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글을 쓰는 사람은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할까? 멋진 문장이나 감탄을 부르는 이야기를 만날 때면 이렇게 생각하곤 합니다. 남부럽지 않은 성취를 한 사람을 볼 때도 눈에 보이지 않는 무대 뒤 그의 비범함이 궁금합니다.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림만큼이나 그린 이가 알고 싶습니다. 같은 풍경을 보더라도 자신만의 색과 형태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어떤 특별한 생각을 가졌을지 말입니다.
오늘 소개할 책 3권은 작품 앞으로 나온 작가들의 이야기입니다. 모두 다른 나라에 살며 고유한 개성을 담은 그림을 그렸지만 세 작가의 이야기는 그림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나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비슷합니다. 기본적으로 그림이 다수 실려있고 친절한 언어로 쓰여서 미술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도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술가의 색다른 관점을 통해 예술과 한 발짝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책들을 만나보시죠.
오랫동안 그리고 열심히 바라보기
『다시, 그림이다 –
데이비드 호크니와의 대화』
미술 평론가 마틴 게이퍼드와 작가 데이비드 호크니의 10년에 걸친 대담집입니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2019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을 통해 국내에서도 많이 알려진 현대미술의 거장 중 한 명입니다. 최근 몇 년간 날마다 아이패드로 그린 드로잉과 작은 캔버스 몇십 장을 합쳐 완성한 거대 풍경화를 꾸준히 발표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마틴 게이퍼드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새 작업이 나올 때마다 그에 얽힌 이야기를 묻습니다. 화가의 대답 속에는 실패와 좌절의 솔직한 경험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치열한 시간이 있습니다. 책에는 화가 스스로 미완성의 그림, 실패한 그림이라고 부르는 작품도 실려 있지요.
데이비드 호크니는 끝까지 가보고 막다른 길을 확인하면 새로운 탐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영국의 시골 마을 브리들링턴에서 파리, LA, 런던 등 다양한 장소를 옮겨 다니며 새로운 환경에 걸맞은 새로운 작업 방식으로 예술 세계를 확장했습니다. 팩스와 복사기를 이용한 판화 작업, 폴라로이드로 만든 포토콜라주, 무대 미술이 그러했죠.
이 책을 읽으면서 그의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본다’는 행위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모두가 감탄해 마지않는 작가의 작품은 결국 사물과 풍경을 보는 그만의 방식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본다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사람들을 차에 태워 여기로 올 때 길이 무슨 색이냐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들은 대답하지 못했지요. 10분 후에 내가 같은 질문을 다시 하자 그들은 길의 색이 다르다는 점을 알아보았습니다. 그 후에 그들은 ‘길이 무슨 색인지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솔직히 그런 질문을 받지 않았다면 길의 색은 그저 길의 색일 뿐입니다.”
_데이비드 호크니, 『다시, 그림이다 – 데이비드 호크니와의 대화』
“나는 항상 그림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볼 수 있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림이 없다면, 누가 무엇을 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고 봅니다.”
_데이비드 호크니, 『다시, 그림이다 – 데이비드 호크니와의 대화』
WEBSITE : 데이비드 호크니
『다시, 그림이다 – 데이비드 호크니와의 대화』 구매 페이지
나밖에 그릴 수 없는
『안자이 미즈마루
마음을 다해 대충 그린 그림』
‘무라카미 하루키’ 하면 떠오르는 캐릭터 그림이 있으신가요? 투박한 선으로 단순하게 그린 중년 남성. 무라카미 하루키 책 대부분의 삽화를 담당한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작가인 안자이 미즈마루의 그림입니다.
“저는 뭔가를 깊이 생각해서 쓰고, 그리고 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하지 않아요. 이렇게 말하면 ‘대충 한다’고 바로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많지만, 대충 한 게 더 나은 사람도 있답니다. 저는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지 않으려나요.”
