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보내고 밤에 적어 내려가는 일기장이 그날을 온전히 묘사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종종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과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합니다. 어떠한 장면을 언어로 내뱉으려고 한 순간 그 이미지가 무너지고 사라지고 잊히는 경험을 하기도 하고요. 이렇듯 현존하는 단어로는 담을 수 없는 존재들이 있기에 우리는 어쩌면 언어의 안과 밖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거 같습니다.
인터뷰를 통해 만나볼 유리 작가는 언어의 틈새를 들여다보며 언어의 외부에 존재하는 세계를 표현합니다. 이름이 붙여진 것들을 보며 이름이 없는 것들을 떠올리고 일상에서 생경하게 다가오는 낯선 순간이 자아내는 혼돈과 환상을 그리는 작가의 작업은 우리가 언어를 통해 바라보았던 존재들에 대해 돌아보게 하는데요. 북촌의 언덕에 자리한 페이지룸8에서 개인전 《없는 날》을 선보이고 있는 유리 작가와 만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 나누어 보았습니다.
인터뷰이 유리
인터뷰어 류희연
사진 제공 유리, 페이지룸8
자기소개로 인터뷰를 시작하려고 해요. 에디터인 제가 작가님의 작업을 소개하는 것도 좋지만, 작가님의 언어로 자신을 묘사하는 소개도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유리 작가입니다. 저는 삶과 회화가 한 궤도 안에 있다고 믿고, 그림 그리는 행위 자체가 일상이 되는 것을 지향합니다. 그림을 그릴 때는, 기존의 경계를 흐리고 언어적 정의를 유보하는 태도로 작업하고 있어요. 언어의 틈새를 들여다보며, 그 안의 모양새를 시각적인 이미지로 표현하고자 합니다. 주로 유화를 이용한 페인팅 작업을 하는데요, 그 지지체가 종이나 캔버스 같은 평면이 되기도 하고, 오브제 혹은 나무 블록 같은 입체의 모습을 가지기도 합니다. 책의 개념이나 물성을 가진 아티스트북 작업도 함께 하고 있는데, 그림 원본을 손으로 엮어 책의 형태로 만들거나, 물리적으로 엮이진 않아도 책의 개념을 가지는 작업물 등 확장된 개념의 책 작업을 하고 있어요. 사실 페인팅과 아티스트북 작업, 이 둘의 매체적 경계를 짓기보다는 그냥 다양한 모습의 회화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림으로서, 시각예술로서 다양한 것들을 담아내고 싶어요.
언어로는 형용할 수 없고 다루어질 수 없는 감각을 통해 회화가 보여주는 언어의 세계를 보여주고 계신 데, 언어에 관심을 가지게 되신 계기를 말씀해 주신다면?
저는 우리나라 말이 정말 섬세하고 다양한 표현을 할 수 있는 언어라고 생각해요. 문득 아주 모호한 차이를 표현하는 단어들을 마주하거나, 어떻게 이런 것을 표현하는 단어가 있지? 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정말 멋진 언어를 모국어로 쓰고 있음에 감탄하곤 합니다. 가끔은 어떤 단어에 꽂혀서 그 유래나 기원을 파고들 때도 있고요, 단어의 모양새나 어감이 주는 뉘앙스에서 희한하게도 어떤 시각적 자극을 받기도 해요. 원래도 이렇게 언어적 표현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편이었고, 외국어를 배우며 한국어와의 차이점을 보는 것에도 흥미를 느끼고 있었어요. 그래서 해외여행을 가면 그 나라의 언어로 된 그림책을 사 모으는 취미가 있기도 했고요.
기본적으로 이런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대학생 때 독일어에 빠져서 1년 정도 독일에 머물렀던 경험이 저에게 언어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는 큰 계기를 마련해주었던 것 같아요. 독일어로만 생활하고, 독일어로 일기를 쓰면서 모국어와 외국어를 사용할 때 내 자아가 달라지는 경험을 했고, 독일어-한국어 사이에서 온전히 번역되지 않는 단어들을 보며, 그 미묘한 차이와 공백을 어떻게 메워야 할까? 하는 고민이 들었던 것 같아요. 당시 자주 만나던 친구가 독일-이탈리아 혼혈인데 정서적인 표현은 자연스럽게 이탈리아어로, 논리적인 사고는 독일어로 표현된다는 얘기를 해줬어요. 그 당시 이런 경험들로 인해서 언어가 미치는 영향을 온 신경으로 감각했던 것 같아요.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사람의 사고방식이나 구조가 전혀 다를 수 있겠구나.’, ‘언어는 이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구나’,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모든 것을 언어로써 표현할 수 있을까?’, ‘언어로 정의되고 묶이지 못한 것들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등의 생각들이 머리를 지배했어요. 그때부터 제가 늘 언어에 예민하게 느끼던 포인트들이 더 재밌고 크게 다가왔고, 이런 생각들이 쌓이고 모여서 결국 작업으로까지 이어졌던 것 같아요. 언어는 이만큼이나 강력한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틈이 있다, 그렇다면 그 틈새의 모양은 어떤 걸까 하는 궁금증 같은 것들이요. 언어의 힘과 무게를 느낄수록 역설적으로 그 안에 포함되지 못하는 존재들에게 집중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언어 자체에 대한 호기심이 출발점이 되지만, 저는 그 사이에 파고든 의문 같은 것들을 ‘텍스트’가 아닌, 내가 가진 ‘시각언어’로서 풀어보고자 하고 있어요. 이게 작업의 근원적인 출발입니다.
