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드라마, 연극·뮤지컬 팬이라면 한번쯤 눈여겨봤을 작가가 있습니다. 색색깔의 종이를 오려 붙여 작품을 재해석하는 종이조각가 최숙경입니다. 그는 영화 <헤어질 결심> 팬아트 공모전에서 박찬욱 감독의 찬사를 받았고, 뮤지컬 <스핏파이어 그릴>의 포스터를 도맡을 만큼 문화예술계에서 주목받고 있습니다. 특히 인물을 세심하게 본 딴 인형 조각물은 배우나 가수 팬들 사이 인기있는 선물로 자리잡은지 오래죠.
그럼에도 최숙경 작가는 늘 미스터리였습니다. 처음 보는 형태의 예술을 어떻게, 어디서, 왜 만들게 된 건지 궁금했지만 쉽게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직접 호기심을 해소하기로 했습니다.
생소한 조형 예술, 종이조각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종이조각가로 활동하고 있는 최숙경이라고 합니다.
종이조각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페이퍼 아트, 말 그대로 종이로 하는 예술입니다. 해외에선 페이퍼 스컵쳐(paper sculpture)라 부르고 있고요. 커팅을 하거나 양감을 주는 등 그 안에서도 다양한 방식이 있습니다.
한국에선 흔치 않은 장르였을 것 같은데, 어떻게 알고 시작하게 되셨을까요?
어릴 때부터 종이와 친숙했어요. 저희 어머니가 손으로 만드는 걸 워낙 좋아하셨거든요. 초등학교 졸업식 땐 꽃을 접어서 종이꽃다발을 만들어 주실 정도였어요. 지금은 인사동에서 전통공예 공방을 하시고요. 또래보다 일찍 취업해서 심적인 여유가 없었을 때, 마침 영화나 뮤지컬에 빠지게 됐었어요. 이 작품의 감상을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은데 눈에 들어 온 소재가 종이였죠. 늘 주위에 있었으니까요. 전통 문양을 자르는 엄마의 방식을 수입지로만 변형해서 시작했었어요.
안 그래도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어머님 공방 얘기가 자주 나와서 궁금했었어요.
평범한 주부에서 독학으로 여기까지 일구신 분이니까 정말 대단하죠. 그래서 그런지 저도 무언가 호기심이 생기면 어디에 가서 배운다기 보단 우선 혼자 부딪혀 보는 것 같아요. 가끔 엄마 피를 물려 받아 이렇게 종이로 흘러가는가보다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혼합,
작업 방식
작업 과정은 어떻게 되시나요?
작품을 보고 제 방식대로 해석하는 시간을 가진 뒤 시안을 만들어요. 일러스트레이터 툴로 스케치하는데 이때 가장 많은 시간이 할애되죠. 디자인이 완성되면 출력한 도면을 따라 원하는 종이를 커팅해요. 그 조각들을 배치하고 다시 사진으로 찍는 것까지가 전체적인 과정이에요. 작업실은 그냥 제 방 책상이고요.
실사 크기를 잡는 것도 힘들 것 같아요.
도안은 원하는 사이즈대로 출력할 수 있으니까 어렵지 않아요. 다만 양감 표현엔 사이즈가 중요하죠. 크기에 따라 아예 다른 작업이 되거든요. 제가 평소 쓰는 종이는 A4나 A3 사이즈일 때 딱 적절한 볼륨감을 줄 수 있는데, 너비가 커지면 손으로 주름 잡기가 어려워져요. 그럼 도구를 써야 하는데 또 손으로 하는 것과 차이가 있거든요. 종이의 두께도 중요해요. 두꺼운 종이는 구기면 주름이 되지만 더 얇은 건 그냥 구겨지기만 해요.
손맛이 중요하군요. 기계로는 대체가 힘들까요?
섬세하지 못해요. 손으로 하던 디테일한 도안을 커팅 기계에 넣으면 종이가 찢어지죠. 그래서 대량 생산이 힘들어요. 영화 <캐롤> 각본집 표지를 작업할 때도 그게 문제였어요. 더 정밀하고 화려한 수제 원본을 담고 싶었는데 기계 커팅엔 한계가 있어 결국 도안을 단순하게 타협한 뒤 인쇄했어요.
물리적인 어려움이 꽤 많네요.
왜 우리나라엔 종이조각가 수가 늘지 않고 아직 비주류에 머물러 있을까 생각했어요. 쉽게 접근하기가 어렵더라고요. 장시간 붙들고 있어야 하는데 그만큼 성과가 나지 못하죠. 또 칼이라는 도구의 위험성이 있기도 하고요. 쓱쓱 오리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팔에 힘이 엄청 들어가요. 승모근이 장난 아니에요.
하지만 아날로그만큼 디지털 도구도 필수적인 것 같아요.
손을 쓰는 과정이 즐거워서 하는 작업이지만 여러 분야와 접목하려면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디지털화가 되어야 되더라고요. 사진이든, 영상이든, 인쇄든, 실물을 그대로 쓰기는 아무래도 어렵죠. 그런데 오히려 사람들은 종이라고 설명하기 전까지 거의 다 디지털인 줄 알아요. 여러 툴로 대체할 수 있는 시대니까 그래픽 효과를 줬다고 생각하더라고요.
촬영을 빼놓을 수 없죠. 사진인데도 종이의 재질과 입체감이 온전히 느껴져서 신기했어요.
납작한 종이인데 양감도 느껴져야 하고 재질도 다양하니까 보통 촬영하기 어려워하시더라고요. 근데 저는 그냥 방에서 스탠드 하나 켜놓거나 집 옥상에서 자연광으로 찍어요. 제일 잘 나오는 각도를 저만 딱 아는 거죠.
