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에 관한 글을 쓰고, 일을 하는 필자에게 미술이란 오래된 친구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모든 것엔 시작이 있듯, 가까운 미술과도 처음 만난 순간이 있었습니다. 미술 수업 시간에 만난 크리스토 자바체프와 잔 클로드는 이제까지 알던 세계를 뒤흔들 정도로 커다란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도심 속 건물이나 자연 한가운데 놓인 섬을 천으로 감싸 ‘포장’합니다. 거대한 건축물과 자연을 어떻게 천으로 뒤덮겠다는 도발적인 생각을 했을까요? 정부와 각 단체에 허가를 받기 위해 수십 년에 이르는 시간 공을 들이고, 수천만 달러에 이르는 비용과 수많은 인력이 투입되는 대규모 작업이었습니다. 대체 왜 이렇게 독특한 작업을 했을까요? 필자가 예술의 의미를 생각해 보며 깊이 빠져들게 했던 크리스토 자바체프와 잔 클로드를 소개합니다.
사물을 포장하는 예술가
크리스토 자바체프(Christo Javacheff)는 불가리아, 잔 클로드(Jeanne-Claude) 모로코 출신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만나 부부의 연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동반자이자 예술적 고민과 이상을 나누는 동료로서 그들은 함께 했습니다.
파리에서 크리스토는 요셉 보이스, 백남준 등 아방가르드 작가와 교류하며 주어진 틀과 관습을 깨는 예술에 영향을 받습니다. 일상 속에서 자주 사용하는 사물을 소재로 택한 후, 사물의 기능은 보이지 않도록 과감히 포장하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초창기에 작가는 페인트 통이나 유리 병 같은 주위 사물을 천과 끈으로 감싸 포장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쉽사리 풀리지 않도록 끈으로 거듭 포장된 사물은 본래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익숙한 대상이 낯설게 느껴지고, 사물마다 지닌 역할과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합니다.
도심 속 건축물을 감싼 작업
작은 크기의 사물로 시작했던 실험은 점차 규모가 확대되어 공간을 포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대표적으로 파리의 퐁네프 다리를 포장했습니다. 부드러운 노을빛의 천으로 감싸인 퐁네프 다리는 파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시간을 선사했습니다. 작품이라고 해서 고귀한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선을 긋거나, 일상을 함부로 침범하지 않았습니다. 작품은 다리 위 교통을 방해하지 않도록 설계되었고, 보행자는 천 위를 직접 걸을 수 있어 지나가는 누구나 그들의 작품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가까이에서 바라보고, 만져보고, 걸어볼 수 있었던 특별한 이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11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작업을 구상하는 것부터 자금을 마련하고, 파리 시, 센 강청, 국무부에 허가를 구하고, 실제 포장하기까지 많은 준비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이러한 대규모 프로젝트를 그 누구의 후원도 받지 않고 완성했습니다. 후원하는 이의 간섭 없이 예술가가 처음 그린 그림대로 작품을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작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린 드로잉과 콜라주, 초창기 작품을 판매해 자금을 마련했습니다. 예술가로서의 굳은 심지, 스스로 작품에 대한 믿음과 책임감이 느껴지는 모습이었습니다.
많은 비용과 노력이 깃든 작품의 전시 기간은 단 2주였습니다. 대체 왜 이렇게 빨리 해체하고 만 걸까요? 흔히 예술 작품 하면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으로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누군가가 소장하는 취미 생활로만 느껴지곤 합니다. 그런데 과연 예술은 특정한 누군가가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일까요? 소유한다면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요? 크리스토와 잔 클로드는 예술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자연을 포장할 수 있을까?
크리스토와 잔 클로드는 다리, 분수대, 탑과 같은 도시의 랜드마크부터 국회의사당, 미술관 같은 사회와 개인의 삶을 상징하는 건축물을 포장했습니다. 나아가 그들은 인공의 건축물을 포장하는 것에서 자연 그대로를 포장하는 것으로 작업의 범위를 확장시켰습니다.
바다 위 섬을 인간의 손으로 포장하는 게 가능할까요? 통제할 수 없는 바다에 놓인 공간이라는 점에서 상상하기도 어려운 질문으로 들립니다. 하지만 크리스토와 잔 클로드는 마이애미의 섬 11개를 포장하는 놀라운 작업을 완성시켰습니다. 섬의 둘레를 따라 11.3km에 이르는 분홍빛 길이 탄생했습니다. 푸른 바다의 색과 대조되는 길은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의 열대 식물, 자연 경관과 어우러지며 독특한 풍경을 이뤘습니다.
