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때리는
사람들

이제는 트렌드가 된
멍 때리기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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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첫 번째 탈락자가 발생했습니다. 10번 선수~ 연행하겠습니다.”

흐리고 서늘한 날씨가 이어진 일요일 오후 5시, 잠수교 2023 한강 멍 때리기 대회장. 시작 휘슬이 울린 지 한 시간여 만에 첫 탈락자가 나왔다. “이렇게 탈락자가 안 나오긴 처음”이라며 목 빠지게 첫 탈락자를 기다리던 진행자는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10번 탈락자는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이내 진행요원들에게 양팔이 붙들려 대회장 밖으로 호송됐다. 5월 21일 열려 성황리에 마무리된, 멍 때리기 대회의 한 장면이다.

2023 한강 멍 때리기 대회가 진행되는 모습
2023 한강 멍 때리기 대회가 진행되는 모습. 이미지 출처: 서울시 공식 유튜브 화면 캡처

오늘날 ‘멍 때리기’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초점을 잃은 눈, 벌어진 턱, 움츠러든 어깨와 거북목을 쉽게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멍 때리기가 어디서 유래했고,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 거라 생각한다. 건강을 해치는 위험한 습관에서 출발해, 거대한 트렌드이자 독특한 문화로 자리매김한 ‘멍 때리기’에 대해 알아보자.


불멍·물멍·숲멍…
멍 때리기는 진화 중

멍 때리기의 어원은 아무도 모른다. 국립국어원도 멍 때리기가 ‘멍하다’와 ‘때리다’가 합쳐진 형태라는 것 외 다른 정보는 찾을 수 없다고 밝혔다. ‘멍’이라는 단어 자체도 유래를 유추할 만한 단서가 없다. 다만 조선시대에 ‘막혔다’는 뜻으로 사용된 ‘벙을다’에서 ‘벙’이라는 단어가 유래했고, ‘벙찌다’의 뜻에 ‘멍해지다’라는 뜻이 포함된 점에 비춰봤을 때, 멍이라는 단어 역시 현재는 사어가 된 단어에서 파생됐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유래야 어찌 됐든 ‘멍’이라는 단어는 직관적이어서, 누구나 쉽게 어떤 상태인지 연상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관련 기록에 따르면 멍 때리기는 2010년대 들어서며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신조어’다. 처음 등장할 당시에는 부정적인 현상으로 소개됐다. 자주 멍을 때리면 뇌세포의 노화를 촉진해 우울증과 건망증, 치매 위험성을 높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십수 년이 지난 오늘날, 멍 때리기의 위상은 180도 달라졌다. 뒤에 더 자세하게 설명하겠지만 오히려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는 행위로 밝혀졌다. 멍 때리기는 이후 꾸준히 대중에게 알려지다가, 2016년 ‘한강 멍 때리기 대회’ 기점으로 제대로 각인됐다. 또한 이 즈음부터 멍 때리기는 ‘멍 때리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무언가’와 결합된 형태로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그 시초가 ‘불멍’이다.

감성 불멍 난로
감성 불멍 난로. 이미지 출처: 수비다

원래 불멍은 캠핑족들이 즐겨 사용하던 단어라고 한다. 2016년경 알려지기 시작하며 검색량이 서서히 증가하다가 2020년 4월 폭발했는데, 배우 경수진 씨가 한 TV프로그램에 출연해 불멍난로를 꺼내든 직후였다. 현재 불멍은 관련 인스타그램 해시태그 수가 120만 가량이 될 정도로 멍 때리기 문화의 대표주자가 됐다. 불멍 이후로도 흐르는 물을 멍하니 바라보는 ‘물멍’이나 산속에서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며 멍 때리는 ‘숲멍’ 등이 뒤따랐다. 모래, 구슬, 싱잉볼 등 소재를 달리하며, 멍 때리기는 지금도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단순 ‘현상’에서
모두가 즐기는 ‘문화’로

1) 혼자서 불안하면 다 같이~ 한강 ‘멍 때리기 대회’

멍 때리기는 단순한 현상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문화를 낳고 있다. 대표적인 건 글 서두에서도 언급한, 이제는 모두가 잘 아는 ‘멍 때리기 대회’다. 멍 때리기 대회는 국내 예술가 ‘웁쓰양’이 창시해 2014년부터 이어져 온 참여형 퍼포먼스다. 퍼포먼스를 통해 작가는 ‘과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시간 낭비인가?’라는 질문을 바쁜 현대인들에게 던지고 있다. 도심 한복판에 멍 때리는 집단을 등장시켜, 분주하게 움직이는 도시와의 시각적 대조가 잘 드러나도록 했다는 게 주최 측의 설명이다.

