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무엇을 원하는가

이미지의 삶과 죽음을 통해 보는
르포르타주 사진의 명과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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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와 사진을 아우르는
이미지의 세계

전쟁화가 폴 들라로슈는 1839년 프랑수와 아라고가 프랑스 학사원에서 사진의 발명을 공표한 날, 그 광경을 바라보며 유명한 말 한마디를 남긴다.

“오늘부터 회화는 죽었다.”

폴 들라로슈가 회화의 죽음을 선언한 것은 아마 그가 전쟁화가였기 때문이 아닐까? 실제로 20세기 이후 어떤 신문도 특종 사진을 1면에 싣지, 특종 ‘스케치’를 싣지 않는다. 회화는 죽지 않았으나, 적어도 뉴스와 저널리즘에서는 저 뒤로 밀려나 아마 뒤에서 3번째 장 정도 되는 ‘아트’ 섹션에 간신히 발을 붙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폴 들라로슈의 말에는 화가의 절망과 예언뿐 아니라, 어떤 아이러니가 숨어있다.

회화와 사진은 모두 이미지를 다룬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런데 이 이미지는 본질적으로 죽음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이미지의 어원인 라틴어 이마고(Imago)는 죽은 이의 얼굴을 밀랍으로 떠낸 것을 뜻한다. 결국 이미지는 항상 죽음 뒤에 남겨진 것이며 인간이 매 순간 펼쳐지는 죽음, 시간의 흐름에 저항해 남기고자 한 것이다. 포착된 순간은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회화로 그려진 순간도, 사진에 찍힌 순간도 모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이미지가 지시하는 모든 것은 죽어있다.

결국 회화는 죽었다는 들라로슈의 선고 역시 어찌 보면 비통한 탄식이 아닌, 당연한 사실을 읊조린 것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회화든 사진이든 그 위에 얹어진 이미지는 전부 죽음 이후에 탄생하는 불운한 유령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유령은 너무나도 강력해서 죽어도 죽지 않는, 죽음 이후의 삶을 살아간다. 이미지의 세계는 항상 죽은 것들이 다시 출몰하는 귀신 들린 세계다.


사진의 감정과
헤드라인의 논리

『퓰리처상 사진』의 서문에서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저널리즘 사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핼버스탬의 말은 사진의 본질을 꿰뚫는다. 사진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아마 비슷한 이유로 사진을 사랑할 것이다. 사진은, 이미지는 분명 우리에게 단숨에 강렬한 감정을 일깨운다. 역대 퓰리처상을 받은 사진을 모아둔 이 책을 찬찬히 들여다보다 보면, 책 하나가 내게 주는 강력한 감정과 무게에 항상 짓눌리고는 한다. 때로는 동정과 연민, 때로는 분노, 때로는 따뜻한 애정이 나를 감싸고, 속수무책으로 사진과 연결되는 감각을 느낀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도사리는 어떤 함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핼버스템의 말을 뒤집어보자.

글로 이루어진 헤드라인은 우리가 개별 사건들을 시간순으로 열거하게 만든다. 한국 전쟁이 일어나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제임스 메러디스가 언제 처음으로 미시시피 대학교에 입학했는지를 순서대로 생각하게 만든다. 이것을 우리는 보통 역사라고 부른다. 사진만큼 우리를 즉각적으로 매료시키는 데는 영 재주가 없을지라도, 글은 우리에게 개별 사건에 대해 논리적으로 곱씹을 ‘거리감’을 제공한다. 그리고 헤드라인은 분명하게 특정한 개별 사건을 지시한다. 개별 사건을 넘어서는 헤드라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2020년 5월 20일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사망한 조지 플로이드에 대한 기사를 죽 늘어놓고 읽는다면 어떨까. 마지막 판단은 결국 우리 각자의 몫이지만, 적어도 우리는 비극적인 사건을 둘러싼 맥락을 알게 될 것이고, 우리는 각자 어째서 수많은 사람들이 조지 플로이드를 기리기 위하여 거리로 뛰쳐나왔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얽히고 설킨 글과 이미지
그리고 저널리즘

이미지 출처: APimagesblog
이미지 출처: APimagesblog

이제 두 사진을 보자. 두 사진은 모두 퓰리처상을 받은 사진작가 에번 부치가 찍었다.

