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와 재현의
파도 사이에서

19세기 리얼리즘 회화와
풍경사진의 관계
Edited by

지난 아티클에서 최근의 저널리즘 사진을 통해 사진 역시 회화와 마찬가지로 이미지의 순환하는 세계 속에 존재함을 이야기했다면, 이번 아티클에서는 사진술의 태동기인 19세기 중엽으로 돌아가 더 면밀하게 사진과 회화 관계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재현을 넘어서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것이 되고자 했던 회화는 사진이 발명된 후 수 세기 동안 이어져 오던 자신의 욕망을 다른 방향으로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 역시 실재의 등가물이라는 세간의 인식을 넘어서 예술가의 개입을 통해 현실을 미적으로 재현하는 예술의 한 장르로 인정받기 위해 회화의 문법을 흡수하려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고 말이다. 이처럼 실재와 재현 사이를 오가는 회화와 사진의 팽팽한 줄다리기를 찬찬히 살펴보기 위해, 이번 아티클에서는 19세기 중엽 프랑스 리얼리즘 회화의 살아있는 상징이었던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Jean-Désir Gustave Courbet)의 해양화와 최초로 파리 살롱에 자신의 사진을 예술 작품으로 전시했던 구스타브 르 그레(Gustave Le Gray)의 해양사진이 주고받은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19세기 중엽 프랑스에서
사진과 회화의 관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1859년 출판본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1859년 출판본.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19세기 이후 유럽에서 급속하게 발전하기 시작한 자연과학과 당대 철학은 서로 밀접한 연관을 맺으며, 자연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인식을 크게 바꾸어 놓는다. 오귀스트 콩트(Auguste François Comte, 1798-1857)의 『실증철학의 체계 Systeme de politique positive』가 1851년, 샹플뢰리의 『사실주의 Le réalisme』가 1857년,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의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의 프랑스어 번역서가 1862년 연이어 출간되자, 19세기 중반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서는 신의 섭리 관념에 뿌리를 둔 자연에 대한 목적론적 사고가 지질학, 생물학의 발전에 기인한 자연에 대한 유물론적 인식으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19세기 프랑스의 유물론자들은 인간 정신조차 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자연에 종속된 것으로 보았고, 그들을 둘러싼 세계를 물질들의 총합으로 이해하기 위해 선험적이고 종교적인 자연관을 기반으로 한 기존의 세계 인식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사진은 1839년 발명과 동시에 물질 그 자체로 구성된 자연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게 하는 효과적인 도구로 간주되었다. 19세기 프랑스인들이 가장 최신의 시각 매체였던 사진에 기대한 시각적 효과와 도구적 가치가 무엇이었는지는 프랑수아 아라고(François Arago, 1786-1853)가 1839년 7월 3일 프랑스 의회에서 발표한 연설을 통해 엿볼 수 있다.

19세기 프랑스에서 사진은 인간의 불완전한 손이 아닌 “자연의 가장 섬세한 연필인 빛줄기”가 그려낸 가장 “정직하고 진실한” 이미지를 제공하는, 지금까지 인간이 보지 못했던 자연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드러내는 과학기술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당대 프랑스인의 인식에서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들이 사진을 과학의 산물로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회화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매체로 간주했다는 사실이다. 아라고는 연설에서 당대 저명한 화가 폴 들라로슈(Paul Delaroche, 1797-1856)의 의견을 인용하며 사진이 회화의 한계를 극복하게 할 뿐 아니라 회화 자체를 발전시킬 것이라 주장하고 있으며, 당시 매우 인기가 높았던 중도 성향 일간지 「가제트 드 프랑스」는 사진의 발명에 찬사를 보내는 이 기사를 ‘미술 BEAUX-ARTS’ 섹션에 기고한다.

