층 어둡게 하기도 했다. 미래에는 정말 박물관에서나 바둑판을 보게 될 지도 모르겠다. 이쯤에서 궁금증이 생긴다. 인공지능 충격파를 받았다는 점은 같은데 두 스포츠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인공지능 충격파, 바둑은 망하고
체스는 흥하는 이유는?
1) 진입장벽이 높고, 직관적이지도 않아
두 종목의 희비가 교차한 현상을 두고 많은 분석이 나오지만, 우선은 자체적인 특성에 기인한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바둑의 진입장벽은 높기로 잘 알려져 있다. 바둑 좀 둘 줄 안다는 단계에 이르는 데 수 년은 걸리고, 실력을 올리기도 어려워 수십 년 동안 같은 급에 머무르는 사람도 있다. 바둑은 직관적이지도 않다. 다른 종목은 기물 수 등을 토대로 딱 보면 누가 이기고 있을지 짐작할 수 있는데 바둑은 좀 둘 줄 안다는 사람들이라도 계가(집을 세는 일)나 형세 파악을 어려워 한다. 바둑을 모르는 일반인이라면 정말 ‘희고 검은 건 돌이요, 누르스름한 건 판이로구나’ 할 수밖에 없다. 바둑은 바쁜 일상 속 가벼운 취미로 즐기기에도 부담스러운 편이다. 장고바둑의 경우 경기 시간은 기본적으로 2~3시간이 넘고, 속기바둑으로 둔다고 해도 30분 안쪽으로 끝내기는 어렵다고 한다.
반면 체스나 장기는 행마법(기물이 움직이는 방식)만 잘 익히면 즐길 수 있다. 초반 포석이나 오프닝을 공부하고 외우면 물론 승률을 더 높일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단계까지는 문제 없이 도달할 수 있다. 또한 체스는 직관적이다. 기물 모양도 다르고, 잡힌 기물 수에 따라 이기고 지는 상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경기 시간도 상대적으로 짧다. 불렛(1분), 블리츠(3~5분), 래피드(10분 이상), 스탠다드(1시간 30분 이상)으로 각자의 시간에 맞게 즐길 수 있다. 인공지능이 최상위권 프로선수들도 압도하는 상황에서 어떤 경지에 이르겠다는 목표로 체스와 바둑을 배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순수한 즐거움만이 목표가 된 상황에서 ‘더 쉽고 간편하게 즐길 수 있다’는 특성이 두 마인드스포츠의 흥망을 결정했다는 주장은 나름 설득력이 있어보인다.
2) 인공지능 치팅에 대한 대처 안일해
인공지능 치팅에 대한 대처에서도 차이가 있다. 한국 바둑계는 인공지능 프로그램 보급 초창기에 부정행위를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다. 바둑을 안 배운 이들이 인공지능을 활용해 수십 년 이상 바둑에만 정진한 사람들을 농락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뒤늦게 부정행위를 방지하는 프로그램이 나온 뒤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안티 치팅 프로그램은 인공지능 수와 인간 수의 일치율을 바탕으로 부정행위 여부를 판단하는데, 중간중간 결정적인 순간에 몇 수만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경우에는 잡을 수 없다. 이로 인해 온라인 바둑 플랫폼에 불신이 가득해졌고, 학을 떼고 바둑을 접는 이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프로들의 공식 대회에서도 잊을 만하면 치팅 소식이 들려온다. 휴대폰 사용, 화장실 이용 등의 규칙을 발빠르게 바꾸지 못한 안일한 대처 때문이라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일찍이 인공지능에 자리를 내어준 체스계에서는 인공지능 치팅을 잡아내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도입했다. 체스닷컴의 경우 8년 넘게 모은 방대한 데이터를 토대로 치팅 방지 알고리즘을 만들어 치팅을 잡아내고, 판단이 애매한 경우에는 치팅만 심사하는 전문가 팀을 운영해 최종적인 결정을 내린다. 체스닷컴 측은 일반인 경기뿐만 아니라, 마스터들간 경기에서도 여러 번 치팅을 잡아 자백을 받아냈다고 밝혔다. 오프라인 체스 경기(OTB: Over The Board)에서도 금속 탐지, 생중계 딜레이, 전력 측정 등 다양한 방법으로 치팅 여부를 판단한다. 물론 이러한 노력에도 치팅을 물증으로 잡아내기란 매우 어렵다고 한다. 다만 이렇게 치팅에 대해 단호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입문자들에게 안전하게 즐길 수 있다는 시그널을 보낸 점 역시 중요한 성공 비결이라고 볼 수 있다.
3) 한국의 치열한 경쟁 문화에서 비롯돼
문화적인 차이에서 비롯됐다는 시각도 있다. ‘영재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고, 바둑이 두뇌활동에 좋다는 인식이 널리 퍼진 한국에서는 어려서부터 자녀를 바둑교실에 보내는 학부모들이 많다. 아이들은 짧은 시간 동안 바둑을 배울 뿐, 제대로 즐길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바둑이 놀이가 아닌 배움의 대상이 되며 흥미를 잃게 됐다는 것이다. 정말 동네를 거닐다 보면 바둑 기원보다 바둑 교실이 더 많은 듯하다. 이마저도 대부분 동네 기원들은 낡고, 젊은 사람들이 선뜻 들어가기 어려운 분위기다.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가 없는 것이다. 바둑 교실이 바뀌어야 할 텐데, 요즘에는 바둑 교실을 차리면 패가망신한다는 말도 나온다. 아이에게 바둑을 가르치려는 부모들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정확한 원인은 모르겠다. 선행학습해야 할 게 태산인데 시간 낭비라는 판단 때문일지도, 이미 인공지능이 바둑계를 점령한 상황에서 ‘배워봐야 어디 가서 인정 받지 못한다’는 인식이 퍼진 탓일지도 모른다. 다만 어느 쪽이든 해결하기 굉장히 어려운 난제라는 건 분명해 보인다.