두 장의 사진이 우리에게 드러내는 것은 분개한 사람들과 불타는 거리, 그리고 빗속에서 팔을 높이 들고 시위하는 사람들뿐이다. 글과 다르게 이 두 사진을 연결하는 직접적인 논리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뒤에 있는 조지 플로이드 사건과 그를 둘러싼 ‘이야기들’을 읽어내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다른 자료가 필요하다.

글과 이미지는 결국 서로에게 없는 것을 채우는 방식으로 기능한다. 글이 우리 뒤에 남겨진 모든 죽은 순간들을 평평하게 얽어낸다면, 이미지는 그 속에 숨겨진 마술적인 힘을 통해 우리를 다시 그곳으로 데려간다.

물론, 우리를 감정적으로 동요하게 하고 죽은 순간으로 우리를 다시 데려간다고 해서 사진을 매도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나 역시 저널리즘 사진을 옹호하는 많은 사람들의 주장에 깊게 동감하며 글이 할 수 없는 일을 사진이 분명 해내고는 한다는 사실에 감명받고는 한다. 사진은 분명 많은 변화의 초석을 가져오고, 우리가 우리 자리에서는 볼 수 없는 지구 반대편의 참상을 보게 한다.

그러나 나는 사진은 사진이 지시하는 개별 사건과 별개로 (사진 속 사건은 찍힌 순간 이미 죽어있다) 또 죽어도 죽지 않는 이미지의 생태계 안에 놓여있다는 점 역시 지적하고 싶다.


역사적 중요성, 분명한 구도,
무시할 수 없는 긴장감.

이미지 출처: AP, Evan Vccci

아마 많은 사람들이 지난 7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피격 사건 보도를 통해 보았을 이 사진 역시 위의 두 사진과 마찬가지로 에번 부치가 찍은 사진이다. 타임지의 카라 밀슈타인은 타임지 1면 사진으로도 사용된 이 사진을 두고 “역사적 중요성, 분명한 구도, 무시할 수 없는 기장감이 세계를 놀라게 한 사건을 담은 이 한 장의 이미지에 드러난다. (The historical significance, the clear composition, the undeniable tension, all appearing in a singular image of an event that stunned the world)” 평했다.

역사적 중요성, 분명한 구도, 무시할 수 없는 긴장감.

나는 밀슈타인의 말을 곱씹으며 그 출처가 과연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내고자 했다. 이 이미지의 강력한 힘이 과연 오직 트럼프 전 대통령의 피격이라는 그 사건에만 기인하는가? 이 이미지는 과연 오직 그 사건 하나만을 지시하고 있을까?

이오지마의 성조기. 조 로젠탈이 촬영.
이오지마의 성조기. 조 로젠탈이 촬영.

부치의 사진 뒤로 1945년 퓰리처상을 받은 한 사진이 스쳐 지나간다. 대각선의 구도 펄럭이는 국기, 그를 둘러싸고 손을 치켜들고 있는 사람들. 에번 부치가 올해 7월 찍은 사진의 ‘역사적 중요성, 분명한 구도, 무시할 수 없는 긴장감’은 마치 이 사진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런데 이 두 사진을 계속 바라보다 보면 또 다른 이미지 하나가 그 뒤에서 갑자기 떠오른다. 들라크루아가 19세기에 그린 한 그림이 저 멀리에서 나를 쳐다본다. 마치 끝을 알 수 없는 유령의 집 안에서 계속 나를 놀라게 하는 유령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 캔버스에 유채, 260 cm x 325 cm.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 캔버스에 유채, 260 cm x 325 cm.

이 이미지들의 숨겨진 ‘역사적 중요성, 분명한 구도, 무시할 수 없는 긴장감’의 기원을 찾는 일은 일단 여기서 중단하려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작업은 아마 끝도 없이 이어질 것이고, 언젠가 나는 이미지 검색을 멈추고 저기 어딘가 고대 유적 발굴 현장으로 나가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세 이미지만으로도 충분히 우리가, 사진작가가 혹은 화가가 찾고자 하는 것은 결국 하나의 사건이면서 동시에 순환하는 세계 속에 갇힌 죽은 이미지라는 것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레지스 드브레가 『이미지의 삶과 죽음』에서 지적한 것처럼, 사회에서 죽음이 잊히면 잊힐수록 그만큼 이미지의 생동감도 떨어지고, 그것에 대한 우리의 요구도 덜 절실해진다. 그리고 이는 역으로도 참이 되는 것 같다. 죽음이 만연한 자리에서 이미지는 더욱 생동감 있게 다가오고, 이미지에 대한 우리의 요구도 절실해진다.

