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열린 ANTIEGG 콘텐츠 기획 회의에서는 새로운 기획 방식을 제안 받았다. 하나의 키워드로 에디터끼리 연속적인 글을 써보자는 시도였다. 첫 번째로 정해진 키워드는 ‘시작’. 필자는 이 키워드를 듣고 깊은 고뇌에 빠졌다. 이 방대하면서 풍요롭고, 또 그렇기 때문에 쉬이 접근할 수 없는 주제에서 의미 있는 논의를 끌어내려면 어떤 주제로 글을 쓰는 것이 좋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몇 날 며칠 시작이라는 단어를 굴리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결국 선택한 주제가 바로 ‘미술비평의 시작’이다. 나는 ANTIEGG 그레이 파트에서 서툴게 비평 아닌 비평을 써왔고, ANTIEGG가 스스로를 재정비하고 다시 새롭게 시작한 지금이 내가 써온 글에 대해서 뒤돌아보고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도록 마음을 다잡는데 적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미술비평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돌아보는 일은 비평가뿐 아니라 비평을 수용하는 모두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미술비평이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지를 살핌으로 미술비평이 지금까지 수행해 온 사회적 기능을 더욱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술비평이 우리에게 제공해 온 기능들을 재고함으로 이를 ‘비평적 관점’으로 수용하고, 더 나은 비평을 요구할 수 있게 된다.
요즈음 미술비평에는 상당히 부정적인 꼬리표가 줄줄이 달린 것처럼 보인다. “어려운 단어들을 나열함으로 미술 감상을 더 어렵게 만든다.”, “지나치게 권위적이고 냉소적이다.” “디지털미디어 시대에 비평은 시대착오적이다.” 등등. 이러한 인식이 그저 편견일 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최근에 존경하는 한 비평가에게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이제는 사람들이 긴 글을 원하지 않아서, 짧고 가벼운 감상을 써보려 한다. 그게 사람들을 전시장으로 이끄는 더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 새로운 시류에 과감하게 도전하고, 더 나은 효용과 소통을 위해 집필하는 글의 종류를 바꾸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들에게 진심으로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여전히 긴 호흡의 날카로운, 어떨 때는 조금 난해하기도 한 미술비평을 사랑하고, 그러한 비평이 반드시 우리 사회와 미술 자체를 위해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으로서 오늘은 대중을 위한 근대적 미술비평의 시작을 살펴봄으로 미술비평에 덧씌워진 부정적인 인식을 조금이나마 덜어보려 한다.
근대적 미술비평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미술작품에 대해 감상을 남기고 작품을 감식하는 방법에 대해 논하는 것을 미술비평이라고 정의한다면, 미술비평의 역사는 상당히 길다. 기원전 3세기 고대 그리스에서는 제노크라테스가 조각과 회화에 대한 비평을 남겼고, 당대(唐代)에는 장언원이 회화에 대한 『역대명화기』라는 주요한 저술을 남겼다. 그러나 소수의 특권층이 아니라 대중을 겨냥한 근대적 미술비평은 인쇄술이 발달하며 대중 독자가 탄생한 18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물론 근대적 미술비평의 시작은 각 지역별로 시차가 존재하고, 어떤 비평을 ‘근대적 비평’으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문적 의견이 존재한다. 그러나 비평의 공공적 성격을 기준으로 근대적 비평을 정의한다면, 우리는 근대적 비평의 시효를 18세기 유포된 익명의 비평 소책자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세기 유럽에서는 미술 작품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공공 전시가 등장하며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이러한 시류에 발맞추어 다양한 전시 비평 소책자와 인쇄물이 다수 배포된다. 이 시기 등장한 비평의 특징은 바로 비평가가 단순히 소수의 특권층을 위해 작품에 대한 감상과 작품을 감식하는 방법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을 상대로 작품의 사회적 의의와 문화적 역할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가장 이른 시기 근대적 미술 비평을 남긴 것으로 알려진라 퐁 드 셍 옌 (Etienne La Font de Saint-Yenne)은 1747년 『프랑스 회화의 현 상황에 관한 고찰 Reflexions sur quelques causes de l’etat present de la peinture en France』이라는 방대한 길이의 비평을 익명으로 출간한다. 그는 미술가들로 구성된 폐쇄적인 집단인 프랑스 왕립미술원에 의해 독점되어 오던 미술비평을 비판하며, 대중의 관점에서 미술비평이 서술되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한다. 그는 이전까지 대부분 살롱에 전시된 작품을 칭송하고 작품의 내용을 묘사하는데 주안점을 둔 비평과 달리, 위정자들의 취향을 반영하는 장식적인 로코코 화풍을 추구하는 당대 프랑스 화단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던진다.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샤를 보들레르 역시 마찬가지로 19세기 미술에 대한 날카로운 의견을 담은 비평을 다수 발표한다. 특히 보들레르는 『현대 생활의 화가 Le Peintre de la vie moderne』에서 새롭게 등장한 모더니티와 당대 미술의 관계를 면밀하게 논하며 사회적 변화가 당대 미술에도 변화를 불러옴을 지적한다. 그는 자신의 글을 루브르 박물관에서 대가들의 그림만을 감상하고, 동시대의 풍속을 그린 작품은 무시하고 지나치는 당대인들의 세태를 비판하며 시작한다. 미술비평의 주제가 단순히 작품만이 아닌, 관람자의 수용방식으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근대기 공공 전시가 등장하고 대중 독자가 형성되며 미술과 미술비평을 수용하는 주체가 폭넓어짐에 따라 미술비평은 작품 자체를 면밀하게 분석하는데 그치지 않고, 당대 사회와 작품의 관계를 논하고 관람자의 관점에서 글을 서술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근대적 미술비평’은 미술감상이 과거와 달리 더 많은 사람들에게 허용됨에 따라, 미술과 대중, 미술과 사회를 잇고, 미술이 소수에 의해 독점되고 해석되온 것에 저항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다.
