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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불온한 초상
세기말 동아시아 영화 3선

아름다움으로 승화된
세기말이라는 시대의 불온한 표정
Edited by

90년대, 그리고 세기말. 필자는 이 단어를 말하는 순간 화려한 네온사인이 수놓은 퇴폐적인 밤거리와 어두컴컴한 뒷골목이 떠오릅니다. 경험해 보지 못한 나날과 가보지 못한 뒷골목에 향수를 느끼는 건 왜일까요.

이번 아티클에서는 세기말의 정서를 감각할 수 있는 영화 세 편을 소개하려 합니다. 음울하고 불온하지만, 그 어떤 시기보다 매력적일 수 있었던 세기말의 편린을 이렇게나마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왕가위, <타락천사>

영화 <타락천사>
이미지 출처: Janus Film

<타락천사>는 원래 <중경삼림>의 마지막 에피소드로 기획되었습니다. <중경삼림>의 러닝타임이 의도된 것보다 길어지는 바람에 <타락천사>가 탄생할 수 있었죠. 영화는 청부 살인을 하는 킬러와 그의 파트너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문 닫은 가게를 전전하며 장사를 하는 한 청년의 이야기를 교차시켜 보여줍니다.

영화 <타락천사>
이미지 출처: IMDB

왕가위 감독은 1996년 1월 KINO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타락천사>가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영화임을 밝힌 적 있습니다. 영화 속 인물들은 직접 만나 대화하며 관계를 쌓기 보다, 팩스나 전화 등의 기계를 통해 간접적으로 소통하죠. 왕가위 감독은 ‘그것들은 서로의 마음까지 전하지는 못한다’고 말합니다.

영화 <타락천사>
이미지 출처: IMDB

이 영화가 커뮤니케이션의 실패와 비참한 최후를 맞기도 하는 인물들의 엇갈림으로만 점철된 것은 아닙니다. 사랑은 찾았으나 소통에 실패한 이들(이가흔, 금성무)이 만나,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이 시작되니까요. 이제껏 엇갈리기만 했던 여성과 남성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터널을 질주합니다. 여성은 ‘이 길은 집까지 그리 멀지 않으며, 곧 내려야 한다는 것도 알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매우 따뜻하다’고 말하죠. 영화 내내 미끄러지고 실패한 이들이 만나는 것이었기에, 찰나의 따스함은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츠카모토 신야, <총알발레>

영화 <총알발레>
이미지 출처: Kaijyu Theater

<총알발레>는 인간과 기계의 결합을 그린 파격적인 작품, <철남> 시리즈를 제작한 츠카모토 신야 감독의 작품입니다. 광고 회사에서 일하는 남자는 어느 날, 애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던 그는 뒷골목에서 불량배들과 맞닥뜨리게 되고, 자신을 괴롭힌 그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권총에 광적으로 집착하게 되죠.

영화 <총알발레>
이미지 출처: Kaijyu Theater

촬영부터 편집까지 대부분의 작업을 혼자, 또는 적은 인력으로 해내는 집요한 인디 정신으로 잘 알려진 츠카모토 신야는 이 작품에서 죽음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장면을 많이 보여줍니다. 감독은 이에 대해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거나, 아예 잊고 사는 것 같다’는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죠. 애무하듯 쇳덩이를 만지작거리며 총에 집착하는 남자와 죽음에 가까워지려고 하는 여자의 모습을 통해 삶의 소중함을 보여줍니다.

영화 <총알발레>
이미지 출처: IMDB

<총알발레>는 미치도록 찬란한 생의 모습을 실험적인 카메라 워크와 음악으로 그려낸 영화입니다. 상당한 스타일이 돋보이는 영화 속 연출은 어떤 특수 장비 없이 쇼핑 카트와 카메라 흔들기로 냈다고 해요. 세기말, 회색빛 도쿄의 모습과 소외되고 상처받은 인간들의 정서를 잘 드러낸 작품입니다.


허우 샤오시엔, <밀레니엄 맘보>

영화 <밀레니엄 맘보>
이미지 출처: 화인커뮤니케이션

밀레니엄이 시작되고 꼭 1년이 지난 2001년에 개봉한 <밀레니엄 맘보>는 호스티스로 일하는 주인공을 그립니다. 그는 DJ를 꿈꾸는 남자친구와 함께 살지만, 그는 일은 하지 않고 호스티스로 일하는 주인공의 외도를 의심하기만 하죠.

영화 <밀레니엄 맘보>
이미지 출처: IMDB

주인공의 상황이 극에 치달을 때, 영화는 돌연 타이페이의 클럽에서 눈 덮인 훗카이도의 유바리시로 이동합니다. 남자친구를 떠난 주인공은 국제영화제가 열린다는 그곳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죠. 하지만 그가 타이페이로 돌아왔을 때, 바뀐 것 없는 집요하고 우울한 날이 다시 펼쳐집니다.

영화 <밀레니엄 맘보>
이미지 출처: IMDB

<밀레니엄 맘보>는 2011년의 주인공이 10년 전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구축된 영화입니다.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서 밀레니엄의 시작이라는 현재를 말하는 영화의 설정, 저채도의 타이페이와 눈 덮인 유바리의 대비는 선형적이지 않은 당대 사람들의 불안과 욕망, 그리고 기억의 속성을 콕 짚는 듯합니다.


커뮤니케이션의 부재와 그로 인한 소외, 성공을 부르짖는 욕망과 소비의 사회. 가본 적도 경험해 본 적도 없는 이들도 향수를 느끼는 시기. 형체 없는 세기말이라는 단어와 그 감성을 우리는 현실의 많은 순간에 마주하곤 합니다.

위에서 소개한 세 편의 영화는 살을 애는 듯 아픈 동시에 찬란합니다. 단단한 모래 알갱이가 뜨거운 불에 녹아 빛나는 유리가 되듯, 어쩌면 상처받은 이들만이 진정으로 빛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소개를 마칩니다.


박종일

박종일

차이를 없애버리려는 시도에 반해,
무엇과도 구별되는 세계를 찾아 제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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