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괜찮아
이규비의 작품 세계

모두에게 위로를 전하는
아름다운 유리 공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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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몇 초 만에 AI가 반 고흐풍 여의도 한강 공원을 그리는 시대에도 누군가는 자신의 숨을 불어 넣은 작품을 만듭니다. 기술을 닦고 고민을 모아 공예품을 만드는 오늘날의 작가들입니다. 이규비 작가는 거대한 토치 앞에서 유리를 녹이고 늘리고 자르고 붙이면서 진심을 담습니다.

장마가 한창이었던 7월의 어느 토요일, 한국예술종합학교 송추공방동에 있는 그녀의 작업실을 찾았습니다. 여리고 투명한 작품 이미지와 대척점에 있는 거칠고 투박한 공간, 크고 단단한 기계 사이로 풍기는 퀴퀴한 냄새, 아무리 살펴도 공방보다 공장이란 이름이 더 잘 어울리는 인상이었어요. 하지만 분명한 건 글로벌 대량생산 제품으로 그득한 다이소에선 느낄 수 없는 생동한 기운이 공간을 메우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이규비 작가를 만났습니다.

인터뷰어 강성엽
인터뷰이 이규비 작가
포토그래퍼 심윤섭(@_simyunseob)
어시스턴트 황천영(@cjsdudd)


작업하는 이규비 작가

안녕하세요, 우리 뻔하지만 자기소개로 시작해 볼까요.

안녕하세요(웃음), 즐겁게 유리 작업하는 이규비입니다. 작업을 10년 정도 쉬다가 최근에 다시 시작했어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겼거든요. 한예종 레지던시 작가로 활동하다가 지금은 조교로 있으면서 이곳을 작업실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생겼다고요? 어떤 이야기인지 궁금해요.

사실 이전에는 인간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어요. 지난 10년 동안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인간에 대해 고찰하게 됐습니다. 사람들은 다수의 선택과 관념을 잣대로 삼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개인은 성향도 행동도 모두 달라요. 그런데도 일반적이지 않다면 틀렸거나 이상하다고 낙인찍어 버리죠. 그게 사람을 위축시키고 모든 게 잘못된 것처럼 만들어요. 이해심이 부족해 보였어요. 세상에는 남들과 다르게 천천히 가거나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들에게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그렇게 ‘그래도 괜찮아’란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망설임과 두려움 앞에 서 있는 우리에게 전하는 위로와 응원의 말이에요.


“세상은 희망과 따뜻함이
전부인 것 같아요.”

서울의 평범한 원룸 크기쯤 되는 대형 가마, 부피가 큰 작품을 제작할 때 사용한다.
서울의 평범한 원룸 크기쯤 되는 대형 가마, 부피가 큰 작품을 제작할 때 사용한다.
날카로운 유리 단면을 사포에 갈 듯 다듬을 때 사용하는 기계, LP플레이어처럼 생겼다.
날카로운 유리 단면을 사포에 갈 듯 다듬을 때 사용하는 기계, LP플레이어처럼 생겼다.

맞아요. 다른 길을 걷는 사람은 주변의 시선과 스스로 피어나는 의심을 끊임없이 부수어 나가야 해요. 당연함을 증명하는 지난한 과정입니다. 이러한 메시지를 행동으로 옮겨 말하기까지도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아요.

거창하게 메시지를 전한다고 말은 하지만, 첫째로는 나를 위한 작업이에요. 저는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이 행복해요. 10년 동안 유리 작업을 쉬었지만, 다른 걸 꾸준히 만들었습니다. 레진같이 집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재료로 작업하거나 유아복을 제작하기도 했죠. 만드는 행위 자체가 즐거워서 작가를 하는 것 같아요. ‘그래도 괜찮아’는 스스로 가장 많이 하는 말이기도 해요. 실제로 작품을 만들면서도 주문처럼 되뇌는 문장입니다. 이걸 받는 사람도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을 담는 거죠. 세상은 희망과 따뜻함이 전부인 것 같아요. 이게 제 작업의 동력입니다.

