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7일, 넷플릭스에서 <더 에이트 쇼>가 공개됐다. 캐스팅 배우나 설정 등이 거론되며 흥행은 보장되어 있다는 기대감이 컸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논란이 일었다. <오징어 게임>과의 유사성이 문제였다. 금전적 위기, 궁핍한 처지로 인해 궁지로 내몰린 사람들이 의문의 초대장을 받고 게임에 참가한다는 이야기의 얼개가 도마에 올랐다.
한때 신드롬을 일으킨 작품의 구조를 모를 리 없는 다수의 관객을 향해 ‘얼마든지 비교해도 좋다’는 자신감이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유사 작품이 아니라도 연상되는 또 다른 대상이 있다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를 더한다. 캐릭터들이 수행하는 게임의 형식 중 ‘한 처벌자가 눈을 가리고 처벌의 대상을 우연에 맡기는 장면’은 영화 <킬링 디어>를, 계급 구조가 형성된 상황 속에서 착취자가 피착취자들을 고문하기 위해 ‘잠들지 않도록 고안한 장치’는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를 참조했다는 인상을 진하게 남긴다. 표절에 해당하지는 않을까? 혹은 감독이 취한 고도의 계획이었을까? 작품에 영감을 준 선행 작품을 많이 알면 알수록 발견할 수 있는 흥미 요소가 많아지는 일종의 패러디 기법이랄까. 의도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이 작품을 계기로 다시 한번 생각한다. 문화예술계에서 영원히 돌고 도는 논쟁인 자유로운 창작 활동과 표절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모티브, 레퍼런스, 오마주
창작에 활용되는 모티브, 레퍼런스, 오마주는 표절 논란이 생길 때 ‘해명’의 언어로 자주 등장한다. 그만큼 해석하기 나름의 개념이기도 하기에 우선 세 용어의 미묘한 차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모티브(motive)는 어떤 행동에 대한 동기나 원인으로, 예술 작품을 표현함에 있어서 원동력이 되는 작가의 중심 사상을 이른다. 창작 동기의 형태는 사물이나 가시적인 대상이 되기도, 체험 혹은 사건, 주제나 소재, 앞서 탄생한 창작물로부터의 영감이 되기도 한다. 미술, 문학, 음악, 영화 등 적용되는 분야에 따른 구체적 쓰임은 조금씩 다를 수 있으나 작품의 출발점이라는 것만큼은 다름없다. 함께 혼용되는 모티프(motif)는 엄밀히 따지면 작품의 중심적인 내용 단위인데 ‘영웅’, ‘팜므파탈’, ‘스파이’, ‘삼각관계’, ‘시간 여행’ 등이 예가 된다. 특정한 역할을 완수하는 인물이나 비슷한 사건과 같이 창작물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구성 화소라고 보면 된다. 모티프는 시대나 사회적 조건에 영향을 받곤 한다.
레퍼런스(reference)는 참고, 조사, 언급을 뜻한다. 연구논문의 작성을 위해 참고한 문헌을 표시하는 학술계 용어로 널리 쓰인다. 예술 영역에서는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기 위해 수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의 기준이 되는 셈이다. 또는 다른 작품, 인물 등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거나 인용하는 것 역시 이에 해당한다. 시각적, 청각적 요소를 간접적으로 활용하고 주제나 테마를 변형하는 방식으로도 나타난다. 레퍼런스는 관객에게 익숙한 요소를 녹여 작품을 폭넓게 받아들이게 한다.
프랑스어로 경의, 존경을 뜻하는 오마주(hommage)는 영화계에서 비롯했다. 특정 작품이나 감독, 작가의 스타일을 가져오면서 선보이는 헌사다. 원작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표시하면서 창작자가 원작의 영향력을 공표하는 작업이다. 오마주로 기능하는 경우는 세월이 인정한 거장의 작품이나 오래된 작품을 대상으로 하게 된다. 일례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들은 오마주의 교과서처럼 여겨지는데, 영화란 영화는 다 섭렵했다고 알려질 만큼 영화광으로 유명한 그가 선행 영화를 승화하는 일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특히 영화 <킬 빌> 시리즈는 여러 고전 무협 영화와 감독에 대한 경의를 담으며 재해석되었다.
작품 소비 방식이 변화시킨
표절 공론화 형식
모티브, 레퍼런스, 오마주는 건강한 창작 과정에서 얼마든지 활용될 수 있지만 용인할 만한 수준을 따지는 잣대가 모호해 논란이 빚어진다. 최근에 흥미로운 경향은 이런 창작 조건이나 기법들이 ‘과연 표절로 이어지는지’ 공론화되는 형식에도 변화가 찾아왔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대부분 같은 창작자 간 문제제기로 드러났다. 이미 형성된 표절 시비 화두가 대중에게 알려지는 탑다운(Top-down)의 방향을 보였다면, 이제는 대중의 예리한 포착이 이슈를 키우는 보텀업(Bottom-up) 방향으로 전개된다.
