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샷 시대
장소의 의미란

사라져가는 장소를
기억하고 기록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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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학자 이-푸 투안은 가치가 부여된 공간을 장소라고 규정한다. 장소는 ‘어떤 일이 이루어지거나 일어나는 곳’이라는 점에서 ‘아무것도 없는’ 공간과 대비된다. 공간에서 장소로 전환되는 순간, 우리는 그곳을 향유하는 주체가 된다. 공간이라는 물리적 뼈대에 인간 활동과 시간이라는 살점이 붙어 장소가 된다.

우리는 장소를 어떻게 바라보고, 향유하고 있는가. 애석하게도 많은 공간들이 트렌드라는 미명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장소를 향유하기 위해선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 2003년 발표된 차이밍량 감독의 <안녕, 용문객잔>을 통해 장소 향유의 문제를 짚어 본다.


주체로 환원되는 장소
<안녕, 용문객잔>

<안녕, 용문객잔>
이미지 출처: the cinematheque

대만의 뉴웨이브 세대 작가 차이밍량이 2003년 발표한 <안녕, 용문객잔>은 다음 날 폐관을 앞둔 복화극장의 마지막 날을 담는다. 스러져 가는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마지막 영화는 대만 무협영화의 거장, 호금전의 <용문객잔>이다.

<안녕, 용문객잔>의 주인공은 복화극장이라는 영화관이다. 감독은 카메라를 통해 느린 속도로 스러져가는 장소를 응시한다. 그리고 그 느린 템포는 우리에게 그곳을 면면히 살펴보게 한다. 지루할 정도로 긴 쇼트들은 장소에 퇴적된 시간을 상기시킨다. 쏟아지는 장대비로 영화관 곳곳에 속절없이 물이 새고, 객석은 삐걱댄다. 그럼으로써 차이밍량은 배경이자 객체로만 존재했던 공간을 주체로 환원시킨다.

복화극장은 마지막으로 상영되는 <용문객잔>에 출연했던 과거의 스타, 묘천과 석준을 통해 자신의 말을 전한다. 두 배우는 복화극장에 영화를 보러오는데, 석준은 과거의 영광이 떠올라서인지 흘러가는 세월이 야속해서인지 영화를 보며 눈물을 글썽인다. 영화가 끝난 뒤, 두 인물은 대합실에서 만나 담소를 나눈다. ‘선생님, 이제 아무도 이 영화를 보러 오지 않습니다.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도 없죠’. 영화는 <용문객잔>이 발표됐던 60년대의 대만 가수, 야오 리의 노래로 끝맺는다. ‘너무 많은 지난 날들이 내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 난 영원토록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소외시키는
공간 향유 문화

unsplash @malcolm lightbody
이미지 출처: unsplash @malcolm lightbody

<안녕, 용문객잔>은 공간이 단순히 뼈대로 이루어진 물리적 실체임을 넘어, 시간의 흐름과 사람의 활동, 기억들이 촘촘히 퇴적된 비물질적 요소로도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떠나간 이들을 추모하는 것처럼, 차이밍량 또한 이제 소멸하는 공간을 ‘기록하고 기억하기’라는 방식으로 기린다. 공간이 우리에게 단순한 편리성과 미감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심적인 만족과 위로를 전하기도 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공간과 상호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하지만 공간을 향유할 수 있는 우리의 가능성은 ‘인생샷’의 등장으로 교착에 빠진다. 잘 꾸며진 공간에서 인생샷을 건진 이들은 유목민처럼 다음 공간으로, 또 다음 공간으로 이동해가며 공간 속의 내용물을 소진시킨다. 인생샷 문화에서는 공간을 점유하는 사람도, 공간도 주체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인생샷은 피사체가 되는 모두를 소외시킨다. 인생샷은 인생의 특정 부분을 최고로 고정함으로써 그 순간을 제외한 나머지의 삶을 소외시킨다. 인생샷을 유도하는 잘 꾸며진 공간은 사진의 극적인 효과를 더하는 장치로 전락해 본래의 용도와 가능성을 잃어버린다.

공간들이 모여 형성된 골목이나 동네 또한 자본의 광풍을 피해 갈 수 없다. 몇 년 전까지 들불처럼 번졌던 -리단길 열풍은 동네라는 장소를 천편일률적으로 만든다. 거리를 중심으로 매력적인 가게들이 늘어선 경리단길의 성공은 곧이어 서울의 또 다른 동네로, 서울을 벗어난 다른 지역으로 이식된다. 물론 각각의 거리에 위치한 가게들의 특색은 저마다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므로, 어떤 동네의 고유한 이름을 성공한 모델의 이름으로 대체하는 건 한편으로는 지역의 정체성을 죽이는 게 아닐까.


기록하고 기억하기

pwp landscape architecture
이미지 출처: pwp landscape architecture

그렇다면 어떻게 변해가는 우리 주변의 장소를 향유할 수 있을까. 국가와 기업 단위로 진행되는 토지 등 부동산 개발에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다. 그러나 한 명의 개인이 모여 하나의 흐름을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바로 차이밍량이 보여준 ‘기록하고 기억하기’라는 방식으로 말이다.

메모리얼 파크는 ‘기록하고 기억하기’라는 방식으로 장소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좋은 사례다. 잔혹한 테러리즘으로 기억될 9·11 테러가 일어난 지 13년 만에 세계무역센터가 있던 자리에 메모리얼 파크가 들어섰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뉴욕 맨해튼의 부지를 아픔을 기억하고 기록하기 위한 자리로 남겨두었다. 그라운드 제로로 명명된 이곳을 재건하는 데에는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9·11 메모리얼 박물관 입구에는 ‘No Day Shall Erase You From The Memory Of Time’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시간이 흐르더라도, 우리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해 기억은 그만큼 강력하다. 기억은 장소의 가장 큰 자산이다. 장소의 비물질적 실체가 사람의 활동과 기억에서 비롯된 것처럼, 사람의 기억에는 항상 어떤 장소가 있다. 우리 주변의 사라져가는 장소들을 소중하게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지난 10월 30일, 원주에 남아있던 마지막 단관극장인 아카데미 극장이 철거됐다. 1963년 개관해 60년간 자리를 지켜온 아카데미 극장은 2006년 경영난으로 폐업했으나 국내 최고(最古) 단관극장이라는 의미를 인정받아 시민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힘을 모아 보존해 왔던 곳이었다. 원주시는 아카데미 극장을 철거한 뒤 주차장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꿈과 사유를 투사하는 물질과 기억의 토대인 장소를 잊지 말라.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라. 세계대전의 위기 앞에서, 어쩌면 장소를 향유할 수 있는 기회는 앞으로 희박해질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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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일

차이를 없애버리려는 시도에 반해,
무엇과도 구별되는 세계를 찾아 제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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