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동안 찍은
고라니의 얼굴

고라니 초상 사진집
『이름보다 오래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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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무언가에 대해 ‘안다’고 말할 때, 얼마만큼 알아야 자신있게 ‘안다’고 하시나요? ‘앎’이라는 감각은 때로 무섭습니다. 무언가를 안다고 느끼는 순간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서서히 멈춰버리니까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고라니’에 대해 아시나요? 어떤 분은 ‘야!’ 하는 특이한 울음소리를 떠올리셨을 겁니다. 또 어떤 분은 로드킬을 떠올리셨겠지요. 이렇게 바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으니 우리는 아마 고라니에 대해 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고라니와 노루의 생김새를 구분할 수 있나요? 얼굴은 어떤 대상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특질 중 하나임에도 이름으로는 너무나 익숙한 고라니의 얼굴은 떠올리기가 퍽 어렵습니다. 우리 한번 고라니와 안면을 터볼까요. 오늘은 고라니들의 얼굴을 마치 졸업사진처럼 정면에서 담아낸 초상 사진집 『이름보다 오래된』을 소개합니다.


왜 하필 고라니였을까?

『이름보다 오래된』 고라니
이미지 출처: 가망서사 인스타그램

『이름보다 오래된』의 저자이자 사진작가 문선희는 어느 날 우연히 구불구불한 산길에서 사슴을 마주칩니다. “노루였어? 아니면 고라니?” 사슴이 달아난 이후 당황한 작가에게 누군가 물어보고, 작가는 그제야 노루와 고라니가 무엇이 다른지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죠. 백과사전을 뒤져보며 그때 만난 존재는 노루가 아닌 고라니였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때의 강렬했던 기억을 곱씹던 작가는 고라니 서식지부터 야생동물구조센터, 국립생태원을 전방위적으로 누빕니다. 수많은 고라니를 가만히 응시하던 중 천천히 깨닫게 되죠. 같은 고라니라고 하더라도 생김새와 성격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요. 작가는 그들의 서로 다른 생김새를 고라니와 독자가 눈을 마주치게 되는 정면 구도를 통해 보여줍니다.

『이름보다 오래된』 고라니
이미지 출처: 가망서사 인스타그램

초상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다 보면 귀의 크기나 모양, 얼굴의 폭, 목의 굵기 등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인간의 얼굴이 모두 다른 것처럼요. 저와 당신이 오늘 한 일이, 먹은 음식이, 흘려보낸 상념이 모두 달랐을 것처럼 사진 속 고라니들 또한 오늘 하루 밟아온 길이, 들었을 소리가, 마주한 풍경이 서로 달랐을 것이라는, 당연하지만 그간 염두에 두지 못했던 엄연한 사실을 떠올리게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고라니는 매우 익숙합니다. 특유의 울음소리가 미디어에서 웃음 포인트로 그려지기도 하고, 도로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킥보드 운전자들을 고라니에 빗대어 ‘킥라니’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흔한 고라니입니다. 그렇다면 고라니의 실제 삶은 어떠할까요?


우리 곁의 ‘진짜’ 고라니들

많은 분이 ‘고라니’ 하면 가장 먼저 로드킬을 떠올리실 겁니다. 저 또한 차에 치인 고라니를 실제로 본 적이 있습니다. 사람만한 크기의 갈색 생명체가 노란색 중앙분리선에 몸을 걸친 채 쓰러져있던 모습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기억에 새겨져 있는데요. 『이름보다 오래된』에 의하면 최근 5년간 고속도로에서 일어난 동물 교통사고 중 무려 86%가 고라니 사고입니다. 그리고 전체 로드킬 사고의 41%가 고라니가 독립하는 시기인 5~6월, 딱 요즘 같은 시기에 발생하죠.