영상·공연예술과의 협업
영화·드라마, 연극·뮤지컬계에서 특히 러브콜을 많이 받으시잖아요. 포스터, 표지, 굿즈, 광고처럼 형태도 다양하고요. 어떻게 의뢰받으시는지도 궁금해요.
사실 순서가 좀 바뀌었어요. 제가 먼저 어필한 거나 다름없죠. 그냥 작품을 보고 느낀 감상을 종이조각으로 해서 SNS에 올렸는데, 그걸 관계자분들이 지켜봐오신 거예요. 미팅을 가면 ‘저희 사실 트친(트위터 친구)인 거 아세요?’라는 말도 많이 받아요.
트위터에서도 상당히 유명하시죠.
나는 SNS가 없었으면 정말 안 됐을 사람이다 싶기도 해요. 대부분의 작업이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을 보고 연락 주셔서 이뤄지거든요. 제 첫 책도 그렇게 출간 할 수 있었고요. 사실 저는 어디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영업하는 것엔 큰 능력이 없어요. 그래서 나 혼자 만든 걸 내 맘대로 풀어놓은 건데 그걸 좋게 봐주신 분들이 계셨던 거죠.
덕후들이 벅차서 주절주절대는 후기가 작가님한텐 종이조각이었던 거군요.
맞아요. 새로운 형태의 리뷰죠. 그래서 처음엔 내한하신 감독님들 드릴 기념품 정도로 의뢰 주셨다가 점차 본격적인 협업을 제안해 주셨어요. 다행히 저도 제가 좋아할 만한 작품들이 많이 들어왔고요.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 하나만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역시 <캐롤> 각본집 표지인 것 같아요. 영화 작업이 처음이기도 했고 성덕(성공한 덕후)의 표본이기도 했고요. 작품 속 음악과 소품, 모든 게 다 취향이라 한동안 파묻혀 살았었는데 그 표지를 제가 한다고 하니 감개무량했어요. 해외 컨펌도 받아야 됐던 터라 겁이 많이 났었죠. 거의 맨날 울었어요. 다행히 해외 제작사에서도 좋은 반응이 돌아왔어요. 너무 아름답다고, 직접 받아보고 싶다고 하시길래 아예 종이조각 실물 액자까지 보내드렸죠. 그 회사 대표님 사무실에 걸려 는 인증샷까지 올려주셨는데 정말 덕후의 ‘그것’이었어요. 이렇게 애정을 쏟은 마음이 진짜로 닿을 수 있을까 했는데 정말로 가닿은 게요.
최근 근황도 말해볼까요? 이전과 달리 뮤지컬 무대에 투입됐다고 하셔서 놀랐었어요.
올해 2월에 초연한 뮤지컬 <이솝이야기>의 무대 디자인 작업에 참여했어요. 이번엔 제 조각을 영상화하는 형식이었는데요. 종이는 소모되는 재질이라 무대 위에 직접 올리긴 어려우니 디지털로 변환했어요. 간단한 모션이 들어간 종이조각 영상을 무대 바닥에 프로젝터로 쏴주면 그게 세트가 되는 거죠.
작품 스타일의 변화
오랜 팬으로서 작가님을 지켜 보면서 점점 작품의 연대기가 보이더라고요. 초반엔 빛과 그림자가 두드러졌었죠.
평소 방에 불을 잘 안 키고 살 거든요. 약간 어두운 조도에 있는 걸 좋아하는데, 커팅된 흰 종이가 노란 조명에 비췄을 때 너무 예쁘고 평화로운 거예요. 빛이 종이에 투과되면서 뿜어지듯 새어나오는데 이 시너지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컬러는 빛이 투과되지 않고 그냥 그림자만 생기니까 무지색 종이를 주로 썼었죠. 빛의 투과와 그림자의 실루엣이 많이 달라요.
그러다 과감하고 강렬한 색을 사용하기 시작하셨었죠.
단색만 쓰니 표현이 단일할 때도 있더라고요. 또 색을 보여줘야 하는 작품들이 있잖아요. 예를 들면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은 컬러풀한 젤리가 튀어 나오는 재미를 줘야 하니까 색지로 팝하게 만들었죠.
한창 근육 움직임을 연구하실 때도 있었고요.
김연경 선수부터 안산 선수까지 올림픽에 미쳐있을 때였거든요. 뒤이어 슬램덩크에도 빠졌었고요. 종이로 근육 표현이 가능할까 싶었는데 어떻게 만지다 보니 되더라고요. 이것도 특정 각도에서 조명을 잘 비추면 근육이 확 살아나요. 그럴 때 뿌듯함을 느끼죠.
그럼 앞으로의 방향성은 무엇일까요?
이야기를 넣어서 또 다른 형태의 종이조각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사실 지금까진 원작에서 영감을 받아 표현했기 때문에 완전한 나의 작품이라 말하기엔 자신이 없거든요. 오랜 시간을 두고 있지만 내가 직접 이야기의 주체가 되어서 끌고 가보고 싶어요.
생소하지만 꾸준한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반이 부족해 모든 걸 혼자 해결하다 종내엔 스스로 장르를 개척하곤 합니다. 이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늘 같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언가 보장되거나 확실하지 않은 상태로도 노력할 수 있었던 비결은 결국 사소한 즐거움과 너그러운 애정이라는 것. 최숙경 작가의 작품이 사실은 하나의 거대한 ‘덕질 감상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웃음이 지어졌던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