멍 때리기 대회를 설명하는 모습
멍 때리기 대회를 설명하는 모습. 이미지 출처: 서울시 공식 유튜브 화면 캡처

올해로 6회차를 맞는 멍 때리기 대회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지만, 경쟁률이 매우 높아 웬만한 대학 입시 못지 않다고 한다. 잠수교에서 21일 열리는 ‘2023 한강 멍 때리기 대회’는 70팀을 모집하는데 3160팀이 등록해 경쟁률 45 대 1을 기록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특별한 사연이나 직업이 있어야 선발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올해 대회에는 유튜버, 자주포 엔지니어, 이태원 클럽 디제이, 배우, 소방관 등이 참여해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지난 대회에도 말 사육사, 농구공 제작자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참가자들이 눈길을 끌었다. 물론 돈이나 유명세를 노리고 참가를 신청한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참가자들은 “힐링하는 시간으로 좋았다”고 입을 모았다.

2) 실시간 라이브 보면서 멍~ 바쁜 현대인 사로잡은 ‘라멍’

멍 때리기가 시대 상황과 혼합되며 생긴 독특한 문화도 있다. 글로벌 팬데믹으로 전 세계 하늘길이 막히자, 여행을 향한 사람들의 향수를 달래기 위해 주요 랜드마크 등 특정 장소를 실시간으로 송출하는 채널이 탄생했다.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 일본 도쿄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 이탈리아 베네치아 등 주요 도시에는 관광객 대신 라이브 송출 카메라가 들어섰다. 우리나라에도 한강, 해수욕장 등을 비추는 라이브 영상이 생겼고, 많은 외국인들이 접속해 다음 한국 여행을 기약했다고 한다. 재택근무 등 반강제로 ‘집콕’을 해야 했던 사람들은 TV나 태블릿PC에 라이브를 틀어놓고 대리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라이브 영상 아래 실시간 채팅창에서 해외여행을 가면 무엇을 할지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위로했다.

뉴욕 타임스퀘어, 노르웨이 마을, 한강 반포대교 전경
뉴욕 타임스퀘어, 노르웨이 마을, 한강 반포대교 전경. 이미지 출처: 유튜브 화면 캡처

당시에는 한동안 유행하고 말 트렌드로 여겨졌지만, 현재 엔데믹을 앞둔 상황에서도 이러한 영상들의 인기는 식지 않고 있다. 라이브 영상을 바라보면서 멍 때리고 힐링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당장 한강 반포대교를 비추는 라이브 영상들만 봐도 매시간 최소 500명가량 동시 시청자들이 상주하고 있다. 여의도 불꽃축제나 여름 폭우 같은 이벤트가 있으면 수천 명으로 늘어난다고 하며, 드라마 ‘더 글로리’ 손명오 역을 맡은 배우 김건우 씨가 지난해 한 TV프로그램에서 한강 라이브 영상을 즐겨본다고 밝히자 1만 명대로 치솟았다고 한다.

댓글 창에는 시청자들이 영상을 찾는 이유를 엿볼 수 있었다. 대부분 “일이나 공부가 손에 안 잡힐 때 멍 때리면서 휴식하려는 목적으로 영상을 틀어둔다”고 말했다. 화질 기술이 좋아지며 창문과 거의 구별할 수 없다고 표현하는 이도 있었다. 이 밖에도 ‘한강뷰가 보이는 곳에 살겠다’는 동기부여를 얻기 위해, 미세먼지 농도와 같은 날씨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사람들과 대화하기 위해서 등 갖가지 이유로 접속했다. 멍 때리기에 이런 다양한 기능이 합쳐지면서 독특한 문화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3) 광고에 전시회까지…멍 때리기 돕는 영상들

똑같은 장소만 보여주는 영상이 지루하다면,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는 영상(Satisfying Video)을 보면서 멍 때리는 건 어떨까. 이런 영상들은 더럽거나 어지러운 상태가 규칙적이고 일관성 있게 정렬된 상태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편안함을 선사한다. 밀대로 바닥의 거품과 물기를 깔끔하게 밀어내거나, 연필 수천 자루를 가지런히 쌓는 모습 등이다. 이런 영상들은 특히 해외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으며, 짧은 영상들을 엮어서 올리는 전문 채널들이 있을 정도다. 멍 때리면서 뇌를 쉬게 하다가 스르륵 잠들 수 있다는 게 운영자들의 설명이다.