아름답게만 보이는 작품에 위로란 키워드가 있어서 의외였어요. 이야기를 듣고 작품을 보니 다르게 보입니다.

작업 이름이자 전시명이었던 “그래도 괜찮아”가 흔하기도 하고 너무 직접적인 단어라서 별로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어요. 그래도 그럴싸한 단어보다 직관적인 문장이 좋았어요.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반응하는 말이죠.


“작업은 작가에게 평생 해야 하는
과업이에요… 그래서 과정이 즐거운
유리가 좋았습니다.”

토치의 불꽃으로 유리를 녹여 모양을 만드는 모습.
토치의 불꽃으로 유리를 녹여 모양을 만드는 모습.

유리의 매력은 뭔가요?

처음 공예를 시작했을 땐, 창가에 놓인 유리의 아른아른한 그림자가 아름다워서 유리를 선택했어요. 금속, 나무, 섬유 등 여러 가지 소재를 다뤄봤지만 역시나 유리가 작업 과정이 제일 재미있었어요. 작가가 만든 결과물이 의도와 적합할 때 소재까지도 딱 맞아떨어진다면 좋겠지만, 작업은 작가에게 평생 해야 하는 과업이에요. 그렇기에 고되고 인내가 필요한 작업이 행복하지 않다면 아무리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더라도 괴로워요. 그래서 과정이 즐거운 유리가 좋았습니다. 또 유리는 빛과 함께 일 때, 그 매력이 극대화돼요. 빛은 희망과 따뜻함을 이야기하기에도 적절하죠.

‘램프워킹’이란 기법으로 작업한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과정이 그렇게 재밌나요?

램프워킹은 직접적으로 불을 다뤄요. 가느다란 유리 막대를 불꽃 안에 넣으면 녹으면서 낭창낭창하게 흔들리는데, 그 느낌이 재밌어요. 무엇보다 안전에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는 점이 매력적입니다. 산소와 가스가 연결된 토치는 강한 불꽃을 내뿜고, 그 온도가 1,200~1,300도 가까이 돼요. 잠시라도 딴생각하거나 집중하지 않으면 크게 다칠 수 있어서 완전히 작업에만 몰입해야 하는 상황이 큰 쾌감을 줍니다.


“평범한 하루를 지나온 오늘도 축하할 일이죠…
제가 만든 케이크는 그런 우리의 매일을
축하하는 작품이에요.”

유리 용해로를 구경시켜 주겠다며 이규비 작가가 문을 열어줬지만, 너무 뜨겁고 눈부셔서 사실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유리 용해로를 구경시켜 주겠다며 이규비 작가가 문을 열어줬지만, 너무 뜨겁고 눈부셔서 사실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입으로 불어 만드는 블로잉 기법을 설명하는 판서.
입으로 불어 만드는 블로잉 기법을 설명하는 판서.

작품으로 표현한 대상들이 케이크, 꽃, 눈 결정같이 일시적인 것들이에요. 아름답고 반짝이지만 영원하지 않은 것들이죠. 그래서 동시에 처연한 느낌도 듭니다. 유리란 소재도 비슷하게 느껴져요. 반짝거리지만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아 불안하죠.

‘인생사 새옹지마’란 말을 좋아해요. 영원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행운에 자만하지도 말고, 불행에 포기해서도 안돼요. 한 발짝 멀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매사에 감사하고 노력할 뿐이죠. 제가 다루는 대상들은 형태로는 일시적이지만, 내적으로는 오랫동안 함께 한다고 생각해요. 기념하거나 축하할 날에 꽃을 선물하고 초를 불지만, 우리 인생은 매번 그런 날만 있진 않잖아요. 평범한 하루를 지나온 오늘도 축하할 일이죠. 슬프거나 불행했던 오늘도 언젠가는 좋은 소식이 되어 돌아올 거예요. 제가 만든 케이크는 그런 우리의 매일을 축하하는 작품이에요.