_안자이 미즈마루, 『안자이 미즈마루 마음을 다해 대충 그린 그림』
스스로 그림을 대충 그린다고 말하는 작가는 2014년 세상을 뜨기 전까지 약 30년간 무라카미 하루키 책 대부분의 삽화를 담당했습니다. 작품집이자 대담집이자 회고집인 이 책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와의 모든 작업물 및 대담이 담겨있고, 그 외 잡지 표지, 여행 에세이 등 다양한 작업이 실려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안자이 미즈마루 본인의 말보다 주변 사람에게 듣는 이야기가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은 안자이 미즈마루가 쌓아온 수많은 작품을 통해 그림에 대한 그의 애정과 성실함을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단순하고 장난기 어린 그림에는 군더더기 없고 소탈한 인간미가 느껴집니다. 일본어로 쓴 만화 글이 모두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어 그의 말에 같이 웃을 수 있습니다.
안자이 미즈마루는 후배 일러스트레이터를 위한 교육에도 힘썼습니다. 책 후반부에는 제자들이 스승을 기리며 남긴 글을 모았습니다. 제자들의 말에서 알 수 있는 안자이 미즈마루는 대충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은 있는 힘껏 자신을 꾸밈없이 보여주고 스스로 자신 있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대충 그리기는 결코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방식이었던 것이죠.
“어떤 것이든 내가 있으면 어떤 느낌으로든 내 것이 나올 것이다, 그런 느낌이란 것은.”
_안자이 미즈마루, 『안자이 미즈마루 마음을 다해 대충 그린 그림』
『안자이 미즈마루 마음을 다해 대충 그린 그림』 구매 페이지
텅 빈 곳에서 찾은 아름다움
『나의 드로잉 아이슬란드』
이 책은 작가 엄유정이 아이슬란드 북부 올라프스피외르뒤프의 한 아티스트 레지던시에서 40일간 그림을 그리며 생활했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입니다. 아이슬란드 작은 마을에서의 생활은 단조롭습니다. 장을 보고, 그림을 그리고, 산책을 하는 일상의 반복이지요. 하지만 작가의 글과 함께 실린 그림은 그곳에서의 시간이 한편으론 얼마나 다채롭고 역동적이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마을 사람들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청어 박물관 관람, 동네 아주머니들과의 수영 모임, 부녀회관에서 열린 만찬회까지 작가는 짧은 기간 동안 마을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며 낯설지만 따뜻한 경험을 쌓아갑니다.
“그 낯선 풍경 속에 잠시 나를 던져본 것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싶어 하는지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깨닫게 해주었다.”
_엄유정, 『나의 드로잉 아이슬란드』
작가는 그림 그리는 즐거움을 다시금 느끼기도 합니다. 평소 인물을 많이 그리던 작가는 사람이 적은 동네 모습에 망연자실합니다. 무엇을 그릴지 고민하다 자신이 매일 아침 감탄하며 산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은 순간, 그는 행복한 몰입에 빠져듭니다. 한 달간의 작업 끝에 작가는 36점의 설산 연작을 완성합니다.
레지던시 생활은 작가의 개인전으로 끝이 납니다. 마을 사람들로 꽉 찬 전시장 풍경과 수영 모임 아주머니들이 전하는 꽃다발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습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한 번쯤 아이슬란드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만큼이나 언젠가 여행을 가면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멋있게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이 그림이라면, 형태가 어떻고 비율이 어떻든 간에 말이나 글 대신 연필이나 붓을 쥐어보고 싶다고 말입니다.
“신기하게도 매일을 느릿하게 보낸 것 같은데 서울에서 몇 달간 작업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그림을 그렸다. 도시에서 나는 무엇을 하며 그리 바빴던 걸까.”
_엄유정, 『나의 드로잉 아이슬란드』
INSTAGRAM : @drawingwing
『나의 드로잉 아이슬란드』 구매 페이지
이들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예술이란 ‘각자의 눈으로 느끼는 세상 펼치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받는 그림을 그리기 위한 특별한 비법은 없으며, 모든 것을 재능 하나만으로 설명하기에도 부족합니다. 그들의 재능을 꼽으라면 남들보다 조금 더 오래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면밀한 눈을 가졌다는 점 아닐까요? 이 책들은 잠시 동안 예술가의 눈을 빌려 주변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예술가의 시선으로 일상이 특별해지는 순간을 만날지도 모릅니다.
한편으로는 삶과 세상을 깊이 느끼고 색과 형태로 기록하는 이들의 마음과 일상에서 자주 사진을 찍고 일기를 쓰는 사람들의 마음이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예술가의 눈을 가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술관이 아닌 서점에서 예술과 한 발 더 가까워지는 경험을 해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