동영상 출처: simmons korea 공식 유튜브

멍 때리기를 돕는 영상이 광고로 사용되며 대히트를 치기도 했다. 수면 전문 브랜드 ‘시몬스’는 지난해 브랜드 캠페인 ‘오들리 새티스 파잉 비디오를 선보였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진다는 영상인데, 정말 물소리와 바람 소리를 들으며 영상을 보고 있다 보면 정말 왠지 모를 편안함이 전달된다는 반응이 잇따랐다. 광고 영상이 게시된 지 일 년이 조금 넘었는데, 현재 조회 수는 2000만이 넘어가고 있다. 시몬스는 지난해 2월 경기 이천의 복합문화공간에서 이러한 비디오를 활용해 전시를 열기도 했다.

단순한 현상으로 출발한 멍 때리기는 하나의 문화로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대체 왜 이렇게 멍 때리기에 열광하는 걸까. 이러한 변화는 현대인들의 정신건강에 좋은 영향을 줄까. 전문가들의 설명을 들어보자.


‘독’ 누명 벗은 멍 때리기…
‘약’이 될까

전문가들은 현대인들이 멍 때리기에 열광하는 이유가 ‘정보 홍수와 치열한 경쟁으로 누적된 정신적 피로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멍 때리기와는 결이 다르지만 ‘마음 챙김 명상(Mindfulness Meditation)’이 미국 실리콘밸리 젊은 개발자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것과 비슷하게, 멍 때리기를 통해 잠시나마 바쁜 일상으로부터 단절·해방되고픈 수요가 많다는 것이다. 디지털 디톡스, 싱잉볼 테라피를 즐기는 수요가 꾸준하고,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멍 때리기 좋은 곳’으로 소개한 명소들에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현상 역시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한다.

이미지 출처: Pixabay

실제로 멍 때리기가 정신건강과 심신 안정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뇌과학자들에 따르면 멍 때리기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불어넣고, 긍정적인 감정을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과학자들은 뇌 혈류를 측정하는 연구를 통해 활동마다 뇌의 다른 부위가 활성화된다는 점을 밝혀냈다. 일을 하거나 남들과 소통할 때 활성화되는 부위를 ‘관리 네트워크(Executive Mode Network)’라고 부르고, 멍 때리기를 할 때 활성화되는 부위를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라고 부른다. 오랜 시간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는 뇌가 어떤 활동도 하지 않는, 쉬는 단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뇌에 관한 새로운 연구들이 거듭되며 이러한 부위가 과거 기억을 되살리거나, 미래 계획을 세울 때 활성화되는 부위와 같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에서 풍성한 아이디어를 떠올리면, 관리 네트워크에서 논리적으로 연결해 완결성 있는 생각으로 만들어내는 등 긴밀하게 협동한다는 분석도 나왔다.

동영상 출처: TED-Ed 공식 유튜브

한때 정신건강을 해치는 ‘독’이라는 누명을 썼던 멍 때리기는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를 풀어주며 다음 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해주는 ‘약’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멍 때리기의 효능을 경험한 이들은 남들에게도 멍 때리기를 적극 권하는 전도사가 되어 새로운 인식을 불어넣고 있다. 우리의 뇌는 사용하지 않을수록 쇠퇴하는 무언가가 아닌, 더욱 창조적인 생각을 꽃피울 수 있는 요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학창 시절 멍 때리는 친구가 있으면 몰래 다가가 손가락을 튕겨 깨워주곤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는 무아지경으로 멍 때리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일상 속으로 들어온 이후로는 멍 때리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어난 직후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작은 화면을 들여다보면서 정신없이 정보를 빨아들이다가 잠에 든다. 충분한 휴식 없이 질주하다가 ‘번아웃’이 오고 후회할 선택들을 내리고 만다. 멍 때리기, 명상, 마음 챙김. 형태가 어떻든 이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건, 잠시나마 우리의 뇌를 쉬게 해주고 지친 마음을 달래주는 일이다. 어느덧 한 해의 절반을 향해 달려가는 현재, 잠시 바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멍 때리기를 즐겨보는 건 어떨까.

  • 충청일보, 말의 뿌리를 알면 무척 아름다운 우리말(2022-01-19)
  • 동아일보, 한강 실시간 영상 보며 멍~…불멍·물멍 이어 ‘라멍’(2023-05-18)
  • 헬스조선, ‘멍 때리기’자주 하다간 치매, 우울증 위험↑(2010-04-08)
  • 디자인DB, 멍 때리기로 마음을 힐링하는 사람들(2023-03-09)
  • TED, The benefits of daydreaming(2022-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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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우주

흑백의 세상에서 회색지대를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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