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자 밖 예술
객체의 한계를 넘다

우리 시대 예술이 꿈꾸는
새로운 균형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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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예술에는 한계가 없다고 많은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이 말은 예술이 다룰 수 있는 주제, 수행하는 문화사회적 역할, 시장에서의 가격 등 다양한 의미에서 성립하는 것이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측면은 아마 매체마다 정해진 형태나 기존의 형식을 따르기보다, 작품에 담긴 내용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을 찾기 위해 방법론적인 파격을 꾀하는 수많은 예술가가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예술에 있어서는 더이상 그 물리적인 형태가 그것이 성취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선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예술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때 머릿속 한 켠에 떠오르는 액자에 담긴 회화의 모습을 떨쳐내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 액자는 왜 예술의 이데아적인 모습이 된 것일까? 이번 그레이에서는 현대 예술의 다양한 면모와 층위에도 불구하고 아직 ‘액자에 끼워진 회화’가 작품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곤 하는 선입견에 대해 고찰하고, 이러한 ‘프레임’은 우리가 예술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지 짚어보고자 한다.


액자의 등장과 역할

대중적인 백과사전에는 액자란 그림이나 사진, 서예 등의 평면적인 이미지를 끼우는 틀의 일종으로, 작품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주변 환경과 차별화함으로써 미학적인 기능을 겸하는 테두리라고 정의되어 있다. 우리에게 알려진 인류 최초의 액자는 기원후 1세기경부터 로마 제국이 점령한 이집트에서 발달한 ‘파이윰 미라 초상화(Fayum mummy portraits)’를 장식하던 것이다. 당시에는 미라로 만들어진 시신을 안치하기 전, 고인의 얼굴을 목판에 그려 넣어 붕대로 감긴 얼굴 위에 올려둔 채로 매장하는 풍습이 상류층을 중심으로 유행했다고 한다. 완성된 미라를 담는 관 등에도 화려한 그림을 그려 넣었던 이집트의 장례 문화에 비추어 볼 때, 이때의 액자는 실용적인 의미보다는 종교적인 장식을 위해 만들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젊은 여인의 파이윰 미라 초상화, 2세기 경, 루브르 박물관 소장
젊은 여인의 파이윰 미라 초상화, 2세기 경, 루브르 박물관 소장,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그렇게 탄생한 액자는 그 후 여러 세기에 걸쳐 회화 중심의 예술과 궤적을 함께했다. 그 과정에는 대표적으로 기독교가 지배했던 중세 유럽에서 발달한 템페라(tempera)1) 기법의 목판화와, 온도와 습도 면에서 내구성이 취약한 목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15세기경의 르네상스 시기부터 발달한 캔버스화가 있었다. 동양에서는 서양에서처럼 목재를 사용한 액자가 발달하지는 않았지만, 종이로 된 화폭을 보호하고 그것을 두루마리 형식으로 말아 보관할 수 있도록 비단 등의 직물을 덧댄 족자(簇子)식 프레임이 오랫동안 회화 작품의 주된 형태가 되었다. 다양한 진화를 통해 액자는 예술이 하나의 ‘작품’이라는 사물 속에 깃들어 더욱 영구적인, 심지어 휴대와 유통이 가능한 구체적인 감상의 대상으로 자리 잡는 데 일조했다.

액자 장인의 공방 전경, 작가 미상, 1900년경, 캔버스에 유화
액자 장인의 공방 전경, 작가 미상, 1900년경, 캔버스에 유화,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예술 형식으로서
액자의 의미

이러한 액자의 영향력은 회화라는 매체가 예술계에서 존재감을 뽐낼수록 더욱 짙어졌다. 이제는 회화만이 예술계에서 존재감을 뽐내던 시기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이지만, 현대의 맥락으로 넘어와서도 액자는 여전히 실용성과 심미성을 겸비한 채 우리 곁에 있다. 오늘날 우리는 회화뿐만 아니라 판화와 사진 예술 등도 액자로 표구된 작품의 형식을 빌리는 것을 아주 흔하게 확인할 수 있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했음에도 우리가 예술을 다루고 인식하는 방식에 액자가 여전히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1) 작품의 완결성