반면 해외에서는 ‘체스는 놀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체스를 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덕분이다. 우선 유럽과 미국에서는 대부분 가정에서 체스판을 보유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한 체스 용품 판매 사이트가 판매량을 바탕으로 보급률을 계산했더니 전 세계 83%의 가정에 체스판이 보급됐다는 수치를 얻었다고 밝혔다. 학교에서도 아이들은 동아리와 ‘클럽’에 들어가 다른 또래 아이들과 체스를 즐긴다. 도심에서도 체스를 즐기는 이들이 자연스럽게 풍경 속에 녹아들어 있다. 노천 카페 앞에서 체스판을 사이에 두고 여유롭게 경기를 즐기는 모습들. 심지어 체스 공원이 따로 조성된 도시도 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체스를 접한 아이들은 자라서도 체스를 배움의 대상이 아닌 놀이로 생각한다. 인공지능 습격 이후에도 체스를 즐기는 사람이 늘어난 건, 체스가 어떤 압박과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순수하게 즐길 수 있는 놀이는 걸 많은 사람들이 경험해 알고 있어서가 아닐까.
양날의 검 인공지능,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부정행위에 대해서만 다뤘지만 인공지능이 반드시 안 좋은 영향만 마치는 건 아니다. 되려 틀에 박혀 있던 인간의 시야를 넓히고 전략을 풍부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가령 요즘 프로 바둑에서는 ‘삼삼 침입’이라 해서 모퉁이로부터 가로 세로 각각 3칸씩 떨어진 지점에 돌을 놓아 실리를 챙기는 전략이 대세라고 한다. 삼삼 침입 전략은 인공지능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찬밥 신세였다. 초심자가 이렇게 두면 “실리를 밝히다가 대세를 잃는다”며 선생한테 혼나곤 했다고. 하지만 알파고가 세련된 삼삼 침입 전략을 보여준 뒤부터는 삼삼 침입이 없는 프로 경기를 찾는 게 더 힘들 정도가 됐다. 이 전략 말고도 프로 바둑 기사들이 인공지능을 활용해 더 많은 전략을 연구하면서, 프로기사들의 평균 기력이 대폭 상승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부정행위를 막을 수만 있다면 인공지능이 바둑계에 지대한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인공지능의 수혜는 체스계도 톡톡히 맛봤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체스 선수이자 영화 ‘세기의대결’의 주인공이기도 한 바비 피셔(Bobby Fischer)는 체스 오프닝 중 하나인 카로-칸(Caro Kann)을 두고 ‘겁쟁이들이 무승부를 노리고 두는 오프닝’이라 폄하했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분석이 나온 뒤로는 꽤 쓸 만한 오프닝이라는 게 알려져 최상위권에서도 높은 인기를 끌고 있다. 또한 인공지능은 전략을 풍부하게 해줄 뿐 아니라 초심자들이 입문하는 과정에도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체스닷컴을 비롯한 주요 체스 사이트에서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이용해 처음 체스를 접하는 사람들에게 최선의 수를 알려주고, 난이도별로 대국을 할 수 있게 해 빠르게 흥미를 돋군다. 입문 과정이 과거 도제식으로 깨지면서 배우던 시절에 비해 훨씬 간소화되고 쉬워진 것이다. 체스의 인기가 폭발한 배경에는 인공지능이 진입장벽을 낮춘 영향도 분명히 있을 테다.
인공지능은 마인드스포츠계에서 반드시 배척해야 할 존재가 아닌, 유용하게 다룰 수 있는 양날의 검이라 생각한다. 부정행위를 잡아내기 위한 방법과 기술을 발전시키고, 순수하게 경기를 즐기려는 사람을 돕는 용도로 활용할 수 있다면, 바둑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거란 우려와는 반대로 전례 없는 호황을 맞을 수 있다. 최근 체스계가 그랬듯이 말이다. 따라서, 바둑판이 박물관으로 가게 될까, 누군가 묻는다면 아직 대답은 ‘글쎄’다. 바둑의 즐거움을 온전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한 언제든 불 붙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바둑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보다 가벼워져야 하겠다. 따라서 오늘날 바둑계의 사명은 해외에서 그러하듯 어린 아이들이 바둑을 놀이로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에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명지대 바둑학과 폐지를 계기로 바둑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논의들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먼 훗날을 위한 씨앗들이 안전하게 잘 심어지길 바란다.
인공지능이 문화예술 시장 대부분을 점령해가고 있다. 문학은 물론, 음악, 그림 등 대부분 분야에서 인간을 아득히 뛰어넘는 수준의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등장해 시장을 잠식해나가는 중이다. 기존 산업이 망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도 나왔지만, 오히려 순수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남아 새롭고 순수한 생태계가 형성되고 있다. 요즘도 유명 체스 유튜버들의 영상을 보다 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신의 한 수’에 놀라고 감탄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물론 인공지능 프로그램에 돌려보면 뻔한 정답일 수 있지만, 한 인간의 오랜 노력과 고민과 세월이 압축돼 있는 한 수이란 걸 알기에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건 아닐까. 어쩌면 인공지능은 아무것도 앗아간 게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인공지능은 결과보다도 그 이면에 담긴 무언가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해줬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