동시대 미술비평:
담론들의 각축장
그렇다면 지금의 미술비평은 과연 어떨까. 동시대 미술비평 역시 미술과 대중을 잇고, 미술과 사회를 잇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모두가 다른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 같고, 나 역시도 하나의 입장을 명확하게 고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이번 아티클에 한해서는 동시대 미술비평과 그 난해함을 옹호하고자 한다.
많은 이들이 동시대 미술비평의 난해함에 불만을 표한다. 이는 비평을 읽는 사람들만의 불만이 아니다. 미술 비평가들 역시 동시대 미술비평의 난해함에 꾸준히 이의를 제기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동시대 미술비평이 상당히 까다로운 이론을 비평의 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정신분석학,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 탈식민주의, 매체이론 등 이름만 열거해도 머리가 아파지는 다양한 이론들이 동시대 미술을 해석하는 틀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복잡한 이론들은 비평을 읽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기 위해서, 혹은 비평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서 비평에 이용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이론들은 세계를 읽는 다양한 방식을 제시해 왔고,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오랜 질서에 파열을 일으킨 중요한 열쇠들이다. 근대적 미술비평이 미술을 서술해 온 소수 권위자의 질서에 이의를 제기한 것처럼, 동시대 미술비평은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는 데 실마리를 제공하는 다양한 이론을 미술의 장 안으로 끌어들임으로, 미술작품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공한다.
특히 20세기 모더니즘 미술을 서술하는 가장 주도적인 방식이 형식주의 비평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았을 때, 이러한 담론들이 미술비평에 제공하는 기능의 긍정적인 측면이 두드러진다. 형식주의 비평은 작품을 작품 내부의 형식에 한정해 평가하려 한다. 이는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미술작품을 읽는 방법을 제시하고, 작품을 연대기적으로 배열하는 양식(style) 위주의 미술사 서술을 가능하게 하지만, 동시에 작품을 작품이 만들어지고 수용되는 사회와 분리하고 만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진다. 본격적으로 미술비평에서 담론을 사용하기 시작한 1970년대 전까지 미술비평의 주류는 이러한 형식주의 비평이었고, 때문에 미술비평은 초기의 근대적 미술비평이 추구하던 사회와 미술의 결합에서 점점 멀어져 ‘비평을 위한 비평’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이후의 미술이 기존의 모더니즘 미술과 결별하고, 당대 다양한 지적 시류와 공명하기 시작하자 비평 역시 변화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미술 비평은 다양한 담론을 흡수, 스스로가 담론의 각축장이 되기를 자처했다. 이는 또 다른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미술 비평을 서술하는 해석하는 방식이 다양한 이론적 배경을 갖게 되며, 미술 작품의 질을 결정하는 하나의 기준이 있다는 믿음이 폐기된 것이다. 우리는 이제 각자의 해석을 들고 미술비평이라는 아레나에서 진검승부를 벌인다.
최근 운이 좋게도 동시대 한국 미술계에서 자신만의 작업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는 젊은 예술가와 비평가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그들과 길게 이야기를 나누고 작품을 함께 감상하면서, 어떠한 시대정신이 우리를 관통하고 있음을 느꼈다. 작품을 만드는 이들은 모두 예술과 나의 삶이 어떻게 유리되지 않을 수 있을지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한국이라는 사회의 젊은 일원으로, 하루하루 내가 벌이는 투쟁을 어떻게 자신의 예술에 담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었고, 비평을 쓰는 이들은 예술가의 투쟁의 결과로 탄생한 작업을 어떻게 잘 해석하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인지를 진심으로 숙고하고 있었다. 미술비평의 의의와 역할을 여기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미술가는 자신의 작품으로 세계 속의 자신과 자신의 보는 세계를 구축해 나간다. 그리고 비평은 그들의 구축한 세계를 자신이 보기에 가장 정직한 관점으로 이해하고 해석해 이를 대중에게 전달한다. 미술과 사회를 잇는 작은 바느질 한 땀. 이는 근대적 미술비평의 시작이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유효한 미술비평의 역할이다.
- 테리 바렛, 『미술 비평』, 아트북스, 2021.
- 전동호, 「근대 유럽의 공공전시와 미술비평의 등장: 18세기 프랑스와 영국의 사례」,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