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의미를
사유하게 만드는 영화들

주 69시간 시대를 맞이하며
고민해보는 인간 노동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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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노동부에서 발표한 ‘주 최대 69시간 근로 개편안’이 연일 화제입니다. 필요할 때 바짝 일하고 쉴 때 편히 쉬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는데요. ‘과로사 조장법’이라는 멸칭까지 생기며 시대 퇴행적이라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해당 개편안이 단순히 매주 69시간을 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정부도 재검토를 진행하고 있다고 하고요. 하지만 ‘일할 자유란 무엇인가’에 관한 여러 논쟁과 질문을 야기한 것도 사실입니다.

더 많이 일해서 더 많이 버는 것이 과연 정답일까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일할 자유’를 진정한 ‘자유’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근본적인 문제로 돌아가 노동이란 무엇일지 생각해볼 수 있는 네 편의 영화를 골라 보았습니다. 1927년 작 ‘메트로폴리스’부터 2020년 작 ‘노매드랜드’까지. 각 시대상을 고스란히 담아내 영화의 사회적 실천을 도모한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메트로폴리스’, 1927, 프리츠 랑

현대 사회에도 계급이 존재할까요? 1920년대에 제작된 독일의 무성영화 ‘메트로폴리스’는 지하와 지상으로 나뉜 계급 사회를 그려냅니다. 지하에선 노동자들이 시계의 초침처럼 움직이며 비참하게 살고 있고, 지상에서는 자본가들이 그 노동을 이용해 호화로운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영화 ‘메트로폴리스’ 스틸컷
영화 ‘메트로폴리스’ 스틸컷, 이미지 출처: IMDb
영화 ‘메트로폴리스’ 스틸컷
영화 ‘메트로폴리스’ 스틸컷, 이미지 출처: IMDb

‘메트로폴리스’는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그려낸 최초의 SF 영화인데요. ‘블레이드 러너’, ‘마이너리티 리포트’ 등 후대 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표현주의 영화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기하학적인 건축 양식, 과장된 움직임, 빛과 그림자의 실험적인 사용 등으로 두 계급 사이의 간극을 뚜렷하게 그려내는데요. 수많은 노동자가 열을 맞춰 마치 시계 침처럼 기계적으로 걸어가는 장면, 지상 세계로 가기 위해 우르르 계단을 오르는 장면 등은 가히 압도적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영화 ‘메트로폴리스’ 트레일러, 동영상 출처: Rotten Tomatoes Classic Trailers

이처럼 영화는 자본과 노동을 둘러싼 모순적이고 부조리한 사회 현실이 극적으로 그려냅니다. 극 중 자본가의 아들 페리타는 지하 세계에 내려가 노동자와 하루 동안 역할을 바꿔 보는데요. 100년 전에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페리타는 이렇게 외칩니다.
“아버지, 하루 10시간 근무는 너무 과합니다!“


‘성냥공장 소녀’, 1990, 아키 카우리스마키

영화 ‘성냥공장 소녀’ 스틸컷,
영화 ‘성냥공장 소녀’ 스틸컷, 이미지 출처: IMDb

현실적인 이야기는 때론 가장 잔혹합니다. 영화 ‘성냥공장 소녀’에는 단 하나의 무서운 장면도 존재하지 않지만, 차갑고 건조하며 매섭기 그지없습니다. 영화는 안데르센의 동화 ‘성냥팔이 소녀’에서 모티프를 따와 성냥공장에서 일하는 이리스의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기계 앞에서 하루를 보낸 뒤 월세를 내고, 8프랑을 내고 샤워를 하고, 499프랑짜리 원피스를 샀다는 이유로 의붓아버지에게 뺨을 맞고, 모르는 이와 하룻밤을 보낸 뒤 1,000프랑을 받고, 약국에서 지폐 두 장으로 쥐약을 삽니다. 이리스가 행하는 모든 행위와 결과는 모두 돈으로 환산되지요.

영화 ‘성냥공장 소녀’ 스틸컷
영화 ‘성냥공장 소녀’ 스틸컷, 이미지 출처: IMDb

성냥을 태우며 자신이 바라는 것들을 상상하던 동화 속 이야기처럼, 이리스도 자신의 성냥을 하나씩 태우며 무언가를 해나가기 시작하는데요. 이리스가 마지막 성냥을 태울 때 흐르는 노래 속에 이런 가사가 등장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나의 모든 달콤한 꿈을 헛된 망상으로 망쳐놓았나요?” 이처럼 영화 ‘성냥공장 소녀’는 그의 달콤한 꿈이 왜 망상이 되어버려야 했을지 고민하게 만듭니다.


‘로제타’, 1999, 장 피에르 다르덴-뤽 다르덴

영화 ‘로제타’ 스틸컷
영화 ‘로제타’ 스틸컷, 이미지 출처: IMDb

“네 이름은 로제타. 너는 일자리를 구했어. 너는 시궁창을 벗어날 거야. 너는 정상적인 삶을 살 거야.”