지금부턴 공통 질문입니다. 작가님이 요즘 주목하는 독창적인 작가나 브랜드가 있나요?

동료 작가, 가르침을 주신 선생님, 작가를 꿈꾸는 어린 학생 그리고 인연을 맺고 있는 주위 모든 사람을 주목합니다. 세상에는 너무나도 멋진 작가와 브랜드가 많지만, 저에게 큰 영감을 주진 않아요. 대신 저와 부대끼는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에 초점을 맞춥니다. 시각적인 형태보다 말의 온도와 말에서 슬쩍 비치는 마음에서 영감을 얻습니다.

유리를 자르는 절단기,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사방팔방 물이 튄다. 유리를 다루는 과정은 생각보다 터프하다.
유리를 자르는 절단기,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사방팔방 물이 튄다. 유리를 다루는 과정은 생각보다 터프하다.

정형화된 길이 아닌 남들과 다른 것을 찾아 나갈 때 두려움을 느끼진 않나요? 만약 그렇다면, 그 감정에 어떻게 대처하는 편인가요?

사실 제가 마음이 약해서 매일 두렵고 많이 울기도 해요. 그래서 모든 사람과 잘 지내려고 애쓰지 않아요. 가까운 몇몇 사람과 관계를 맺고 나머지 시간엔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요. 두려울 땐 자기 할 일을 놓지 않고, 어떻게든 해 나가는 게 중요합니다. 나와 마주하면서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잘 가고 있는지 점검해요.

작가님의 작업은 자신과의 대화가 정말 중요하네요.

맞아요. 세상에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거나 종교에 의지하려는 사람도 있지만, 나를 제일 잘 알고 나를 가장 잘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탁월함과 고유한 개성, 둘 중 독창성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요?

탁월함. 더 자세하게는 탁월함을 발판으로 하는 노력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노력은 절대 배신하지 않아요.


“두려울 땐 자기 할 일을 놓지 않고,
어떻게든 해 나가는 게 중요합니다.”

빨갛게 달아오른 유리를 자르고 늘이는 과정. 중심을 맞추기 위해 한 손으로는 쉴 새 없이 유리를 잡고 돌려야 한다.
빨갛게 달아오른 유리를 자르고 늘이는 과정. 중심을 맞추기 위해 한 손으로는 쉴 새 없이 유리를 잡고 돌려야 한다.
빨갛게 달아오른 유리를 자르고 늘이는 과정. 중심을 맞추기 위해 한 손으로는 쉴 새 없이 유리를 잡고 돌려야 한다.
빨갛게 달아오른 유리를 자르고 늘이는 과정. 중심을 맞추기 위해 한 손으로는 쉴 새 없이 유리를 잡고 돌려야 한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앞으로는 어떤 작업을 하고 싶나요?

좌대에 올려 두고 감상하는 작품이 아닌 일상 속에서 사랑받는 물건을 만들고 싶어요. 구체적으로는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에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에요. 그 어떤 시간보다 소중한 순간을 함께 보내는 거죠. 제 작품이 좋을 수도, 외로울 수도 있는 가장 프라이빗한 시간 옆을 지켜 주길 바랍니다. “그래도 괜찮아”하고요.

Candle holder_Candy#18

유리 작업은 고열에서 빠르게 진행되지만, 식히는 과정이 절대적으로 중요해요. 천천히 온도를 내려야만 유리가 깨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리는 ‘서랭’에 무엇보다 신중해야 하죠. 몰드에 유리를 넣어서 녹여 만드는 캐스팅 기법은 모양과 크기에 따라 식히는 기간이 최소 3일부터 길게는 1~3개월까지 걸린다고 합니다. 이규비 작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도 결국 ‘식히는’ 시간의 중요성이에요. 바쁘고 치열한 일상을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공들이고 집중해야 하는 건 스스로를 깨트리지 않게 자신을 찬찬히 살피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이야말로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강성엽

강성엽

아직은 한창이란 생각으로 경험에 망설임이 없습니다.
성패와 상관없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글과 사진으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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