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서구 미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미술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미술의 순수한 시각성을 강조했던 것처럼 현대미술은 지극히 시각적인 것으로, 따라서 멀리서 감상하는 대상으로 오랫동안 간주되어왔다. 여전히 대부분의 미술전시가 이루어지는 화이트큐브라는 공간 자체를 먼저 살펴보자. 새하얗고 깨끗한 벽에 작품이 하나씩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걸려 있고, 관람자는 그 작품에 일정한 거리 이상으로 다가갈 수 없다. 어린아이가 혹은 전시에 너무 집중한 사람이 실수로 그 선을 넘어갈라치면 금세 보안 요원의 제제가 정중하게 들려온다.
“죄송하지만 선 밖으로 나와 주세요.”
미술작품은 성스러운 것이 대부분 사라져버린 이 시대에 몇 안 되게 남아있는 일종의 토템이다. 모든 과거의 토템이 그랬듯 미술작품에도 접촉의 금기가 강력하게 작동한다. 화이트큐브라는 최후의 성전에 남아있는 그 토템을 우리는 감상하고 숭배할 수는 있어도 만져서는 안 된다. 역으로도 마찬가지다. 미술작품 역시 우리와 닿아서는 안 된다. 미술작품은 어떻게든 관람자의 동선을 방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철저하게 격리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접촉은 관람자를 도덕적으로 불결한 존재로 만들 뿐 아니라, 동시에 미술품 자체의 원본적 가치와 아우라 역시 훼손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관람자와 작품의 통제되지 않는 접촉은 미술품을 소유한 자의 손해로 이어진다. 소유자의 자산 중 하나로 관리되는 미술품은 자신의 교환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격리되어 누구와도 닿을 수 없는 신세다. ‘만지지 마세요’라는 단호한 팻말이, 혹은 작품 앞에 그어진 한줄기 선이 우리와 작품 사이를 엄격하게 갈라놓는다. 토템을 만지는 순간, 관람자는 미술 감상에 동반되는 접촉금기를 위반한 야만인이 되어버리고, 토템은 이미 더럽혀진 것이 되어버린다.
순수시각성이라는 신화의 해체
미디어아트 이론가 에르키 후타모(Erkki Huhtamo)는 자신의 글 『쌍방향-접촉-회귀: 예술, 상호작용성, 촉각성에 대한 미디어 고고학적 접근』을 통해 미술은 시각적인 것이라는 인식과 달리 1950년 이래 역사적으로 다양한 미술작업이 시각예술에 한정되기를 거부하고 접촉 금기를 깨부숴나가려는 시도를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는 자신의 글에서 19세기에 형성된 ‘물러서 있을 때’ 진정한 미적체험이 가능하다는 시각 중심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이데올로기가 형성된 과정을 설명하며, 특히 박물관이라는 근대적 문화기관이 미술작품을 만질 수 없는 것으로 변모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는 박물관과 백화점의 유사성을 비교하며, 두 근대적 문화공간이 매혹적인 윈도우 디스플레이 시스템을 기반으로 ‘닿을 수 없음’을 통해 예술작품, 혹은 상품의 가치를 더욱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기능함을 역설한다.
후타모의 글은 두 가지 지점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첫 번째는 바로 미술은 태초부터 만질 수 없는 성스러운 존재가 아니었다는 고고학적 진실을 깨닫게 하는 점이고, 두 번째는 바로 미술 자체를 자본주의 체계 안으로 복속시키려는 근대적 문화가 미술작품에 대한 접촉 금기를 강화시켰다는 사실을 암시한다는 점이다. 후타모는 매체이론가 마셜 매클루언을 인용하며 미술에서 아직도 강력한 규범으로 작동하고 있는 근대적 시각중심주의를 지적하며 미술 속 촉각성과 상호작용성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이 글은 또 다른 인간의 감각체계인 후각이 미술계의 시각중심주의를 아주 강력한 방식으로 해체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보려고 한다.
황홀한 향신료의 감각
“나는 사람들이 눈으로 내 작품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모공으로 느끼기를, 모든 감각을 동원해 느끼기를 바란다.(I want people to see my sculpture through their pores, as well as their eyes, to feel it with all their senses.)”
_에르네스토 네토(Ernesto Neto)
브라질의 미술가 에르네스토 네토는 스타킹처럼 늘어나는 폴리머 패브릭에 향신료 등을 채워 넣는 독특한 조각 작업을 주로 선보인다. 중력에 의해 늘어지는 색색의 향신료가 담긴 유연하고 반투명한 패브릭은 마치 끈끈한 꿀이 천천히 떨어지는 듯한 모습인데, 전시장을 넓게 차지하는 거대한 작품의 크기는 관람자가 마치 현실이 아닌 공간에 도달한 것 같은 인상을 받게 한다. 그러나 네토의 작업에서 관람자에게 가장 먼저 전달되는 감각은 시각이 아니라 후각이다. 패브릭을 채운 후추, 강황, 큐민, 파프리카, 클로브, 호로파 등의 향신료는 작품이 눈에 보이기 전에 이미 관람자의 후각을 자극한다.
