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을 통해 우리는 삶을 안전하고 풍요롭게 만드는 다양한 공간을 제공받습니다. 외부환경 요인을 차단해 생활에 적합한 환경을 인공적으로 만드는 것이죠. 도시 시스템이 원활하게 작동할 수 있는 철도나 고속도로 등의 토목공사를 위해 산과 들의 녹지를 콘크리트 지반으로 바꾸고, 강이나 바다를 메꿔 건물로 채우기도 합니다. 이렇듯 건축이라는 행위는 자연의 파괴를 필연적으로 동반하게 됩니다. 연간 배출되는 폐기물 중 건설폐기물이 절반 가까이 차지한다는 데이터는 이를 확실하게 보여주기도 하지요.
이러한 배경 속에서 건축계는 지속가능성이라는 화두를 더욱 진지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자연보존과 건축이라는 대립하는 개념에서 그 균형점을 탐구하고 실천하는 건축가가 있습니다. 2014년 프리츠커상 수상자이기도 한 일본의 건축가 시게루 반이지요. 그의 활동과 작품을 함께 만나보시죠.
종이로 짓는 건축
환경 친화적인 태도로 작업활동에 임하는 건축가는 굉장히 많습니다. 그 사이에서도 시게루 반이 주목을 받게 된 이유는 종이라는 소재를 재료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졸업 후 미국 뉴욕에서 건축을 전공하던 그는, 대학 시절부터 종이라는 소재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건축이라는 행위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건설폐기물과 그에 따른 환경파괴에 대한 문제 의식에서 출발해 그 대안이 될 수 있는 친환경 건축재료로서 종이를 탐구하게 된 것이죠.
건축이란 단순히 짓는 것이 아닌 철거까지의 과정도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시게루 반에게는 종이가 친환경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적합한 소재였을 것입니다. 재활용이 용이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종이는 여느 재료보다 자연과 가깝고 친숙한 재료라고 느껴집니다.
종이는 구조, 화재, 방수 등 여러 측면에서 건축 재료로 사용하기에는 취약해 보입니다. 그러나 시게루 반은 꾸준한 연구를 통해 종이가 가진 단점을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일례로 그는 대나무처럼 강한 강도를 가진 원통형 종이튜브를 개발했습니다. 이 종이튜브는 방수, 방염 처리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누수나 화재에도 문제없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시게루 반은 종이 외에도 목재와 대나무를 비롯한 목재를 활용한 환경친화적인 재료를 즐겨 사용합니다. 수수하고 소박하지만 확고한 철학으로 작품활동을 이어가는 그는 화려하고 독특한 디자인을 통해 소위 스타 건축가의 반열에 오르는 것에 혈안이 된 요즘의 건축계에 묵직한 메시지를 던지는 듯합니다.
희망을 짓는 건축
종이를 활용한 건축은 그의 사회적 활동에도 큰 보탬이 되었습니다. 르완다 내전 당시 시게루 반은 전쟁 난민들을 위해 종이로 만든 보호소를 제안했습니다. 일본에서 발생한 고베 대지진 당시에는 종이로 만든 임시주택을 제안했고요. 그가 제안한 종이와 천으로 구성된 주택은 누구나 쉽고 빠르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습니다. 앞서 소개한 가볍고 저렴한 종이튜브는 최적의 재료였지요. 이러한 임시건물은 이후 다른 지역에서의 재해 발생 시에 해체 후 재조립하는 방식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나아가 그는 임시주택 외에도 혼란스러운 사회질서를 안정화하는 데에 필요한 시설인 학교, 교회 등 다양한 시설을 구축하기도 했습니다.
2023년,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진행된 ‘서울디자인 2023’ 행사에 전시된 시게루 반의 임시주택은 많은 주목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한국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종이라는 재료를 통해 선보인 임시주택은 뛰어난 내구성과 아늑하고 따뜻한 내부공간을 구성했습니다. 무엇보다 3일 만에 두 채를 뚝딱 지어낸 시공의 용이함이 가장 큰 매력이었지요.
건축가가 설계하는 모든 건물은 공공성이라는 성격을 담고 있습니다. 작은 개인 주택 하나를 짓더라도 그 주변의 환경에 변화를 주고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죠. 따라서 건축가라는 직업은 공공에 이바지하는 사회적인 역할이 반드시 뒤따르게 됩니다. 시게루 반은 이를 매우 직접적으로 실천하는 건축가입니다. 모든 재난은 인재(人災)라고 생각하는 그는 건축가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진지한 반성을 합니다. 이러한 사회운동가다운 실천적 자세를 높이 평가받아, 시게루 반은 2014년 프리츠커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자연을 닮은 건축
시게루 반은 사회적 공헌이라는 면모를 차치하더라도 늘 훌륭한 디자인을 선보이는 건축가입니다. 그가 즐겨 사용하는 가벼운 소재는 다양한 형태를 구현해내기에 적합합니다. 그는 자연을 닮은 부드럽고 유기적인 조형, 자연과 건물의 경계를 허무는 편안한 공간을 선보이지요. 나무를 닮은 조각 같은 기둥, 자연물을 연상시키는 루버 마감의 형태 등은 우리에게 흥미로운 공간의 경험을 제공합니다.
특히 시게루 반은 종이와 목재 등의 재료를 사용하면서 이를 그대로 노출시킵니다. 이런 특징은 지붕의 구조에서 유독 강하게 드러납니다. 기후와 같은 외부 환경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며 온전한 생활공간을 제공하는 요소는 지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좋은 건축은 공간이 구축되는 구조적 방식을 솔직하게 드러내야 한다는 태도와 각 재료가 결합되는 방식에 대한 깊은 사유가 깃든 장인정신이 모여 독창적인 건축작품이 탄생합니다.
지속적인 성공과 개발은 우리에게 당연한 목표처럼 다가오곤 합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예측불가능한 재난과 재해가 지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혼란스러운 상황이기도 하지요. 개발과 보존, 편리와 파괴, 인공과 자연 등의 양면성이 공존하는 현대 사회의 건축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가는 것은 건축가의 숙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기후 위기가 전 인류가 함께 해결해야 할 공동의 숙제가 된 시점에서 이는 비단 건축가의 고민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라는 아프리카 속담을 닮은 시게루 반의 건축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좋겠습니다. 화려하고 성공적인 건축보다도 지속 가능성을 위한 건축의 역할을 고민하는 시게루 반의 실천적 건축은, 어쩌면 주어진 숙제를 각자 어떻게 풀어나갈지 알려주는 좋은 단서가 될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