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은 전시 감상을
어떻게 바꾸나

스마트폰의 시대
우리는 어떻게 전시를 감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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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카메라
이미지 출처: Unsplash

우리는 스마트폰을 들고 미술 전시를 보러 간다. 이는 모두가 작은 사진기를 손에 쥐고 전시를 보러 간다는 뜻과 마찬가지다. 전시장은 사실 사진 찍기 너무나 좋은 곳이다. 조명은 밝고 단색의 배경에 대개 아름다운 작품이 걸려있다. 어떤 사진관도 이렇게 값비싼 장식으로 내부를 꾸미지는 못할 것이다. 게다가 전시는 우리의 사회적 욕구도 충족시켜준다. 사진관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사진 한 장을 남길 뿐이지만, 전시는 우리가 ‘문화생활’을 누리고 있다는 충족감까지 전달한다. 이제 어떤 전시는 이 기능에 초점을 맞추기도 한다. 아름답게 꾸며진 ‘포토존’이 입구부터 조성되어 있고, 전시 곳곳에도 ‘포토 스팟’이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서 포토 스팟으로 꾸며진 전시를 비판할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스스로의 의도에 상관없이 이미 많은 전시가 포토 스팟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진 촬영을 다시
금지할 수는 없을까?

인스타그램 3D 로고
이미지 출처: Unsplash

필자 주변의 몇몇 사람들은 포토 스팟으로 변모한 전시에 염증을 표하고는 한다. 다시 과거 미술 전시 관행처럼 촬영을 아예 금지했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대부분의 전시가 사진촬영을 허가할 것이라는 게 필자의 전망이다. 이에 대한 현실적인 이유를 지적하자면, 일단 전시도 홍보가 필요한 행사라는 점이다. 아무리 훌륭한 작품을 섬세하게 기획해 들여와도 사람들이 보러 오지 않으면 전시는 제대로 기능할 수가 없다. 전시는 정말 이름 그대로 ‘전시’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SNS에 사진을 공유하는 것이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는 2023년에 전시에서 촬영을 금지한다면 이보다 홍보에 손해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홍보를 위해서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해시태그 이벤트나 사진 촬영 이벤트를 진행해야 마땅하다. 최근 많은 현업 큐레이터들과 전시 운영 관련자들이 인터넷 포털 사이트, SNS 등을 통한 온라인 전시 홍보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감상’을 위한 전시에서
‘방문’을 위한 전시로

이쯤에서 필자는 이러한 의문을 가지는 독자도 등장하리라 생각한다.

“전시장에서 사진을 찍는 것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다면 사진으로 찍어서 다시 감상하고 싶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 필자도 역시나 전시에서 많은 사진을 찍는다. 사진이 있어야 전시를 나간 후에도 전시를 잘 기억할 수 있고, 다시 궁금한 지점을 확인할 수도 있다. 미술 전시에 대해서도 글을 쓰는 입장인 만큼 필자도 전시에서 사진 촬영이 우리에게 주는 편리함과 즐거움을 잘 인지하고 있다.

스마트폰 하는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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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필자는 너무 서서히 다가와서 우리는 잘 인지하지 못하지만, 전시가 우리 삶에서 하는 역할이 매우 달라졌다는 사실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스마트폰이 누구에게나 들려있지 않던 시절 전시장은 대개 감상을 위한 공간이었다. 좋게 말하면 작품이 매개하는 심리적 침잠을 위한 공간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나를 당신의 내부에 받아들여달라는 작품의 요구에 우리가 순응하는 공간이었다. 전시장은 기술복제 시대에 갈 곳을 잃은 아우라가 몸을 숨기고 있는 마지막 성전이었다. 그러나 이제 전시는 우리에게 ‘방문하는 것’ 자체가 가장 중요한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많은 전시 관람이 이제 답사의 형태로 변화한 듯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 너무나 간편하게 사진을 촬영함으로써 전시에 등장한 작품의 그 순간을 응고해서 소유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전시장
이미지 출처: Unsplash

전시장에서 감상이 주요 행위가 되는 것과 사진 찍기가 주요한 행위가 되는 것은 매우 다른 일이고, 이러한 변화를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여기서 작품이 관람자에게 짧은 시간 동안 온전히 현현하는 상황과 작품이 하나의 파편이 되어서 시공간을 초월해 관람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상황을 구분해보려고 한다. 전자가 바로 필자가 생각하는 스마트폰 이전의 전시 관람이라면 후자는 스마트폰이 보급된 후 주류가 된 전시 관람이다.