이미 너무나 유명하고 잔혹한 이미지라 이 아티클에 직접 싣지는 않겠지만, 사진작가 케빈 카터가 수단에서 찍은 굶주림에 쓰러진 아이의 사진은 이미지의 무시무시한 힘과 본성을 잘 드러낸다.

작은 아이는 유엔의 배급소로 힘겹게 걸어가던 와중에 굶주림에 지쳐 주저앉고 만다. 죽어가는 아이의 저 뒤에서 독수리는 가만히 기다린다. 곧 다가올 언젠가의 죽음을. 카메라 뒤에서 이미지를 포착하려던 케빈 카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역사적 중요성, 분명한 구도, 무시할 수 없는 긴장감’을 포착하기 위해 그는 어떤 순간이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기다리다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는 특별한 순간을 잡아채라는 이미지의 유혹에 굴복하고 말았고, 결국 퓰리처상을 수상했음에도 그가 바로 ‘죽음을 기다리는 독수리’라는 사람들의 비난에 시달리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카터가 특별히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저 그는 간과했을 뿐이다. 이미지 뒤에는 어떤 사건 이전에 이미지만의 순환하는 삶과 죽음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우리가 그 순환하는 유령 같은 이미지의 먹잇감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그리고 아마도 케빈 카터를 비난하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 사실을 잊고 있었을 것이다.

신문 기사 위로 펼쳐진 특종 사진을 보고 바로 이 아티클을 써 내려가는 나 역시도, 죽은 이미지의 냄새를 좇아 이를 파먹는 독수리다. 그리고 동시에 나 역시도 언제나 사진기 앞에 겨누어져 이미지로 전락할 수 있는 대상이다. 이 사실이 나를 소름 돋게 한다.


포식자와
피식자 사이에서

이미지의 생태계에서 우린 언제나 피식자이며 동시에 포식자다. 이것이 순환하는 이미지의 세계에 존재하는 먹이사슬이다. 우리가 모두 인간 독수리며 동시에 이미지 대상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필멸자다. 누구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죽은 이미지에 매료되는 우리의 본성? 우리를 쉽게 끌어당기는 이미지 자체의 힘?

우리는 아마 이미지에 매료되는 우리의 본성을 탓하기보다는, 죽은 이미지가 원하는 것에 속수무책으로 휘둘리는 것을 피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사실 이미 우리는 그 힘을 조금씩이나마 기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는 모든 사진이 진실을 말하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미지는 그것이 포착한 사건을 뛰어넘는, 이미지 자체의 순환하는 문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마치 우리가 모든 신문 기사가 진실을 말하지는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 화살과 의심을 나 자신에게도 돌릴 차례다. 스마트폰의 보급과 SNS의 범람은 우리 모두를 이미지 포획자로 만들었다. 20년 전만 해도 카메라를 매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사람이 카메라를 매일매일 들고 다닌다. 기술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삶을 바꾼다.

손에 들린 이 작은 카메라 때문에 자신을 사진가라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매일 매일 이미지를 포획하고자 하는 욕망에 시달린다. 최근에 내가 찍은 사진 하나를 떠올린다. 우연히 나는 건물 이층 창가에서 히잡을 쓴 여성이 버스 정류장에서 아이를 안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잠시 후 한 할머니가 품에 안긴 아이에게 다가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것 역시 보았다. 나도 모르게 이들에 대한 애정이 밀려와 그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이 사진을 본 내 친구 한 명은 내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아주 자주 본 관음증적인 구도네.” 나는 아직 이 사진을 갖고 있다. 하지만 아마 누구에게도 다시 그 사진을 보여주는 일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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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예술과 사회, 그 불가분의 관계를 보고 기록하고 탐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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