고라니를 죽이는 것은 자동차뿐만이 아닙니다. 사람, 더욱 엄밀히 말하면 사람이 겨눈 총구가 매년 약 25만 마리의 고라니를 죽입니다. 고라니는 농작물에 피해를 준다는 이유로 ‘유해야생동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에 지자체는 봄마다 ‘피해방지단’ 등의 이름으로 사냥꾼들을 조직해 고라니 사냥을 ‘장려’하고 있는데요. 사냥 덕분에 실제로 농작물 피해가 줄었을까요? 고라니에 의한 농작물 피해액은 2011년 약 22억에서 2014년 23억, 2018년 약 26억으로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에 반해 포획한 고라니 수는 2011년 약 2만 마리에서 2014년 6만 마리, 2018년 17만 마리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지요.

고라니
이미지 출처: 가망서사 인스타그램

어떤 존재와 공존하려는 노력 없이 배제하는 방식을 택할 때, 우리는 그것을 ‘차별’이라고 부릅니다. 마치 시끄럽다는 이유로 어린이를 못 들어오게 막아버리는 노키즈존처럼 말이지요. 야생동물과 더불어 살아보려는 노력 없이 죽이는 방식을 택한 것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애초에 고라니가 농작물에 피해를 준다는 발상 자체가 인간 중심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라니가 원래 살던 곳에 인간이 들어와 논과 밭을, 도로를 만든 것이니까요. 그들은 태곳적부터 DNA에 새겨진 행동 양상에 따라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인간이 ‘고라니’라고 이름 붙이기 전부터 존재했던, ‘이름보다 오래된’ 생명이니까요.


이름을 붙여주는 일

『이름보다 오래된』의 작가 문선희는 야생동물구조센터와 국립생태원에서 만난 고라니들에게 한 마리 한 마리 이름을 붙여줍니다. ‘고라니’라는 보통명사가 아닌, 각각의 고유함이 가득 담긴 이름을 말이죠. 코끝에 작은 혹이 붙은 아이는 ‘땅콩이’입니다. 유독 겁이 많아 늘 살금살금 걸었던 아이는 ‘허둥이’이고요.

워낙 경계심이 많은 동물인 고라니를 정면에서 포착하기 위해 작가는 고라니와 친밀감을 형성하는 데 오랜 시간을 들입니다. 고라니를 놀라게 할까봐 플래시를 터뜨리는 것도 포기합니다. 오직 자연광의 힘에 기대야 했기에 50여 점의 고라니 사진을 얻는 데 꼬박 10년이 걸리죠. 『이름보다 오래된』에는 그렇게 완성한 초상과 함께, 작가가 실제로 고라니들과 살을 맞대며 탄생한 에피소드가 가득 담겨있습니다.

『이름보다 오래된』의 작가 문선희
이미지 출처: 가망서사 인스타그램

『이름보다 오래된』 구매 페이지
INSTAGRAM : @gamang_narrative


이름은 중의적입니다. 살면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단어이지만 정작 그 이름으로 불리게 될 존재의 의지는 전혀 개입되지 않았죠. 그리하여 부르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름을 가진 인물의 실제 정체성보다는 이름을 부여한 이들의 의도가 더욱 친숙합니다. 또 한편으로 이름은 소중한 존재에게만 붙여주는 것입니다. 이름을 붙여줌으로써 그 존재는 나에게 더 이상 세상 그 무엇과도 같지 않은 유일함이 되지요.

고라니는 이름이 있지만 이름이 없는 존재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고라니’는 그저 인간이 식별하기 위해 붙여둔 명칭일 뿐, 실제 그 이름으로 불리게 될 각각의 존재별 개성은 모두 누락되어 있죠. 우리 곁에 그런 존재가 비단 고라니뿐일까요. 소도, 돼지도, 닭도, 알바생도, 아줌마와 이모도, 비행 청소년과 장애인도 모두 이름이 있지만 이름이 없습니다.

이 사진집 속의 존재들이 인간이 붙여둔 이름을 벗어던지고 오직 그 자체로서 독자와 눈을 맞추는 시간은 그래서 뜻깊습니다. 우리에게는 종종 다른 존재의 내면을, 그 심연을 헤아려볼 기회가 부족하니까요. 그 기회를 계속해서 만들어주는 것이 예술의 역할일 겁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은 우리의 과제일 테고요. 모든 존재의 고유함이 당연하게 존중받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글을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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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재

파주출판단지 노동자
무해한 삶을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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