자연에 사람의 손길이 가닿기 이전에, 그들은 환경적인 문제를 고려했습니다. 준비 단계부터 해양 생물학자, 조류학자, 변호사 등 전문가와 협업하며 생태계에 미칠 영향을 최소화했습니다. 잔해물을 철저히 수거해 운반하고 적절한 방법으로 처리했습니다. 작품 활동이 환경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민하는 예술가의 모습이었습니다.
대자연 한가운데 커튼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미국 콜로라도의 산비탈에 천을 설치한 <Valley Curtain>입니다. 325번 고속도로를 지나는 차들은 선명한 오렌지빛으로 거대한 자연에 새로운 풍경을 더한 커튼을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이 놀라운 커튼 작품은 380m가 넘는 규모로 압도적입니다.
평평한 일반적인 땅이 아닌 가파른 경사면, 계곡을 둘러 설치된 커튼이 팽팽하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완성되었다니, 놀랍지 않은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Valley Curtain>은 설치 후 28시간 만에 강한 폭풍이 불어와 해체 작업이 진행됩니다. 자연의 지형을 인간의 힘으로 이해하고 감싸려던 노력이 결국 자연에 의해 끝을 맞았다는 점이 아이러니합니다.
평범한 우리가
예술을 경험하는 순간
작년 겨울 크리스토와 잔 클로드의 전시가 열린다는 소식에 도쿄로 향했습니다. 그들의 마지막 작품인 파리 개선문을 포장한 <L’Arc de Triomphe, Wrapped> 작업을 기록한 전시였습니다. 살아서 꼭 그들의 작품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싶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2009년 잔 클로드에 이어 2020년 크리스토가 세상을 떠났기에 끝내 꿈을 이루진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작업물과 기록으로라도 손길을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랑하는 그들의 작업을 종이와 영상, 모형을 통해서나마 경험할 수 있다는 데 설렜습니다. 그런데 긴 전시를 관람하며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것은 두 예술가의 이야기나 스케치가 아니었습니다. 프로젝트 매니저로, 건설 노동자로, 보안관으로, 다양한 이름으로 도시와 자연을 함께 포장한 사람들의 인터뷰에 발길을 멈춰 서곤 말았습니다.
예술 작품은 특별한 누군가,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작가의 손에서만 탄생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크리스토와 잔 클로드의 작품에선 거대한 대상을 포장하기 위해 다양한 직업과 배경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예술에 참여합니다. 한평생 예술과 가까웠던 적이 없던 사람도 작업을 하며 예술을 경험하고 직접 작품이 완성되는 데 기여하는 예술가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크리스토와 잔 클로드의 작품으로 같은 기억을 공유합니다. 처음 만난 낯선 이들은 어린 시절 뉴욕의 센트럴파크를 가득 채웠던 주홍색 문들을 바라보고 걸어갔던 공통의 기억이 있음을 알게 되기도 합니다. 인터뷰를 보면서 이들의 작품에 그토록 깊이 빠져든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크리스토와 잔 클로드는 엄숙한 미술관, 흰색의 벽면에 가지런히 걸린 그림만이 예술의 전부가 아님을 알려주었습니다. 일상에서 누구나 손쉽게 만날 수 있고, 매일 걷던 길을 새로이 보이게 하는 예술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작품을 통해 작업을 위해 시간을 쏟은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완성된 모습을 함께 경험하는 우리 모두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INSTAGRAM : @christojeanneclaude
갓 중학생이 되었을 즈음 만났던 크리스토와 잔 클로드는 미술에 깊이 빠지는 시작이 되어주었습니다. 예술이란 무엇일지, 어디부터 어디까지 예술이라 말할 수 있을지, 끝이 없는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즐거움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여전히 예술을 정의 내리긴 어렵습니다. 무엇이 좋은 예술일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만한 답을 내는 건 영원히 불가능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크리스토와 잔 클로드가 도시의 공간과 자연을 포장하며 들려준 이야기는 예술의 의미를 고민하는 이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작품의 의미보다 가격과 투자 가치에 대한 논의가 점점 더 많아지는 때에 작품을 함부로 소유하거나 영원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그들의 이야기는 유효합니다. 예술이란 아무나 다가설 수 없는 고상한 무언가라 말하는 대신, 뒤돌아보면 같은 기억을 공유하게 하는, 일상에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 전합니다. 예술을 사랑하고 우리의 삶과 예술이 조화롭게 함께하길 바란다면 이들의 작품을 만나보세요.
- Christo and Jeanne-Claude 공식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