이번에 오픈하신 개인전에 관해 이야기 나누어 보고 싶어요. 3월 7일까지 페이지룸8에서 진행되는 개인전 《없는 날》은 매년 찾아오는 생일에 대한 사유에서 시작해서 지난 4년간은 없었던 날인 2024년 2월 29일로부터 느끼게 되는 낯설고도 생경한 생과 사의 감각을 회화와 아티스트북 작업으로 선보이고 계시죠. 이번 전시를 어떠한 마음과 생각을 담아 준비하셨는지 궁금해요.
이번 전시는 기존 전시에서 다루던 내용들보다 조금 더 작은 범위의 것들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해요. 언어로서 정의되지 않는 모호한 것들에 대해, 이름 붙일 수 없는 것들 혹은 언어적 감각을 넘어선 것들을 회화로 다루는 게 제 작업의 큰 맥락이라고 하면, 그 맥락 안에서 정말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데요. 그렇게 뻗어 나온 여러 갈래 중 이번에는 ‘생일’이라는 키워드를 택했어요. 그래서 준비 과정이 조금 어려웠지만, 그만큼 작업에 깊이 빠졌던 것 같기도 해요.
지금으로부터 1년 전, 전시 일정을 정할 때 정말 가볍게 내 생일이 있는 달에 전시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2월을 제안해 드렸어요. 그렇게 2월 중으로 전시 일정이 잡혔는데, 그 이후 오랫동안 ‘내가 왜 내 생일을 포함한 기간에 전시하고 싶었을까?’라는 물음이 머릿속을 지배하면서 대체 생일은 내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날인지에 대한 고민으로까지 이어졌어요. 정말 오랫동안 그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보았는데, 그 질문의 명확한 답은 내리지 못했고 생일이라는 소주제에서 시작한 온갖 잡다한 생각과 관념들이 더더욱 떠오르기 시작했어요.
그렇다면 이번 전시는 이 ‘생일’이라는 작은 날에서 시작된 거대한 고민을 그대로 풀어 보여주는 전시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 생일이 어떤 단초가 되어, 거기서 시작한 탄생에서부터 죽음 사이의 표현하기 힘든 감정과 고민, 이 삶을 함께 부유하는 존재들 그리고 항상 나의 코앞에 놓여있지만, 외면했던 일상적 죽음들 등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담아 보려고 했던 것 같아요. 전시 준비를 다 마치고 알게 된 사실인데요, 올해 제 양력 생일과 음력 생일이 같은 날로 겹쳤더라고요. 그래서 이 주제를 취하게 된 건 어쩌면 필연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남몰래 하기도 했어요.(웃음)
전시공간에 함께 비치된 작가노트에 “결코 이 글은 그림의 모든 것을 말해주진 못할 것이다.”라는 구절이 인상적이었어요. 언어를 통해 누군가에게 가 닿는 순간에는 필연적으로 어느 정도의 틈을 가지게 되지만 해석할 수 있는 어떠한 단서는 제공해 주는 거 같아요. 그러한 의미에서 작가님 작품의 제목은 모호한 풍경에 해석의 실마리를 주는 듯하면서도 상상력을 자아내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품을 비롯하여 작품의 제목을 어떻게 지으시나요?
