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이란 감성의 유행으로 근래의 어느 때보다 자유로운 개성을 누리고 있는 요즘입니다. 조금 촌스럽고 과한 것마저도 매력이 되어 그 사람을 돋보이게 하죠. 특히 2000년대를 향한 향수가 식을 줄 모르고 짙어지고 있습니다. 패션, 미디어, 케이팝 시장은 물론 각종 문화 트렌드를 관통 중인 ‘그’ 시절 감성을 한 명의 가수를 통해 돌아보고자 합니다. 대한민국이 새천년을 맞이한 순간, 기록적인 파격을 남겼던 아티스트, 이정현입니다.
세기의 마지막을 장식한
‘와’, ‘바꿔’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가던 구간은 가장 혼란하고 과열된 시기였습니다. 연도의 앞자리가 달라지면 컴퓨터가 이를 인식하지 못해 적금 계좌가 소멸되고 핵폭탄이 터질 수도 있다는 종말설(Y2K, 밀레니엄 버그)이 진지하게 다뤄졌죠. PC통신의 보급으로 디지털이란 개념이 보편화됨과 동시에 각종 비과학적 괴담이 혼재하던 순간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이정현이 출격을 시작합니다.
요즘 말로 ‘뇌절(1절, 2절을 넘어 필요 이상으로 오버한다는 신조어)’이라고 하죠. 그녀는 겁에 질린 대중을 온화하게 위로하기는커녕 충격적인 컨셉으로 분위기를 가열시켰습니다. 그 시작은 외계인이었죠.
우주선에서 실험으로 탄생한 괴생명체가 지구에 착지하고, 홍콩의 공포 판타지 영화 <천녀유혼>의 처녀 귀신처럼 긴 생머리에 치렁치렁한 한복을 입었습니다. 새끼손가락에 마이크를 단 채 외눈박이 부채를 펄럭이며 관절을 꺾는 기이한 춤을 선보이는 신인에 모두가 깜짝 놀랐죠. 전자음을 사용한 테크노에 아쟁 소리를 섞어 사이버틱하면서도 오리엔탈 무드가 함께 담긴 기묘한 곡이었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세기가 교체되기 직전, 1999년 12월. 후속곡 ‘바꿔’ 또한 예측 불가한 컨셉이었습니다. 20kg에 달하는 날개 갑옷을 입고 구부정한 자세로 열창하는 그녀의 모습은 영화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낯설고 신기했죠. 21세기의 등장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이정현은 “바꿔 바꿔 세상을 다 바꿔”라며 일침을 가했습니다. 사회적 관습과 제도를 비판하며 직설적인 메세지를 내던졌죠. 새천년의 포문을 여는데 가장 망설임이 없던 이입니다.
새천년이 밝다,
‘너’
그렇게 2000년을 맞이했습니다. 이제 그녀는 고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되어 세상의 음모론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자를 연기합니다. ‘너’의 뮤비에선 비행접시가 피라미드에 착륙하고 로봇이 군무를 춥니다. 작렬하는 태양과 웅장한 중동 사막 아래, 어색한 CG의 합성이 오히려 이질적인 매력을 가중시키죠. 이정현의 디스코그래피 중에서도 눈에 띄게 독특하고 스케일이 큰 작품으로, 아스완 팔레 신전에서 드물게 촬영 허가를 해줬다는 일화가 그녀의 예사롭지 않은 면모를 부각합니다.
구슬픈 사랑의 염원,
‘아리아리’, ‘달아달아’
그녀의 어떤 활동은 마치 의식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아리아리’는 문명과 닿지 않은 인디언 소녀의 야생미를, ‘달아달아’는 한국무용의 살풀이를 차용해 동양적인 미를 담아냈는데 보름달을 향해 어깨춤을 추는 군무가 마치 한 부족이 의례를 지내는 것처럼 토속적인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사랑을 간청하는 여인의 처연함과 집요함을 표현한 이 곡들은 민속 신앙에서 주술을 외는 것처럼 서늘한 느낌을 자아냈습니다.
발랄한 인형처럼,
‘줄래’, ‘Vogue It Girl’
이정현은 본인의 이미지가 고착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언제나 신선한 방식으로 대중의 허를 찌르려 했죠. 테크노 ‘전사’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거세고 강인한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그녀는 이제까지와 정반대의 컨셉을 들고나옵니다. 툭 치면 부러질 것처럼 연약하지만 발랄하고 깜찍한 바비인형 ‘줄래’와 마릴린 먼로, 오드리 햅번 등의 고전 여배우를 오마주한 셀러브리티 컨셉의 ‘Vogue It Girl’이 그러했습니다. 색색깔의 드레스가 그녀를 전보다 ‘평범해’ 보이게 하는 듯했지만 인형 가면이나 패션쇼처럼 이정현만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무대에 피어났던 활동입니다.
재치 있고 일상적인 ‘반’,
‘Summer Dance’, ‘철수야 사랑해’
혼자만의 예술혼에 갇히지 않고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음악을 하는 것. 대중가수로서의 본분에도 충실했습니다. 2002년 당시 전국 나이트클럽을 강타하며 남녀노소 어깨춤을 털게 했던 복고 컨셉의 ‘반’과 여름을 상큼하게 수놓은 ‘Summer Dance’, 동네 오빠와의 첫사랑을 재치 있게 풀어낸 ‘철수야 사랑해’처럼 편하게 들을 수 있는 가벼운 활동들도 꾸준히 이어 나갔습니다.
박찬욱과 구현한 오싹한 상상력,
‘V’
현시점 그녀의 마지막 가수 활동, 2013년의 ‘V’를 빠트릴 수 없습니다. 영화 <파란만장>으로 연을 맺은 박찬욱 감독과 그의 동생 박찬경 미술작가가 연출을 맡고 <명랑>에서 부부로 호흡을 맞춘 배우 진구가 출연한 초특급 뮤비입니다. 유령신부와 운명의 붉은 실 설화를 결합한 스토리텔링에 섬세한 미술 세트가 합쳐져 한 편의 단편 영화와 같은 완성도를 보여줬습니다.
사실 이정현의 컨셉추얼한 활동은 하나의 글에 담기 벅찰 정도로 무궁무진합니다. 광기 어린 흑마법사 ‘미쳐’, 매혹적인 세뇨리따 ‘따라해 봐’, 일찍이 미국의 인재를 들여와 수준을 높인 ‘Crazy’처럼 말이죠.
그녀의 활동을 톺아보고 있노라면 궁금증을 가장한 감탄이 나옵니다. 한 개인이 어쩜 이렇게 다양한 페르소나를 표현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말이죠. 하지만 이 아티스트의 상상력보다 놀라운 것은 획일화를 강요하고 이탈을 경계했던, 지금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었던 그 시대에도 자신의 세계관을 표현하는데 거침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정현의 자기 확신과 추진력이야말로 현재의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힙’ 감성의 토대가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