최대한 탈취상태를 유지하려하는 대부분의 전시공간과 달리 관람자는 네토의 작업이 전시되는 장소에 진입하자마자 매콤하고 알싸한 향신료의 향기에 압도된다. 빛으로 매개되는 시각정보는 화이트 큐브의 하얀 벽에 가로막혀 있을 때 절대 관람자에게 도달할 수 없지만, 후각정보는 다르다. 후각은 화이트 큐브의 벽을 무화시키고 작품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직접적인 접촉 상태로 바꾸어 놓는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미세한 향신료 가루가 화이트 큐브의 공기 속을 부유하고, 관람자는 그 공간에 진입하는 것만으로 후각을 통해 작품과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가깝게 접촉하는 것이다. 현재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미술관(Art Gallery of New South Wales)에서 네토의 작업을 전시하고 있는데, 미술관 전시장 입구에 향신료 알러지 경고문이 세워져있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다. 그 경고문이 암시하는 바는 명백하다. 우리가 전시장에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향신료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후각적인 자극은 시각적인 자극에 비해 훨씬 비자발적이다. 시각은 눈을 감거나 벽으로 금세 가로막히는 데 비해 후각은 그렇지 않다. 심지어 후각은 본질적으로 다른 신체 감각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 네토의 작업에서 향신료는 단순히 우리의 콧속만을 파고들지 않는다. 네토의 발언처럼, 공기 중에 떠다니는 미세한 향신료 가루들은 우리 피부 위에 내려앉고 우리의 눈을 조금 간질거리게 만들며 자동적으로 매콤한 커리의 맛을 느끼도록 만든다. 네토의 작업을 감상하며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은 작품을 돌아보는 동안 각각의 향신료 주머니와 접한 거리에 따라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향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큐민이 담긴 패브릭 기둥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칠리가 담긴 기둥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클로브 가루가 떨어진 흔적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모두 다른 향의 조화를 만들어내고 있어서 저절로 작품을 주위를 빙빙 돌면서 향기의 길을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조각의 오래된 욕망, 공간의 예술로 감상되기를 바라는 그 욕망이 후각적 자극을 통해서도 표출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르네상스 조각이 ‘피구라 세르펜티나타’라고 하는 뱀처럼 소용돌이치는 형상을 통해 전방위의 조각 관람을 유도했다면, 네토의 작업은 거리에 따라 달라지는 향의 조합을 통해 자연스럽게 관람자의 신체를 작품 주위로 맴돌게 만든다. 시각적 스펙터클이 점점 더 화려해지며 시각을 제외한 신체 감각을 무감하고 납작하게 만드는 작업이 범람하는 최근의 미술 경향 속에서 네토의 작업은 후각이라는 지금까지 비교적 미술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감각을 이용해 관람자의 감각적 경험을 극대화하며, 동시에 ‘닿을 수 없음’의 신화를 해체한다. 후각은 냄새 분자로 전달된다는 그 성질 덕에 작품의 아우라와 물리적 실체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관람자와 작품의 접촉을 가능하게 만든다. 어쩌면 후각적 경험을 이용하는 작품은 촉각을 매개로 사용하는 작업보다 더 능숙한 방식으로 미술의 시각중심주의와 ‘닿을 수 없음’의 신화를 뛰어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각 중심주의의 해체는 동시대 미술의 중요한 쟁점 중 하나로, 지금까지 많은 미술작품을 통해 그 경계가 점점 허물어지고 있다. 이번 아티클은 그 방식 중의 하나로 후각을 사용하는 에르네스토 네토의 작업을 소개해 보았다. 시각성은 근본적으로 일정한 거리를 전제하며,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의 위계를 상정한다. 이에 대한 비판은 많은 시각예술 이론가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어 왔다. 그리고 이에 대한 보완으로 다른 신체감각에 대한 미술의 관심은 점점 더 확장되고 있다. 이는 단순히 미술 자체가 더 다양해지고 더 많은 가능성을 향해 나아간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변화일 뿐 아니라 지금까지 시각성을 가장 높은 위계로 상정하는 근대적 이데올로기 자체를, 특히 시각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미술이 전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닿을 수 없고 관음할 수는 있음’이라는 토템적인 시각의 권력관계는 지금까지 사회에 잔존하는 모든 근대적인 사고방식에 녹아들어 있다. 이를 예술이 전복하는 모습을 보며 관람자가 아직도 사회에 남아있는 ‘닿을 수 없음’의 금기를 넘어설 수 있는 자유를 느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