저는 일단 작품을 다 제작하고 나서 그 작업을 계속해서 들여다보며 제목을 지어 주는데요. 말씀하신 것처럼 그 그림을 설명하거나 이름을 붙여주는 것보다는, 전달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힌트나 뉘앙스를 제공해 주는 정도의 역할로서 존재하게끔 신경 쓰고 있어요. 언어로 모든 것을 감각할 수 없듯, 시각예술로서의 작품을 보는 이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도 분명 틈이 존재함을 느끼는데요. 아이러니하게도 그 빈틈을 언어가 보완해 주길 바라며 제목을 짓습니다. 이 아이러니함, 문자와 시각언어 사이의 간극, 그리고 그 안에서 혼란스러움은 늘 어렵지만 새롭고 흥미로운 지점으로 다가와요. 그래서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도와줄 수 있는 정도의 제목을 찾는 데에 초점을 두는 것 같아요. 평소에 떠오르는 단어나 문구들을 메모장에 기록해 두고, 작품과 가장 어울리는 언어적 표현을 찾아 제목을 짓습니다. 정말 일상적인 순간에서 갑자기 꽂힌 단어나, 새롭게 알게 된 단어, 혹은 어떤 문장의 표현 방식이 주는 느낌들 등등을 메모해 두는 습관이 있어요. 단어들이 둥둥 떠다니는 상태에서 몇몇을 채집해서 문장을 만드는 느낌이에요. 아주 가끔은 정말 신기하게도 그림이 먼저 제목을 던져주는 듯한 기분을 받을 때도 있어요.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없는 날』(2024)를 포함하여 아무런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 읽히지 않는 책인 ‘아티스트 북 시리즈’를 이어오고 있으시죠. 작가님께서는 아티스트 북에는 서사구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씀 주셨는데, ‘책’이라는 물질성을 생각해 보면 회화와 다르게 책장을 넘기며 마주하게 되는 의미의 지속, 말하자면 연속성이 부여될 거 같아요. 서사구조가 부재한 ‘위계가 없는 이미지들’을 배열하고 배치하는 과정은 책을 만드는 걸로 생각하면 편집의 시간으로도 볼 수 있겠네요. 이미지들을 책으로 엮어내는 작가님의 편집 기준이나 방법이 있을까요?
서사 구조를 인위적으로 만들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책의 형태를 가지게 되면서 생기는 또 다른 서사가 생기는 것 같아요. 물리적으로 엮이는 책들은 특히 처음과 끝 개념이 생기기도 하고, 말씀하신 것처럼 페이지를 넘기면서 생기는 시간적인 구조가 생기기도 하거든요. “더미” 작업을 진행할 때를 예로 말씀드리자면 그림을 그려서 한 장 한 장 접어놓고, 그 안에 이미지는 보지 않고 아주 랜덤하게 순서를 정했어요. 그리고 책을 다 만들고 나서 페이지를 열어보며 저도 그 순서를 보게 되었죠. 그로 인해서 제가 또 생각지 못했던, 의도치 않았던 서사가 생긴 기분이었어요. 하지만 모든 아티스트북 작업에 서사구조를 없애려고 하는 건 아니에요. 물리적으로 제 책이 되지 않은 아티스트북 작업인 “절반의 기억”인 경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갈수록 앞 이미지가 흐릿해지고, 뒷배경 이미지가 침범하는 흐름이 보이고요, 기억이 소실되는 과정을 시각화했기 때문에 일련의 이야기 구조가 꽤 뚜렷한 편이에요. 무조건 서사를 거부한다는 건 아니고요, 기존의 언어로서의 글이 가지는, 책이라는 구조가 통상적으로 가지는 순서와 서사, 혹은 논리적인 흐름 등에서 조금 자유로워 보고자 하는 시도인 것 같아요.
작년에 이어 올해 개인전을 연이어 선보이면서 앞으로의 작업 방향성에 대해 많이 고민하셨을 거 같아요. 올해도 여러 전시를 앞두고 계신 데, 어떤 작업을 선보이실 예정인지 안티에그 독자분들께 살짝 귀띔해 준다면?
올해는 앞으로 그룹전들이 예정 되어있습니다. 각각 아주 다른 공간들에서 재미있는 주제들로 다른 작가님들, 기획자님들과 함께할 예정이에요. 작년부터 올해 초까지 개인전 혹은 개인 프로젝트 위주의 전시들이 연달아 있었다 보니 제 기획과 작업이 주가 되는 전시가 많았는데요, 24년도는 다른 예술가분들의 작업과 제 작업이 함께 하는 모습을 다양한 공간에서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특히 개인적으로 올해는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야겠다는 욕심은 조금 내려두고, 지금까지의 작업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해요. 제가 어떤 작업을 해왔는지 되돌아보면서 다시 한번 작품들의 의미들을 곱씹어 보기도 하고, 확장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고, 다시 한번 제 안으로 파고 들어가 보는 시간을 가져보려 합니다. 그 과정에서 또 어떤 작품들이 만들어질지 저도 아직은 예상이 안 되지만, 즐거운 고민의 결정체로 재밌는 결과물들이 나오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 작품들을 돌아보고 정리해 보는 작업의 일환으로써 3년 정도의 작품들을 모아둔 카탈로그가 조만간 만들어질 예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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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을 잃고, 또 매일을 얻어낸 날들이 모여 만든 하루인 생일에 대해 생각해 보았어요. 죽음과 하루하루 가까워지지만, 휘몰아치는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풍부한 감정과 사유로 가득한 나날을 보내야겠다고 홀로 다짐했답니다. 소멸하는 밤은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아침을 더욱 찬란하게 만드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