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우리 사회에 중요한 화두는 ‘지속 가능한 삶’이다. 지속성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과 적극적인 실천보다는 지속 가능성을 슬로건 삼는 것만으로 위안 삼고 있던 현대인들은 무너진 생태계의 균형에 대응하기 위해 뒤늦게 노력 중이다. 이처럼 기후 및 생태 위기에 직면한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생태적 삶’으로의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때가 온 것이다. 본 아티클은 전환을 위한 첫걸음으로 인간만으로 구성된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음을 인정하고 그간 배제되어 온 존재의 복권으로 시작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삶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다양한 존재가 이루는 삶의 관계망
자연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분리되어 있다고 여기는 근대주의적 사고관은 비인간 존재를 인간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실체로 취급했다. 인간만이 이성과 자유 의지가 있고 언어를 사용하는 능동적 ‘주체’로 본 반면, 비인간은 순수한 물질로서 인과적 결정 법칙을 따르는 수동적 ‘객체’로 본 것이다. 브뤼노 라투르가 주지했듯이 인간만으로 구성된 사회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기에 우리는 실제로 존재하는 인간과 비인간의 결합, 즉 이질적인 연결망을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 중심적 이원론에서 벗어나 다양한 존재가 삶의 관계망을 이루고 있음을 받아들이고 이를 보존하려는 노력으로부터 모두의 지속 가능한 삶이 가능해질 수 있다. 다양한 존재와 관계 맺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예술가들의 작업을 통해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으로 멀어진 인간과 비인간 존재의 관계를 들여다보자.
1) 인간과 비인간 존재의 우정을 통한 새로운 관계 맺기
흑표범(b.1980) 작가의 “Becoming Birds”는 다양한 감각 경험을 통해 비인간과 관계 맺고 있는 홍이현숙(b.1958) 작가와 협업한 작품으로 기후 위기 속 생태를 또 다른 소수자 주체로서 바라보고, 다른 존재가 되어가는 서로의 퍼포먼스를 사진과 워크숍의 형태로 관람객에게 공유한다. 흑표범 작가는 기후 위기로 터전을 잃고 본래의 서식지가 아닌 곳에서 출몰하는 새를 작가가 그간 작업에서 등장 시켜온 고스트적 존재로 바라본다. 소수자와 생태를 연결 지어 사유해 보는 작가의 태도는 인간과 자연의 새로운 관계 맺기 방식을 위한 수행으로써 비인간이 되어보는 퍼포먼스로 이어진다. 이러한 ‘비커밍의 과정’은 단순히 비인간을 모방하고 동일화해 보는 과정이 아닌 다양한 존재들과 동맹을 맺고 공생하기 위한, 말하자면 우정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관계 맺기의 시도로 볼 수 있다.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에서 2022년도에 선보인 노혜리(b.1987) 작가의 개인전 《진희》는 전시장에 발을 내딛는 순간 그간 우리가 시각예술 전시를 보며 경험한 감각에서 벗어나게 한다. 인간의 몸과 사물이 만나는 방식을 실험해 온 작가는 유기 삽살개 ‘지니’를 키우게 되며 프로젝트 ‘진희’를 시작했다고 한다. 작가는 가상 인물 진희를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자 다양한 작용과 관계를 형성하는 주체로 설정하여 진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전시장에 펼친다. 진희가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이해하고 있는지, 진희의 몸을 기준으로 전시 공간을 구성하여 관람객에게 새로운 신체적 경험을 하게 하며, 우리가 어떤 시선과 잣대로 세계와 관계 맺고 있었는지 사유하게 한다.
2) 대안적 상상으로 위계질서 허물기
제14회 광주비엔날레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2023) 호랑가시나무 아트폴리곤에서 선보인 정재철(b.1959-2020) 작가의 작업은 작가가 전 세계를 누비면서 만난 인간과 비인간 사물 간 네트워크를 추적한 수행의 기록물이다. 작가는 해양 쓰레기를 인류에게 간섭하고 사건을 촉진하는 행위자로 바라보며, 드러나지 않는 삶의 파편들을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해양 쓰레기가 바다를 표류하는 여정을 담은 작품들은 작가가 오간 도시와 국가에 대한 인상과 정서가 깃들며, 인간과 비인간 존재 간의 연결망의 기록으로 기능하게 된다. 이처럼 인간과 비인간의 질서를 허무는 작가의 작업은 재활용되고 순환되는 사물들과 인간 간의 관계를 고찰하게 한다.
정혜정(b.1986) 작가가 대안공간 루프에서 선보인 《멍게와 나》(2022)는 인간만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오만에서 벗어나 동식물, 무생물, 자연, 기술 등의 비인간과 관계 맺기를 시도한다. 작가는 멍게를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의 대안이자 인간의 관점과 경계를 허무는 존재로 바라본다. 멍게가 동물과 식물을 선택할 수 있고 성별이 존재하지 않으며, 유성생식과 무성생식이 가능하다는 점에 주목한 작가는 멍게를 통해 인간이 만든 사유체계에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윤리를 찾는 실험을 이어간다. “단순히 교훈이나 계몽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다종의 존재와 깊숙하게 얽혀있다”고 말한 작가의 인터뷰처럼 이미 연결되어 있는 다종의 관계망을 들여다보는 것에서부터 내일을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오늘도 인간의 편의와 욕망에 의해 고통받거나 외면받는 존재들을 생각하면 예술이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지, 그리고 글이 무슨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 고민에 잠긴다.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을 위한 보다 적극적인 실천이 필요하다고 노래하면서도 행동으로 옮기기 어려운 현실에 깊은 무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도 예술이 우리의 사유 체계를 느리지만 확실하게 바꿀 수 있을 거라는 일말의 희망에 기대어 보며, 앞서 소개한 예술가들의 작업을 통해 다양한 존재들과 함께 지구의 주인공이 되어 공생하는 세상을 꿈꾸어 본다.
- 김환석 외 21인, 『21세기 사상의 최전선 – 전 지구적 공존을 위한 사유의 대전환』(이성과 감성, 2020)
- 하승우,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의 삶과 생태사회주의」, 『문화과학 Vol.-No.103』(문화과학사, 2020)
- [뉴펭의 지구인’터뷰⑦] ‘멍게와 나’ 경계를 허무는 작가, 정혜정(2022.12.11)
-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노혜리 작가의 개인전 《진희》(2022-2023) 서문(2023.07.23 접속)
- 대안공간 루프 정혜정 작가의 개인전 《멍게와 나》(2022) 서문 (2023.07.23 접속)
- 제14회 광주비엔날레 홈페이지 참여작가 정재철 소개페이지(2023.07.23 접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