우리가 액자를 접하는 가장 흔한 상황은 역시 전시장일 것이다. 예술이 전시되어 있는 공간 안에서 액자에 담긴 작품을 마주할 때 우리는 그동안 문화적, 사회적으로 축적해 온 직관을 통해 그 예술이 이미 완성되어 액자라는 테두리 안에 있다고 인식하게 된다. 시각적으로도 닫힌 회로, 즉, 완결된 상황을 암시하는 듯한 모양의 액자들은 그것이 담고 있는 작품의 시작과 끝이 액자 안에 있으며, 그러므로 예술이 존재하는 장소를 그 전시장의 바로 그 액자 안으로 한정하는 집약적인 역할을 한다. 이것은 액자와 더 나아가 그 전시가 열리고 있는 공간이 작품에 예술이라는 지위를 부여하는, 예술의 정체성과 가치를 특정한 맥락에 놓인 ‘사물’로 국한하는 다소 폐쇄적인 미학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2) 예술 객체의 대상성

눈앞의 사물로 예술의 가능성을 국한시키는 이러한 접근법은 작품이라는 ‘객체(object)’와 그것을 관람하는 감상자, 즉, 인간 ‘주체(subject)’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말해준다. 근본적으로 액자를 설치하는 가장 큰 목적 중 하나가 작품을 환경적인 변수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임을 고려할 때, 액자라는 테두리는 감상자로부터 예술을 물리적으로 분리하는 경계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액자는 작품이 손상될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실질적인 장치이지만, 또 동시에 주체와 객체 사이의 존재론적인 거리감을 인지시키며 우리에게 예술은 직접적으로 교류하고 작용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적당한 위치에서 바라보며 경외해야 하는, 정물적인 ‘대상’으로 못 박아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이미지 출처: Unsplash

3) 상품으로서의 시장성

또한 작품이 액자에 담긴다는 것은 ‘포장’의 의미도 시사한다. 갤러리, 아트 페어, 옥션 등 평면 매체의 예술이 상품으로 거래되는 시장에서는 운반과 보관, 설치에 용이하도록 표구된 작품만이 완성품으로 여겨진다. 작가의 작업실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표구되지 않은 날것의 그림이 캔버스 상태로 전시되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컬렉터의 구매가 결정되면 곧바로 알맞은 액자가 덧씌워진다. 마치 공단으로 마감된 케이스에 담겨 건네지는 명품처럼. 물론 이것은 유통과 전시를 위한 일련의 과정 동안 작품을 잘 보존하기 위한 것이긴 하지만, 그렇게 표구된 작품들의 모습에 익숙해지다 보면 액자 없이 걸린 캔버스가 마치 함부로 헐벗은 몸처럼 생경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이렇게 내재되는 예술을 향한 우리의 무의식은 작품의 가치란 여느 상품처럼 출고 당시의, 누구도 손대지 않은 무결한 순수성을 담보로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예술을 포장하는 액자라는 상태적 진공은 그러한 자본주의적 가치관을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액자를 넘어
도망친 동시대 예술

