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눈을 감고 ‘예술가’를 떠올려 봅시다. 어떤 얼굴이 보이나요? 예술사에 빼놓을 수 없는 유명한 얼굴, 혹은 최근 관심을 갖고 지켜본 작가인가요? 저마다 다른 상상을 펼칠 것 같지만, 사실 우리는 비슷한 얼굴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바로 사람 얼굴을 떠올린다는 점에서 말이에요. 그런데 과연 사람만이 예술에 참여하고 작품을 만드는 주체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도 모르게 지닌 고정관념에 정면으로 돌파한 작가, 아키 이노마타를 소개합니다.
누구의 작품인가
지난겨울, 도쿄의 모리 미술관에서 이 작품을 만났습니다. 투박하지만 나무의 결이 느껴지는 작품이 마음에 들어 한동안 그 앞에 머물렀습니다. 이 작품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숙련된 조각가가 고심을 거듭해 나무를 고르고 정교히 조각한 결과일까요? 놀랍게도 이 작품의 주인공은 비버입니다. 유유자적 평화롭게 살아가는 자연의 동물 비버가 어떻게 조각을 만들었을까요?
이 작품은 일본의 예술가 아키 이노마타(Aki Inomata)의 아이디어로 탄생했습니다. 이노마타는 우연히 비버가 갉아 만든 나뭇조각을 보고 예술 작품과 같은 모습에 놀라움을 느꼈습니다. 작가는 비버도 사람처럼 예술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질문을 안고 도쿄의 동물원 다섯 곳에 방문합니다. 비버 서식지에 나무토막을 두고 오면 밤새 비버들이 나무를 자유롭게 갉고 씹어 조각을 만드는 것이죠.
비버가 만든 조각은 사람과 로봇에게 전달됩니다. 사람인 조각가와 로봇 CNC(컴퓨터 수치제어 기계)가 비버의 작품을 3배 규모로 확대해 재현합니다. 이 과정에서 이노마타는 사람과 비버, 로봇 간의 흥미로운 차이를 발견합니다. 로봇은 설정된 경로에 따라 규칙적으로 조각을 만들지만, 비버와 사람은 그렇지 않은 것이죠. 로봇과 달리 비버와 사람에게는 더 강조하고 싶은 부분, 제외하고 싶은 부분 등을 결정할 수 있는 의지와 선택권이 있습니다. 이점에서 동물과 사람은 서로 다르면서도 비슷합니다.
작업 과정에서 또 다른 참여자가 등장해 놀라움을 주기도 합니다. 나뭇조각이라는 자연물을 확대해 만드는 과정에서, 딱정벌레가 등장해 나무를 파고들어 그만의 문양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작품을 통해 이노마타는 사람에서 나아가 동물 또한 예술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생명체가 함께 호흡하며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도시에서 꿈꾼 자연
이노마타는 자연과 생명에 주목해 작업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작가가 이러한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엔 나고 자란 도시의 영향이 있었습니다. 이노마타는 일본의 중심인 도쿄에서 살면서 삭막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도시에서 보기 어려운 정반대의 것인 자연에 관심을 갖고 탐구하게 됩니다. 자연을 표현하는 다양한 갈래의 길 중 이노마타가 택한 건 예술과 기술의 접목이었습니다. 예술 학교에서 디지털 미디어에 집중해 공부한 3D 프린팅, 컴퓨터 프로그램을 적극 활용하게 됩니다.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혼자가 아닌 함께하는 작업이라는 점입니다. 공예가, 조각가와 같은 타 장르 예술가를 비롯해 다양한 동식물, 컴퓨터처럼 여러 존재와의 협업으로 작품이 완성됩니다.
이러한 이노마타의 관심사와 작업 방식은 소라게와 함께한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3D 프린팅 기술을 이용해 소라게를 위한 쉼터이자 집, 껍데기를 만든 작품입니다. 이노마타는 도시나 자연, 고대 유적지 등 세계 곳곳의 공간을 모델로 게를 위한 껍질을 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게들이 껍질에 들어가길 거부했습니다. 그들에게 맞지 않는 모양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본 이노마타는 자연을 찾아 소라게를 자세히 관찰하고 수정을 거듭했고, 마침내 그들이 좋아할 만한 새로운 껍데기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바닷가를 찾았을 때나 볼 수 있었던, 멀게만 느껴지는 게가 작품의 일부가 된 것이죠.
사람과 자연
이노마타의 작품 앞에선 무수한 물음표가 떠오릅니다. 앞서 살펴본 작품들을 만든 주인은 누구일까요? 비버나 게도 예술을 만드는 주체가 될 수 있는 걸까요? 이 질문은 예술의 정의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작품에 담긴 예술적 의도, 예술가의 창의성이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일지 고민해 보게 됩니다.
단박에 질문을 찾기 어려운 질문 속에 이노마타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사람만이 예술의 주체는 아니라는 것, 그리고 사람만이 이 세상의 많은 것을 결정하고 선택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예술이라는 주제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상호작용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WEBSITE : 아키 이노마타
INSTAGRAM : @akiinomata
“세상은 사람과 그들의 결정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방식을 찾고 있습니다.”
_아키 이노마타
이노마타가 남긴 말은 예술을 경험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무엇이 예술인지, 누가 예술가가 될 수 있는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답을 찾긴 어려울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만이 주인공이라는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게 해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작업임은 틀림없습니다. 다양한 존재와 함께 한 이노마타의 작품, 그 앞에서 자기만의 답을 찾아보길 권합니다.
- Artist Aki Inomata Collaborates With Hermit Crabs and Beavers, (2023.02.13),
https://www.tokyoweekender.com/art_and_cul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