피사체로서의 전시

2022년 가장 많은 관람객이 방문한 ≪어느 수집가의 초대 – 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을 방문한 경험을 떠올려보면 필자는 먼저 수많은 셔터 소리가 들린다. 필자 역시 그 셔터 소리에 일조했다. 말로만 듣던 유명한 작품들을 눈앞에 두고, 작품의 정면과 세세한 표면의 질감을 찍기 위해 인파 속에서 고군분투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필자의, 그리고 거기서 사진을 찍던 많은 사람들의 경험에서 스마트폰이라는 전능한 사진기에 의해 작품과 전시는 사진의 대상이 된다. 관람자는 스마트폰을 가짐으로 더 이상 전시장 안에 갇히지 않는다. 그는 여러 공간에 존재하며 그중에 일부로만 전시장에 존재한다. 작품과 공간이 갖는 즉자적인 의미는 여기서 급격하게 옅어진다. 다만 작품의 외양은 즉시 복제된다. 미술 전시라는 3차원의 공간으로 나아간 작품들은 스스로의 3차원성을 다시 반납하고 시뮬라시옹, 복제가 더 현실 같은 것이 되는 세계의 방대한 늪으로 침투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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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감상은 여기서 시간적으로도 확장된다. 대부분의 관람자가 스마트폰 사진 파일이라는 작품의 시뮬라크르를 창조, 소유함으로 이들은 대게 전시장을 걸어 나간 후에 다시 작품을 감상한다. 여기서 감상은 사후적이다. 동시에 이 감상은 총체적인 경험으로 종합된다. 작품 자체가 감상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과 공간, 그리고 복제 과정에서 생성된 관람자의 시점이 동등하게 감상된다. 이 감상은 작품의 여러 시뮬라크르가 교차하는 지점이다. 작품은 사진 속에 존재하고, 또 관람자의 기억 작용 속에 존재하며, 여전히 전시장 안에 존재한다. 그리고 때로 길에 붙은 전시 광고 등의 다른 사진 이미지에서도 작품의 시뮬라크르가 등장한다. 이 복제 이미지는 마치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방아쇠처럼 우리의 감상을 다시 촉발시킨다. 시뮬라시옹은 관람자의 사후 감상 이후 더 확대된다. 이 사진은 편집되고 왜곡된 후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스마트폰 안으로 확산한다. 이제 작품은 완전히 분열되고 확산된 상태가 된다. 그리고 이것이 때로는 감상이라는 전통적인 전시 관람을 대체, 물리적인 전시 감상보다 더 현실적인 ‘감상들’의 작용을 만들어낸다.

감상모습
이미지 출처: Unsplash

물론 여전히 화이트큐브, 전시장은 다소 ‘성스러운’ 공간이다. 우리는 아직 전시 공간이 우리에게 부가하는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하고는 한다. ‘전시되었다는 것’은 ‘볼 가치가 있다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에 우리는 교양인으로서 전시를 충실하게 관람하고자 하는 욕구를 느낀다. 여전히 사진을 찍기보다는 혹은 사진을 찍으면서도 여러 작품을 꼼꼼하게 관람하고 시간을 들여 관찰하는 관람자들이 많다. 그러나 이제 그 전통적인 감상 욕구 사이를 끼어드는 어떤 순간이 존재한다. 몰입은 때로 셔터 소리에 의해 깨지고, 감탄은 오히려 감상을 멈추고 스마트폰으로 손이 향하게 만든다. 마치 관람자가 이제 창조자가 된 것만 같다. 작품이 주는 감각이 우리를 사진 찍게 만든다. 이는 아마 스마트폰이 우리 삶에 친숙하게 끼어들기 전에는 없던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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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예술과 사회, 그 불가분의 관계를 보고 기록하고 탐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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