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고, 나쁜 여자는 ‘홍콩’에 간다”
_<비치온더비치> 영화 리뷰 중
<연애빠진 로맨스>로 정가영 표 발칙한 로맨스를 선보이며 대중에게 눈도장을 찍은 정가영. 사실 태초부터 그녀의 세계에는 연애, 섹스, 그리고 ‘수작 거는 정가영’이 있었습니다. 감독 본인이 직접 본명 ’가영‘으로 출연하여 전 남자 친구에게 “한 번만 자자”고 들이대고, 당황하는 남자에게 “안 잡아먹는다”고 응수합니다. 솔직함을 넘어 ‘발랑 까진’ 정가영의 대사에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능동적으로 욕망하는 한국 여성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오늘은 거추장스러운 도덕 따위는 던져 버리고 성적 욕망과 실천을 숨기지 않는 정가영의 이야기 3편을 들여다봅시다.
정가영의 페르소나 = 정가영
“정가영의 페르소나 정가영을 좋아하세요”
_허남웅(씨네21), <밤치기> 한줄평
정가영의 영화에서 정가영은 자신의 페르소나로 자신을 연기합니다. 만약 주인공이 ‘가영’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면, 각본, 연출, 연기까지 정가영이 도맡습니다. 가영은 가영의 몸을 통해 가영의 이야기를 하면서 영화는 매우 사적이면서 보편적인 이야기로 확대됩니다. (설령 예산이나 섭외 문제였더라도) 내밀한 이야기를 본인이 직접 꺼내놓음으로써 한국 여성 전반의 경험과 공감을 자아내는 소재로 탈바꿈하는 영리한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죠.
솔직하고 저돌적으로 고백하는 영화 속 가영 모두 정가영 그 자체입니다. 한 인터뷰에서 정가영은 초등학생 때부터 학교에 남자가 있으니까 학교를 갔고, 반마다 좋아하는 애가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고백하면 당황하는 상대의 얼굴을 보며 희열을 느꼈다고 하죠.
심지어 사랑하지 않더라도, <조인성을 좋아하세요>의 정가영처럼 ‘고백’ 은 이어집니다. 아직 보여줄 시나리오조차 없지만 조인성을 캐스팅하고 싶은 정가영은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조인성을 캐스팅할 수 있을지 알아봅니다. 영화 끝에는 핸드폰 너머의 조인성의 음성이 들리면서 그의 고백은 현실에서도 영화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주죠. 동시에 조인성의 전화가 실제 조인성인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정가영 유니버스에 있는 여러 가영의 고백은 어쩌면 판타지일지도 모릅니다.
어릴 때부터 사랑에 매료되었다는 정가영. 사람은 사랑에 빠졌을 때 가장 살아있는 존재인 것처럼, 정가영 영화에서 연애하고 고백하고 까이는 정가영은 영화 속 인물들 중에서 가장 약동하고 주체적인 캐릭터입니다. 이제 마음껏 사랑하고 욕망하는 정가영을 만나봅시다.
들이대는 가영
<비치온더비치>
평화로운 오후, 느닷없이 누군가 벨을 누릅니다. 전 남자 친구 정훈의 집에 들이닥친 가영은 “한 번만 자자”고 조릅니다. 빨리 집에 가라는 정훈의 말에 아랑곳 하지 않고 침대에 눕고, 왜 옛날에 자신을 급하게 ‘정복’하지 않았냐 서운해합니다. 정훈의 핸드폰에 뜨는 가영의 이름이 ‘받지마’인 것을 보면 이렇게 들이댄 게 처음은 아닌 듯합니다. 사실 가영은 정훈에게 처음 다가갈 때부터 남달랐습니다. ‘호감이 있어서 지켜봐 왔다’, ‘밥 한번 먹자’와 같은 흔한 플러팅 대신, “널 갖고 싶다”고 고백했으니까요.