1999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 ‘로제타’에도 그저 평범한 삶을 꿈꾸는 한 소녀가 있습니다. 이 영화엔 별다른 줄거리가 없습니다. 그저 로제타가 일자리를 구하는 과정만을 보여줍니다. 그는 위험한 차도를 무단횡단해야 나오는 캠프촌에서 이를 악물고 매일을 살아갑니다. 알코올 중독자인 어머니처럼 되고 싶지 않다면서요.

영화 ‘로제타’ 트레일러, 동영상 출처: Les Films du Fleuve

이 영화의 특징 중 하나는 불안정한 로제타의 삶을 핸드헬드 방식으로 밀착해서 촬영해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배경음악도 없이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아내 주인공의 내면에 온전히 집중하도록 합니다. 로제타가 느끼는 신체의 고통, 그의 거친 숨결, 고달픈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요.

주목할 점은 영화 속 인물들이 갈등을 빚을 때 그 분노의 대상이 본질적인 구조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로제타는 일자리를 얻기 위해 다른 이를 고자질하고, 자신이 잘린 것은 다른 이의 모함 때문이라 소리치죠. 하지만 결국 로제타에게 마지막으로 손을 내미는 것은 돈도 일자리도 아닌 한 명의 친구입니다.

삶의 부침은 때론 나를 제외한 다른 누구도 응시하지 않게 만듭니다. 그것이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도록 하면서요. 어딘가에 오르기 위해 누군가를 짓밟는 경쟁심이 아니라, 지평선이 보이는 평지에서 다 함께 손잡고 있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이 아닐지 생각해봅니다.


‘노매드랜드’, 2020, 클로이 자오

영화 ‘노매드랜드’ 스틸컷
영화 ‘노매드랜드’ 스틸컷, 이미지 출처: IMDb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노매드랜드’는 집 없이 떠도는 ‘노매드’의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원작 소설의 부제가 ‘21세기 미국에서 살아남기’인 것처럼 영화 또한 동시대 우리 사회의 모습을 가감 없이 현실적으로 그려내는데요. 경제위기 이후 홀로 남겨진 주인공 ‘펀’도 집을 떠나 밴을 타고 낯선 길을 달립니다. 하나의 안정적인 직장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존 물류 창고에서 일하는 등 여러 단기직을 전전하며 불확실한 나날을 보내죠.

영화가 그려내는 변동적이고 불안한 일상과 달리 그가 발을 붙이고 있는 땅은 넓고 굳건하기만 합니다. 카메라에 담긴 자연은 광활하고 아름다우며 왠지 모를 해방감을 전하죠. 영화는 극적인 이야기나 서사구조 대신 그가 위치한 곳 자체에 주목합니다. 어찌 보면 펀의 삶은 팍팍하고 희망이 없는 그 무엇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각자의 사연을 가진 노매드가 있고, 그들은 서로에게 온기와 용기를 전합니다.

영화 ‘노매드랜드’ 스틸컷
영화 ‘노매드랜드’ 스틸컷, 이미지 출처: IMDb

집이 없다는 것은 어디서든 살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정해진 곳에서 쳇바퀴 돌듯 살아가는 것이 누군가에겐 정답일 수도 있고, 어딘가를 떠돌며 나의 인생을 개척하는 것이 답일 수도 있지요. 어떤 선택은 자발적일 수도 있고 또 어떤 상황은 비자발적일 수도 있지만요. 어쩌면 우리가 이미 살고 있는 불안정한 사회는 그가 보내고 있는 일상과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노동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 중 하나이다. 우리는 노동을 통해 우리 자신을 실현하고, 세상을 바꾸고, 더 나은 삶을 추구할 수 있다. 노동의 가치는 그것이 제공하는 제품 또는 서비스에 달려 있지 않다. 노동의 가치는 인간적인 행위 자체에 있다.”

_알랭 바디우

자본과 노동 그리고 삶의 문제는 어떤 단어와 몇 개의 문장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떤 영화도 현실을 그대로 담아낼 순 없고요. 소개한 영화 중에서도 노동자를 단순히 불행한 인간인 것처럼 대상화한 장면도 있으며, 현실의 문제를 제대로 짚어내지 못한 지점도 있지요. 하지만 어떤 영화는 나름대로 그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하며 지금의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전합니다. 어떻게 일하며 살아야 할지. 우리는 왜 일해야 할지 같은 것을요. 불확실한 것들 앞에서 하루는 속수무책으로 좌절하고, 또 하루는 기꺼이 방황하기를 택하면서 우리는 또다시 일을 하며 살아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임수아

임수아

아름다운 것만이 삶을 의미있게 만든다 믿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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