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비인간을
연민하면 안 될까

함께하기 위해
‘행동하는 인간’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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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류는 분명 인식의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 그것도 아주 획기적인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 이제 기술 지향적이고 인간중심적인 근대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함이 여러 사건을 통해 증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 인류’는 과거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정도로 이어져 있다. 교통과 통신기술의 발달로 지구 어딘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그 일은 즉시 전 세계로 퍼져나간다. 현대사회의 흥미로운 특징이 바로 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넓게 퍼져나가는 동시적 경험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구 반대편에 테러가 발생하면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거의 즉시 그 테러의 이미지를 확인할 수 있다. 갑자기 어딘가에 새로운 전염병이 등장하면, 그 전염병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전 세계로 확산한다. 그야말로 ‘초연결’의 시대다.

우리가 서로 너무 가깝게 붙어있다는 이 감각은 또 다른 측면으로 최근 확장되고 있다. 우리가 우리뿐 아니라 다른 비인간 객체와도 항상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머릿속에 번뜩하고 떠오른 것이다. 항상 그래왔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많은 학문적 영역에서는, 적어도 인문학의 영역에서는 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인간과 비인간(이는 다른 생물이 될 수도 있고, 생태계 자체가 될 수도 있다. 인간이 아닌 모든 것들의 총체를 뜻하는 표현으로 단순히 인간이 아닌 다른 종의 생물만을 이르는 것이 아니다)의 경계를 허무는 것에 대한 다양한 담론은 아직 활발하게 생산되는 중이기에 다양한 이론가들이 이 주제로 뛰어들고 있고, 저마다 이 경향에 다양한 이름을 붙이고 있다. 이번 아티클에서는 각각의 담론을 자세하게 살펴보고 분석하기보다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허무는 최근 담론들에 제목에서 이미 제시한 넓은 범위의 질문을 한 번 던져보고자 한다.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은
정말로 해로울까?

근대 건물
이미지 출처: Unsplash

근대 이후 인간은 자연을 착취하고 비인간 존재의 가치를 무시해왔다. 그 사실을 외면할 생각은 없다. 인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지구를 쥐어짜는 방식으로 생활해왔고, 그 방식은 이제 폐기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정말로 우리가 근대적 생활양식을 폐기하고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인간 주체’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구분을 버려야만 할까? 우리가 스스로 인간임을 자각하는 것, 우리가 비인간 존재와는 다르다고 생각한 것은 정말 우리를 단순히 이기적으로 만들까? 아직 이 모든 이야기가 조금은 새롭고(적어도 나에게는 새롭다), 앞으로도 논의할 거리가 많기 때문에, 어떤 결론에 손쉽게 도달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아티클에서는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을 허무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고수해보고 싶다.


맹점 속으로

이미지 출처: Unsplash

이러한 입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허무는 태도는 ‘포스트모더니즘’과 그로부터 파생된 다원주의의 맹점으로 걸어가 버리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먼저 확실히 해두고 싶은 것은 이 주장이 모더니즘을 거부하고 기존의 질서를 전복하고자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도와 타자들의 담론을 비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기서 비판하는 것은 바로 그 시도의 의도치 않은 맹점이자 부산물, 즉 끝없는 상대성의 논리 때문에 우리가 어떤 결정도 내릴 수가 없게 되어버리는 상황이다. 인간이 아닌 자율적 객체의 존재와 그 존재의 다면성을 인정하는 것은 이들이 ‘우리가 직면하는 문제’에 대부분 행동할 의무를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망각할 위험을 초래한다. 그리고 또 우리가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지점과 그렇지 못하는 지점을 구분하지 못하게 한다.


주체의 행위성

아무리 그것이 상상에 불과할지라도, 우리의 몸과 주체성은 우리를 행동하게 한다. 그리고 이 ‘행위의 주체로서의 인간’의 중요성이 간과되고 있는 현실은 일종의 징후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파생실재에 압도당하고 있다는 사실의 징후 말이다. 최근 우리는 상상의 질서에 압도당하고 있다. 미디어와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이미지, 그리고 굳어져 버린 후기자본주의 질서에 질식하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물리적인 몸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물리적인 몸에 대한 감각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이 시대, 우리는 이 때문에 어떤 우울을 겪고 있는데, 이 우울은 나라는 주체가 지금 발을 딛고 서 있는 세계에 실제 행동으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함에서 찾아온다.


우울의 징후

이미지 출처: Unsplash

나는 이 우울의 징후를 스스로의 글쓰기에서 발견한다. 나는 지금도 ‘나’라는 단어를 아티클에서 사용하는 것이 두렵고 어색하다. ‘우리’라는 단어로 ‘나’를 바꾸어 쓰고 싶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우리라는 단어가 주는 안락함,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에 계속 머무르고 싶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나’는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나는 ‘내 손’을 움직이며 ‘내 생각’을 써내려 간다. 이 모든 행동과 그로 인해 발생한 책임이 놀랍도록 두렵지만, 또 황홀하기도 하다. 나라는 인간 주체가 나의 목소리의 주인이며 나는 이 목소리에 책임을 져야만 할 것이다. 이렇게 나는 ‘나’라는 주체의 권리를 요구하면서 동시에 다른 존재에 대하여 이타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된다. 나는 객체와는 다른 주체로서의 ‘나’를 요구함으로 지금까지의 질서와 체계, 외부세계에 질문을 던지고, 때로는 수용하고, 때로는 저항한다.


인간이 비인간과 다르다는 생각이야말로 인간에게 비인간에 공감하고 그를 바탕으로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닐까? ‘나’와 ‘네’가 같다면 우리가 서로에게 느끼는 연민은 의미가 없게 된다. 물론 연민이 불러일으키는 변화 의지는 온전하지 못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연민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인식을 통해서 우리는 변화를 만들어 나가야만 한다고, 공감과 연민은 연약하고 순진하기 짝이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가장 빠른 방법은 행동이고, 행동은 대개 행위자를 요구한다. “행위자 없는 행위”와 “행위자가 만들어내는 행위”는 분명 차이가 있고, 그 차이를 수용하는 것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나기를 요구한다면, 이 요구는 터무니없는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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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예술과 사회, 그 불가분의 관계를 보고 기록하고 탐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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