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문화적 영향력이 커졌습니다. 팝의 근간이 된 블루스, 재즈, 힙합 등이 강제 이주된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부터 피어났다면, 이젠 본토 아프리카 대륙의 음악이 전 세계에 공격적으로 진출하고 있습니다. 특히 필자가 작년 같은 소재를 다룰 때만 해도 한국에선 인지도가 적었던 아프로팝이 최근엔 르세라핌이나 TXT 등 케이팝에도 자주 차용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죠. 엄연히 주목받는 트렌드로 자리잡았습니다.
아프로팝을 주류로 끌어 올린 인물을 떠올리라면 지금은 이 뮤지션을 꼽을 수밖에 없습니다. 엉덩이를 트월킹하는 ‘Water’ 챌린지로 숏폼을 장악하고 세계적 히트를 친 남아공 가수, 타일라입니다. 곧 첫 내한을 앞두고 있는 그녀의 커리어를 면밀히 살펴봅니다.
타일라 (Tyla)
본명 타일라 로라 시탈(Tyla Laura Seethal),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자란 2002년생입니다. 고등학교 재학 중 인스타그램에 꾸준히 올린 음악 커버 영상이 관계자 눈에 띄어 캐스팅됐습니다. 막 학년 주말 내내 스튜디오에 출근하며 녹음을 했고, 2019년 첫 데뷔 싱글 ‘Getting Late’를 발표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뮤비는 2021년에야 공개되며 다소 난항을 겪었으나 그녀의 스타성은 한눈에 튀었습니다. 곧바로 소니 뮤직 산하 에픽 레코드와 계약하며 미국 진출의 문이 열리는데요. 당시 광산 공학을 공부하던 그녀는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혔고, 눈물겨운 설득을 통해 딱 1년의 대학 휴학을 얻어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메가히트곡 ‘Water’
그렇게 미국으로 건너간 타일라는 2023년 몇 편의 싱글과 콜라보로 감을 잡고, 수많은 아프리칸 뮤지션을 이끌어준 팝 스타 크리스 브라운의 투어 오프닝 무대에도 서며 대중에게 얼굴을 익힙니다. 그리고 그해 여름, 메가히트곡 ‘Water’를 방출해 버리죠.
‘Water’는 신선함과 화끈함을 최대치로 응축한 도파민 덩어리였습니다. 성적 흥분을 직설적으로 기대하는 가사에 맞춰 엉덩이를 강조한 남아공 춤 ‘바카디(Barcadi)’를 췄고, 심지어 등에 생수를 들이 부으며 과감한 퍼포먼스를 선보였습니다. 등줄기를 따라 흘러내린 물이 시각적인 자극을 더했죠. 이 쿨하고 섹시한 춤은 빠르게 바이럴을 탔고 숏폼 챌린지를 통해 무한히 퍼져 나갔습니다.
늘 서구권 문화예술에 영감을 주며 ‘참조’의 대상으로만 남았던 아프리카가 본연의 오리지널리티로 이만큼의 인기를 얻은 건 이례적이었습니다. 다소 보수적인 한국에서도 이 챌린지를 본 따 걸그룹의 트월킹 안무가 나올 정도였으니 그 영향력을 쉽게 체감할 수 있죠.
최초의 그래미를 거머쥐다
가장 유의미한 성과는 기록이었습니다. 2024년 신설된 그래미 어워즈 ‘베스트 아프리칸 뮤직 퍼포먼스’ 부문의 첫 수상자로 타일라가 호명되었는데요. 아프리카 음악이 북미의 공식적인 인정을 받기 시작했고, 그 영광스런 주인공의 자리를 타낸 셈입니다. 역사적이죠.
아프로비츠 vs. 아마피아노
특히 이 수상 결과엔 지역적인 의외성도 있었습니다. 서아프리카와 남아공인데요. 2020년대 아프로팝을 급부상 시키고 기반을 다진 장르 ‘아프로비츠(Afrobeats)’는 서아프리카의 열연이었습니다. 요루바나 이그보 같은 전통 문화에 서구의 힙합과 알앤비를 결합한 것이 특징이죠. 이젠 이국적이라 말하기도 어려울 만큼 하나의 메이저 장르가 된 상태입니다.
이 대세를 이어 받아 남아공에선 ‘아마피아노(Amapiano)’를 외부로 유행시킵니다. 아프로비츠와 비슷해 보이지만 탄생 배경에 차이가 있는데요. 아프로비츠의 시작이 ‘아프로비트(Afrobeat)’였다면, 아마피아노의 유래는 ‘콰이토(Kwaito)’입니다. 콰이토는 남아공의 유색 분리 정책 아파르트헤이트로 인해 격리되고 고립된 흑인 커뮤니티가 즐겼던 내부 음악입니다. DJ 중심이기 때문에 딥 하우스, 신시사이저, 재즈, 소울, 라운지를 재료로 하죠. 남아공 출신인 타일라 또한 이 색채를 물려받은 자신의 음악을 아마피아노라 표현하곤 합니다.
다시 돌아와, 타일라와 함께 그래미 후보에 올랐던 이들은 모두 서아프리카 나이지리아 출신이었습니다. 버나 보이(Burna Boy), 올라미데(Olamide), 아사케(Asake), 다비도(Davido), 아이라 스타(Ayra Starr) 모두 아프로비츠를 통해 아프로팝을 알린 뛰어난 실력의 뮤지션이었죠. 그렇기에 먼저 포문을 열었던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샛별처럼 떠오른 남아공의 신인이 상을 차지한 것은 꽤나 흥미로운 결과였습니다. 거대한 아프리카 대륙, 비슷한 아프로팝이라 해도 지역에 따라 이런 미세한 구분이 가능해지는 것이죠.