작품 소비 방식의 다변화가 이끈 결과로 보인다. 원작과 논란 대상에 대한 접근성이 어느 때보다 광범위해졌다. 그뿐만 아니라 창작자와 소비자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상황 속에서 수용자는 능동적으로 자신만의 모티브나 레퍼런스를 찾아 나서기도 한다. 적극성이 창작물 간 연결고리를 기민하게 짚어내도록 하는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이 콘텐츠가 되고 누구나 콘텐츠 생산자가 되는 시대에 표절은 더욱 민감한 사안이 될 수밖에 없다.
수용자에 의해
좌우되는 경향
점차 창작자와 동화되는 수용자의 역할은, 나아가 수많은 창작물 사이에서 상관성을 찾으며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2차 생산물 양식에서 구체화되기도 한다. 이는 표절의 쟁점화를 보다 특수하게 한다.
소프트웨어, 영화, 비디오 게임, 웹사이트 등 다양한 미디어에서 숨겨진 기능이나 메시지를 의미하는 ‘이스터에그(easter egg)’를 찾듯 레퍼런스나 오마주 찾기가 하나의 콘텐츠가 된다. 그리고 이스터에그가 다양한 의도와 특징을 가지지만 그 자체로 종종 대중문화나 다른 작품에 대한 참조를 포함해 의미 찾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실제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에는 다양한 80년대 팝 문화 요소들을 이스터에그로 녹여 당시를 지나온 관객들에게 향수와 문화 공감대를 불러일으켰고 여러 해석 가능성을 제시하는 일은 놀이가 됐다.
한편 고전 뮤지컬 영화의 계보를 잇고자 의도했던 영화 <라라랜드>에서 <사랑은 비를 타고> 속 명장면이나 뮤지컬 영화 흥행기에 흔했던 화면 구성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했다. 뮤지컬 영화의 매력과 속성을 알고 있는 팬들은 자연스러운 연상 작용에 젖어들며 환호했다. 또 호러 영화 속 이미지가 미술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탄생함에, 관객들은 특정 작품을 선택한 감독의 생각을 따져보는 작업을 마다하지 않는다.
다만 다양한 창작물을 바라보는 자세도 뜯어보면 불분명할 때가 있다. 사용된 레퍼런스, 오마주 등을 작품 이해에 풍부함을 더하는 대단한 발견으로 읽을 것인지, 안일한 방편으로 만들어진 부당 창작물에 의혹을 제기할 것인지는 ‘한 끗 차이’로 벌어지기도 한다. 사실 표절은 도덕적 개념에 가깝기 때문이다.
정의로움과
지나친 의혹 사이
윤리적으로 봤을 때 창작자가 다른 사람의 작품을 모방하거나 복제하려는 의도가 있었는지 살피게 되지만 한 주체의 의중을 단정 짓기는 어렵다.
표절이라는 비판을 넘어 저작권법 위반이라는 법적 관점까지 접근하면 판단은 훨씬 복잡해진다. 저작권 위반을 따질 때는 두 작품 간의 실질적 유사성을 비교하는데, 유사성의 범주에서 주제나 아이디어는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다시 말해 저작권법은 아이디어나 개념 자체가 아닌, 이를 표현한 구체적인 표현, 대사, 캐릭터, 줄거리 전개, 시각적 요소 등이 얼마나 비슷한지를 따지며 방법적 측면을 보호한다. 저작권이라는 독점적 권리를 부여하는 저작권법의 특성상, 아이디어로 보호 범위를 지나치게 확장하면 오히려 창작 활동을 저해할 수 있다는 이유다.a) 그 외 저작권 위반을 주장하는 측은 피고가 원작에 접근할 수 있었음을 입증해야 한다.
시대를 앞서간 예술가들은 모방이 예술의 한 속성임을 간파한 바 있다. “세상에 오리지널은 없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적절한 참조의 정도를 넘어서서 분명 건강한 예술 생태계를 위협하는 행위를 무시할 수는 없다. ‘다른 사람의 저작물의 일부 또는 전부를 몰래 따다 씀’이라는 표절의 사전적 의미가 시사하듯 표절에서 떳떳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편은 원작자의 동의를 구하는 절차가 전제되는 것일 터. 인간이 공유하는 사상, 경험과 감정을 풀어내는 보편성을 인정하면서도, 박수받는 창작 활동과 표절을 가르는 독창성은 무엇으로 정의되어야 할지 물음은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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