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일상을 지나오면서도 ‘기록하고 싶은 순간’이란 찰나를 마주할 때가 있죠. 21세기에 사는 우리는 망설임 없이 스마트폰 카메라를 실행하고 사진을 찍습니다. 영영 사라질 시간을 붙잡아 지금을 기억하기 위해서죠. 기록은 인간의 본능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기억력은 한계가 있을뿐더러 정보 전달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5천 년 전 사람들은 어떻게 기록했을까요? 무엇을 남기고 왜 기억하려고 했을까요? 다큐멘터리 사진가 강운구는 그 흔적과 증거를 채집했습니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먼 과거의 사람들이 남긴 기록을 찾아 그의 뷰파인더를 따라가 봅니다.
고래가 세로로 서 있는 이유
50여 년 전 강운구는 한 신문에서 울산 반구대 사진을 보게 됩니다. 고대인이 암석을 깎아 만든 암각화 사진이었죠. 작가는 암각화 속 고래가 왜 세로로 서 있을까 궁금증을 품습니다. 그 의문은 오래도록 해결되지 않고 그의 머릿속에 각인됩니다. 그간 아무도 ‘왜 고래가 서 있을까?’하는 질문도, 이를 해석한 대답도 없었죠. 결국 강운구는 스스로 답을 찾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나섰습니다.
고고학적 사진 작업이란 성격을 띤 이번 프로젝트는 2017년에 본격적으로 시작해 약 3년간 이어집니다. 국내는 물론 한국과 문화적으로 친연성이 있다고 판단한 파미르고원, 톈산산맥, 알타이산맥에 걸쳐 있는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4개국과 러시아, 몽골, 중국까지 총 8개국의 30여 개 장소를 답사했습니다. 5천 년 전 제작된 암각화 속 사람들을 사진에 담은 강운구는 마침내 고대인의 삶에 비친 예술과 문학의 유장한 서사를 풀어냈습니다.
암각화는 곧 고대의 사진
강운구는 1960년대 이후 개발 독재의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산업 사회로 변모하는 한국의 면면을 기록해 왔습니다. 그는 특정 시대에 함께 모여 사는 사람, 그 사람들이 사는 방법과 환경에 관심을 두고 사진을 해석했죠. 더불어 수입 사진 이론의 잣대를 걷어내고 우리의 시각 언어로 포토저널리즘과 작가주의적 양상을 개척했습니다. 이후 그는 가장 한국적인 질감의 사진을 남긴 작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번 작업은 암각화로 대변되는 과거는 흑백사진으로, 현대인의 삶과 풍경은 컬러사진으로 구성해 이중구조를 가집니다. 이로써 강운구는 현시대의 시간성과 역사성을 기록하는 기록자의 시선으로 고대인이 그린 암각화를 해석하고, 곧 암각화는 고대의 사진이라는 정의를 증명해 냅니다.
“파미르고원, 톈산산맥, 알타이산맥에 걸쳐 있는 암각화를 답사하면서 5000년 전 사람들을 1000명 이상 만났어요. 그들은 직접 본 것, 경험한 것들만 바위에 그렸기 때문에 암각화야말로 ‘고대의 사진’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운구는 그들의 사진엔 삶과 죽음, 춤추고 사냥하고 의식을 치르는 순간들이 저장돼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기억해야 할 사람과 즐겁고도 치열했던 일상 그리고 간절히 바랐던 염원까지. 우리가 오늘 카메라에 담은 사진과 모습은 많이 다르지만 비슷한 순간들이 겹쳐 보입니다. 2023년을 마무리하는 초대기획전 강운구의 《암각화 또는 사진》이 뮤지엄한미에서 진행중입니다. 그때 그 시대의 사진첩을 살펴보면서 오늘날 우리의 순간을 다시 기억하는 특별한 시간을 가져 보시길 바랍니다. 전시는 2024년 3월 17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