거품이 아님을 증명 중
원 히트 원더로 끝나진 않을까 했던 염려도 잠시, 뒤이어 발매한 첫 데뷔 앨범 <TYLA> 또한 안정적으로 순항 중입니다. 미국의 음악 비평 웹진 피치포크(Pitchpork)에서 10점 만점에 8점이란 높은 평점을 줬고, 롤링 스톤(Rolling Stone)를 포함한 각종 음악 전문지에서도 찬사를 보냈습니다. 매혹적인 보컬이 두드러지는 ‘Truth or Dare’와 ‘ART’, 야성적이고 쿨한 무드의 ‘Jump’ 등은 숏폼의 고수답게 소셜 미디어에도 큰 인기를 자랑했죠.
뛰어난 춤 실력도 한몫했습니다. 아프리카 특유의 리듬감을 체화한 움직임이 눈길을 사로잡았는데요. 의류 브랜드 ‘GAP’과의 댄스 비디오 광고에서도 전문 댄서에 버금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호평을 얻었습니다. 끼도 많고 재능도 넘치지만, 그만큼 노력해 기회를 놓치지 않는 열정적인 뮤지션. 야망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 당찬 신인입니다.
‘미국’의 ‘셀러브리티’
그래미라는 타이틀을 등에 업자 ‘셀럽’으로서의 위치도 훨씬 더 견고해졌습니다. 수상 몇 달 후, 뉴욕의 패션 행사 ‘멧 갈라(Met Gala)’에 참석해 주목을 끌었는데요. ‘잠자는 숲속의 미녀: 시간의 정원’이란 컨셉을 모래시계로 재해석해 실제 모래로 만들어진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습니다. 간결한 우아함과 조각상처럼 완벽한 굴곡으로 헐리우드 스타와의 치열한 경쟁에서도 존재감을 발휘했습니다. 그녀의 스타성을 입증하고 미국 셀러브리티로서 안착했다는 인상을 준 행보였죠.
타일라는 ‘진짜 흑인’일까?
인종 정체성 논란
급격히 치솟은 유명세만큼 비판과 논란도 자연스레 따라왔습니다. 가장 화두가 되는 건 그녀의 ‘인종 정체성’입니다. 타일라는 인도, 줄루(남아프리카 토착 원주민 부족), 모리셔스, 아일랜드 혈통을 가진 혼혈입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블랙(black)’이 아닌 ‘컬러드(coloured)’라 지칭하곤 하는데요.
BBC에서 이를 ‘문화 전쟁(culture war)’이라 부를 정도로 큰 논쟁이 되었습니다. 남아공에선 ‘컬러드(coloured)’가 다인종 혼혈인 집단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이지만, 미국의 ‘컬러드(colored)’는 짐 크로법이 흑백 분리를 위해 사용하던 매우 인종차별적 단어였기 때문이죠.
미국 시장에 진출하면서도 스스로를 ‘컬러드’라 정체화한 타일라에 미국 흑인(아프리카계 미국인)은 분노하고 비난했습니다. 심지어 지난 6월, 한 인터뷰에선 “컬러드라는 당신의 정체성 말이에요. 대체 무슨 뜻이죠?”라는 무례한 질문을 받기도 했는데요. 이에 타일라는 불쾌감을 드러내며 침묵으로 답했습니다.
이후 타일라는 X(구 트위터)에 직접 입장을 밝혔습니다. “인종은 다양한 곳에서 다양하게 분류됩니다. 저는 컬러드라는 단어가 남아공 바깥에선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잘 알고 있어요. 이 표현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분들에겐 제가 컬러드라고 정의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남아공의 컬러드인 동시에 블랙 여성이에요.”
지역 차이에서 비롯된 오해처럼만 보이지만 차별의 역사가 짙은 아프리칸에겐 인종 문제가 무엇보다 예민하기에 앞으로도 이 쟁점은 계속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과한 자기대상화에 대한 우려
지나친 자기대상화도 뜨거운 감자입니다. ‘Water’의 가사가 매우 선정적이고 노골적인데 성적 함의가 강한 춤 트월킹까지 더해져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는 것인데요. 흑인 여성 뮤지션들이 과도한 노출과 섹스어필에 집중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기에 나오는 우려의 목소리입니다.
특히 멧 갈라에선 몸을 꽉 죄는 드레스 탓에 부축을 받아 움직이는 장면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자력으로 움직이지도 못할 만큼 불편한 의상, 인형처럼 달랑 들려 이동되는 모습이 기괴하다는 의견이었죠. 육감적인 몸매와 빼어난 외모도 좋지만, 충분히 뛰어난 실력까지 지닌 여가수가 자신의 섹슈얼리즘을 너무 과하게 이용하는 게 아니냐는 염려 섞인 비판도 뒤따르고 있습니다.
타일라를 보면 왜인지 리한나가 떠오르곤 합니다. 비북미 출신인 아프리칸 여가수가 독보적인 끼와 재능으로 데뷔하자마자 인기를 터트리며, 음악과 패션 부문에서 모두 무시 못 할 셀러브리티로 거듭난 게 말이죠. 자신을 기리는 국경일이 있을 만큼 바베이도스의 영웅이 된 리한나처럼, 타일라 또한 남아공의 힘을 세계에 각인시킨 국가적인 인물이 된 것은 틀림없습니다.
가장 기쁜 건 현대 음악계에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긴, 활발한 궤도를 달리고 있는 팝 스타가 곧 한국을 방문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국적이고 다채로운 아프리카 문화를 통해 취향과 견문을 넓힐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열광시킨 ‘워터 챌린지’ 주인공에게, 여러분은 어떤 게 가장 기대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