노골적으로 욕망을 표현하는 가영의 말이 신선하게 들리는 가장 큰 이유는 지금까지 봐 왔던 수많은 로맨틱 코미디 연애 공식에 있습니다. 흔히 접했던 19금 로맨스 영화의 여자 주인공과 달리 가영은 엉뚱해 보이는 말간 얼굴과 작은 몸으로 능글맞게 들이대고, 구질구질하게 까입니다. 그에 반해 남자 주인공은 대체로 조신하고, 대시에 쩔쩔매며, 유혹에 방어적입니다. 적극적으로 욕망하는 가영에 의해 로맨틱 코미디의 남성 중심적 문법이 가볍게 뒤집히는 것인데요. 관객은 실소를 터뜨리며 낯섦과 왠지 모를 불편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자신 또한 기존의 연애 서사와 미디어에서 그리는 ’야한 여성상‘을 내면화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한국 사회가 여성에게 부과하는 불합리한 윤리는 갖다 버린 채, 일상적으로 금기시한 여성의 성적 욕망을 필터 없이 뱉어버리는 가영의 행동이 반가운 까닭입니다. 더불어 홍상수 감독의 <해변의 여인>을 패러디한 듯한 제목인 ‘B*tch on the beach’로 정가영식 위트에 방점을 찍습니다.
차이는 가영
<내가 어때섷ㅎㅎ>
<내가 어때섷ㅎㅎ>는 4년가량 만난 애인 있는 남자를 꾀려는 여자의 일화를 담은 13분가량의 정가영 주연 단편 영화입니다. 여기에서도 역시 남자 주인공 ‘수장’은 거부하지만, 가영은 끈질기게 자신과 자자고 설득합니다. 가영한테 남자들이 넘어가는 이유가 “편하고 쉬워서”라는 수장의 면박에도 가영은 “이게 제 매력”이라고 지지 않고 받아치는 식이죠. 영화를 끝까지 보면 소소한 반전을 만나게 되는데요. 어딘가 공허하고 수치스러워 보이는 가영과 머쓱한 제목까지 정가영식 유머가 가득 들어 있는 작품입니다.
<내가 어때섷ㅎㅎ>의 수장, <비치온더비치>의 정훈, <밤치기> 진혁 등 정가영의 유혹을 받는 남자들은 여자 친구가 있거나 유부남입니다. 이는 정가영이 윤리적인 딜레마를 갖고 노는 방식입니다. 감독의 말을 빌리면, ‘별거 아닌 걸로도 졸지에 수렁으로 빠져버리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것인데요. 이렇게 관객은 자연스럽게 반대의 상황을 상상하게 되죠. 만약 다가가는 사람이 남자라면, 여자는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그리고 남자의 곁에 여자친구나 유부남이 없었더라면, 여자의 저돌적인 대시에 남자는 끝까지 거부했을까요? 어쩌면 정가영은 관계가 시작되는 건 마음이 아니라 고백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밀어내는 가영
<극장 미림>
<극장 미림>은 승기와 ‘썸’을 타는 자영이 극장 데이트를 하며 자신의 이상한 징크스에 관해 고백하는 단편 영화입니다. 바로 자신이랑 잔 사람들은 다 슬럼프에 빠진다는 것인데요. 장편 데뷔를 앞둔 승기는 가영과의 관계를 고민하고, 만남을 이어나가지 않게 됩니다.
<극장 미림>은 가영이 출연한 영화 중 유일하게 남자 주인공과의 관계를 밀어내는 영화입니다. 그렇다면, 남자 주인공을 다시 보게 되죠. 승기는 가영이 들이댄 무수한 남자들과는 달리, 그다지 귀여워 보이지도 매력적으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승기의 장편 데뷔는 처참히 망했습니다. 여기에서 가영이 말한 ‘징크스’는 승기가 마음에 들지 않은 가영의 귀여운 속임수였을 것을 암시하는데요. 이를 통해 정가영은 애정 관계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발현하는 여성을 보여주며, 매력 있는 상대와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럽다는 것을 귀엽고 위트있게 이야기합니다. 무엇보다 정가영의 세계에서 여성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마음에 주인이 되는 존재입니다.
미니멀한 서사와 화면, 일상적인 공간과 술자리에서 나누는 성적 농담으로 정가영에게는 ‘여자 홍상수’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가영의 영화에는 그 이상의 특별함이 존재합니다. 두 번째 만난 남자에게 성적 농담을 아무렇지 않게 건네는 여자, 비참해질 정도로 구애하는 여자, 자기 마음을 자기가 알고 행동하는 여자가 생동하죠. 가영이 거절당하든, 거절당하지 않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욕망을 말하는 자가 주도권을 가져가니까요. 무엇보다 정가영의 영화는 진짜 재밌습니다.
- <밤치기>, <비치 온 더 비치>를 연출한 정가영의 욕망, GQ, 2019.03.11
- 진실하고 밝은 눈으로, vogue, 2019.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