KIAF Seoul 2024 전경, 이미지 출처: KIAF

본 아티클의 발행일로부터 약 2주 전, 9월 4일부터 8일까지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렸던 아트 페어 ≪키아프 서울(KIAF Seoul)≫과 7일까지 진행된 ≪프리즈 서울(Frieze Seoul)≫을 방문한 필자는 다소간의 실망을 금치 못했다. 전시된 작품 중 대부분이 평면 회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첨언하자면, 필자는 평면 회화 작품을 저평가하려는 의도인 것이 아니라, 예술의 역동적인 현주소를 선보인다고 호기롭게 자부하는 두 아트 페어 모두 점점 더 큰 가능성과 다양성으로 스스로의 한계를 갱신하고 있는 동시대 예술의 진짜 면모를 비추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예술은 액자에 담긴 납작한 이미지의 모습만이 아니다. 미국 시카고 대학교의 ‘노이바우어 콜레지움(Neubauer Collegium for Culture and Society)’ 소속 큐레이터이자 2017년에 열린 ≪도큐멘타 14(Documenta 14)≫의 큐레이터를 역임한 디터 로엘스트라테(Dieter Roelstraete)의 말을 빌리면, 오늘날 우리는 예술을 논할 때 절대적이거나 단일한 실체로서의 예술 작품보다도 “‘실천(practice)’이라는 이름의 모호한 집합체”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요컨대 우리는 이제 전시장에서 그 어떤 사물을 보더라도 눈앞에 놓인 작품뿐만 아니라 그곳에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 즉, 그 작품이 탄생한 배경, 제작 과정, 예술가가 가진 특징적인 맥락 등 예술적인 원료로 쓰일 수 있었을 모든 조건을 전체론적으로 의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대 예술이 바탕을 둔 이러한 종합적인 조건을 미국의 비평가 겸 이론가인 로절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는 ‘포스트-매체 조건(post-medium condition)’이라고 정의했다. 크라우스는 20세기 후반에 걸쳐 벌어진 예술 운동들을 연구한 결과를 1999년에 집대성하며 회화와 조각 같은 전통적인 ‘미적 매체’가 유효성을 상실하기 시작한 현실에 주목했다. 여기서 미적 매체란 예술 장르의 수단이나 재료가 그 장르의 정의와 긴밀하게 연관되는 매체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회화라는 장르의 매체는 목판, 캔버스, 종이, 벽 등의 평면 공간과 거기에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물감 등의 안료다. 이때 평면 공간과 안료의 사용이 회화라는 장르를 설명하는 특징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회화는 미적 매체라고 할 수 있다. 크라우스는 현대 예술, 나아가 지금의 동시대 예술이 더 이상 이러한 ‘매체 특정성(medium specificity)’의 틀에 갇히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이제 예술은 예술과 사물적인 특성 사이의 전형적인 유착에서 벗어나 작가가 스스로 작품의 속성을 정의하는 테제적 실천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도큐멘타 14≫에 등장했던 이브라힘 마하마(Ibrahim Mahama)의 퍼포먼스 작품 “Check Point - Prosfygika”, 2017. 아프리카 사람들의 노동을 헐값에 사가는 국제 무역의 부조리를 고발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도큐멘타 14≫에 등장했던 이브라힘 마하마(Ibrahim Mahama)의 퍼포먼스 작품 “Check Point – Prosfygika”, 2017. 아프리카 사람들의 노동을 헐값에 사가는 국제 무역의 부조리를 고발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이미지 출처: The Guardian

그리하여 예술은 사물이라는 형식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방법론으로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예술에 있어 사물의 형태를 빌리는 것은 당위적인 것이기보다, 그러한 문화적 전략을 취하는 것이 작품을 표현하기에 적합할 때 의도를 갖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우리 시대의 예술은 실천적인 행위로서, 그것을 이루는 과정으로서, 제공하는 경험으로서, 감상자를 예술의 일부로 끌어들이는 참여의 창구로서 작품이란 더욱더 다양한 모습일 수 있다는 사실을 나날이 증명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의 예술품은 단지 액자의 유리판 뒤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고착된 존재가 아니라, 유동적인 주체성을 갖고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하는 확장된 객체로서 기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전통적으로 예술 객체를 사물의 틀에 가둬 소유하고 시각적으로 통제해 온 인간 주체에 대한 도전이 될 것이며, 우리는 새롭게 정의되는 객체성과 주체성 사이에서 갱신을 거듭하는 예술적 균형에 주목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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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주

예술이 모두에게 난 창문이 되는 날을 위해
읽고, 쓰고,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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