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초입에서 지나온 반년을 돌아봅니다. 매일 뜨는 해를 모아 열두 달로 나누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가도 새해가 되면 괜스레 새로운 마음을 먹게 됩니다. 그런데 연초에 세웠던 계획을 돌아보면 머쓱해지는 것은 새로운 시작 앞에서 들뜨는 마음만큼이나 낯설지 않죠. 금방이라도 활활 타오를 것 같던 창작의 불씨는 왜 책상 앞에만 앉으면 정처 없어지는 걸까요? 지금으로썬 도저히 보이지 않고 심지어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결과물을 향해 떼는 발걸음은 늘 무겁습니다. 그런데도 찾아오는 일상의 영감은 또다시 새로운 시작을 열망하게 합니다. 지나간 반년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잡념은 잠시 내려두고, 우리보다 앞서 길을 걸었던 작가의 말 속에서 다시 한번 시작을 마주해보면 어떨까요? 영감과 실천의 깜깜한 틈 사이에서 꺼질 듯한 마음을 다시 달뜨게 해줄 문장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살아 있는 것이
그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살아 있는 것은 변화합니다. 무럭무럭 자라 어른이 되는 아이, 형태를 갖추어가는 아이디어, 한창 성장 중인 조직. 우리가 그런 것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그것이 매우 대단해서라기보다 생명력을 가지고 변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그의 책에서 살아 있음에 끌리는 것이 ‘삶을 사랑하는 능력’에서 비롯한다고 말합니다. 생명의 역동성을 알아보고 그 가치에 끌리는 사람은 삶을 사랑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이 변화한다는 사실은 마치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해서 우리는 종종 그것을 잊어버립니다. 특별한 시간은 그 사실을 다시 일깨워주기도 합니다. 새해나 매월 1일, 이른 오전처럼 시작에 가까운 시간은 우리가 가진 생명의 가능성을 크게 보이도록 만듭니다. 그 시간 자체에 특별함이 있기보단 시간이 만든 시작과 끝이라는 개념이 평평해 보였던 삶에 리듬을 주며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시작을 앞두고 들뜨는 마음은 대단한 성취를 향한 열망에 앞서 내 안의 가능성을 다시 마주 보는 것, 즉 삶을 사랑하는 능력을 회복하는 일과 맞닿아 있습니다. 성장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삶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을 엿보며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말을 떠올립니다. “아름답게 변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변하기 때문에 아름답다.”
내 안의 이야기를 표현할
목소리를 갖게 되던 순간
처음의 기억은 강렬합니다. 모든 처음 이후에 자신의 세계가 그 이전과는 전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동화책 작가 이수지는 자신의 에세이에서 회화 전공자였던 그녀가 북아트를 접하고 치열한 탐구 끝에 자신만의 작품 언어를 찾아낸 순간을 기쁘게 회상합니다. 무수한 시도와 거절,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것을 쫓는 외로움 속에서 그녀는 기어이 표현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꼭 맞는 자신만의 목소리를 획득합니다. 그 이후로 이어지는 작품 세계는 말 그대로 새로운 장입니다. 던져진 세상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낸 작가는 거침없이 자신의 작품 세계를 걸어 나갑니다.
거의 모든 시작의 순간에 그 결과를 미리 알기란 어렵습니다. 불확실성은 시작을 두렵고 불안하게 느끼게 합니다. 하지만 확실한 길은 지금의 내가 이미 아는 곳으로 이어져 있을 뿐입니다. 보이지 않던 미래는 시작에 섰을 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멋진 세계로 우리를 데려가기도 합니다. 시작의 막연함 속에서 이미 지나온 무수한 처음을 떠올립니다. 그땐 우리가 어디에 있을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어디로 이어질지 모를 이 길에서 단지 더 넓은 세계를 예감합니다.
그저 살기만 할 수가 없어서
홀로 고립된 채 안개 낀 문장 속에서 헤매다 보면 문득 떠오르는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왜 글을 쓰고 있을까?’ 고민해 봐도 좀처럼 그럴듯한 대답은 생각나지 않고 왜인지 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순간이 떠오릅니다. 패티 스미스는 이 익숙한 수수께끼를 추적하다 ‘그저 살기만 할 수가 없어서.’라고 대답합니다.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이고 작가이기도 한 패티 스미스의 작품은 모두 그녀의 삶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녀는 일상의 영감을 기민하게 낚아 작품에 담아냅니다. 예술로 가득 찬 그녀의 삶은 우연한 발견을 운명으로 뒤바꾼 결과입니다. 삶에 대한 몰입이 그녀의 삶을 예술 그 자체로 바꾼 것입니다.
모든 시작에서 몰입의 순간을 엿봅니다. 작가는 삶에 몰입했을 때 발견할 수 있는 창작의 씨앗을 작품으로 피워냅니다. 마음이 동해 무언가를 만들어 본 적이 있다면 삶의 무언가를 깊이 응시하고 시간을 잊을 것처럼 그것을 표현하는 순간이 낯설지 않을 겁니다. 흐르는 시간도 자신의 존재도 잊은 채 몰두하는 몰입의 시간에 우리는 삶의 깊숙한 곳에서 그저 자유롭습니다. 시작을 위해 필요한 것은 오늘의 분주함이나 더 많은 시간보다 삶을 향한 더 나은 몰입일 수 있습니다.
지난 반년을 돌아보던 고개를 앞으로 돌려 우리의 시작을 상상합니다. 여전히 발걸음은 무겁고 마음은 정처 없을 겁니다. 영감과 실천의 틈 사이에서 스스로를 자책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시작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가 삶을 사랑하고, 무수한 처음을 지나 이곳에 왔고, 더 내밀한 몰입의 순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세상은 점점 커질 겁니다. 여태 가보지 않은 길은 언제나 그렇듯 험하겠지만 때때로 우거진 숲을 보며 아름답다고 여길 수도 있을 겁니다. 이 글을 매개로 짧은 만남을 가진 당신이 걸어온 길에 애틋한 마음을, 얻어낸 것들에 박수를, 또 걸어갈 길에 지지의 눈빛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