「가제트 드 프랑스 Gazette de France」의 1839년 1월 6일자 기사
「가제트 드 프랑스 Gazette de France」의 1839년 1월 6일자 기사

사진과 회화의 관계는 사진 기술이 발전할수록 더 첨예하게 논의되기 시작한다. 1850년대에 이르면 프랑스에서는 은판을 이용하는 다게리오타입 대신 네거티브를 사용해 종이 인화를 가능하게 만든 칼로타입(Calotype, 그리스어로 아름다운 그림이라는 뜻)이 본격적으로 유통된다. 사진의 매체가 값비싸고 무거운 은판에서 훨씬 유통하기 쉽고 대량생산이 가능하며, 결정적으로 회화의 매체로도 사용되는 종이로 이동하자 프랑스 사회에서는 미술과 사진의 관계를 도구적 관점에서 벗어나 새롭게 정의해보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등장한다.

칼로타입 프로세스
칼로타입 프로세스

쿠르베의 절친한 친우이기도 한 문필가이자 미술 평론가 프란시스 웨이 (Francis Wey, 1812-1882)는 1851년 설립된 사진 협회인 소시에떼 엘리오그라피크(Société héliographique)의 창립 멤버였는데, 그는 소시에떼 엘리오그라피크의 기관지 라 뤼미에르(La Lumière)에 유럽 최초의 사진에 대한 저널인 「미술에 엘리오그라피가 미치는 영향 De l’influence de l’héliographie sur les Beaux-Arts」을 기고한다. 웨이가 자신의 저널에서 주요한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 르 그레의 칼로타입 풍경사진은 당대 프랑스 사회에서 높은 인기를 구가하며 1850년 파리 살롱의 석판화 섹션에 전시되는 등 사진에 대한 프랑스 사람들의 인식을 회화의 보조적 수단 혹은 최신 과학 기술에서 그 자체가 전시될 수 있는 미적인 대상으로 서서히 이동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소시에떼 엘리오그라피크의 기관지 라 뤼미에르(La Lumière)
소시에떼 엘리오그라피크의 기관지 라 뤼미에르(La Lumière)

하지만 여전히 당대 프랑스 사회에서 사진은 미술과 자연의 기표적 등가물의 사이의 모호한 위치로 인식되었으며, “사진은 자연을 보는 가장 사실적인 눈”이라는 신화는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당대 주요한 미술 평론가 중 한명이었던 테오필 고티에(Jules Pierre Théophile Gautier, 1811-1872)는 레뷰 데 듀 몽드(Revue des Deux Mondes)에 기고한 「예술에서의 아름다움 Du beau dans l’art」에서 샤를 드 라 베르쥬(Charles de La Berge, 1807-1842)의 사실적인 풍경화를 비판하며 이를 회화적 관습을 올바르지 못한 방식으로 거부한 “다게리오타입과 같은 작품”이라 평한다.

고티에의 비판은 사진에 대한 당대 사회의 신화적 인식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사진이 19세기 프랑스의 리얼리즘 풍경화에 제공한 주요한 시각적 기능 역시 암시한다. 19세기 프랑스에서 사진은 극도로 사실적인 자연의 이미지를 프랑스 사회에 유포함으로 당대 풍경화로부터 아카데미 전통을 따르는 역사적 풍경화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제공한 것이다. 미술에서의 사진의 역할과 위치를 강조한 웨이는 이러한 사진이 제공하는 새로운 시각의 힘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아카데미즘 전통이 회화에서 인공적인 것을 영속시키며 자연을 간과하게 만든다며 이를 강력하게 비판했는데, 그는 이러한 아카데미즘 전통을 대체할 방법으로 사진을 꼽는다.

샤를 드 라 베르쥬, Soleil couchant à Virieu-le-Grand , 1839, 목판에 유채, 59× 93 cm, 루브르 박물관 소장.

웨이의 절친한 친우였던 쿠르베 역시 회화와 아카데미즘 전통에 대해 유사한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19세기 프랑스 화단에서 리얼리즘의 상징적인 기수 역할을 했던 쿠르베에게 회화는 현실에 존재하는 것의 가장 온전한 재현이었다. 쿠르베는 웨이와 마찬가지로 아카데미즘 전통에 저항하여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화가의 본분이라 여겼고, 실제로 이를 위해 웨이가 자신의 글에서 아카데미즘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제안한 것과 같이 다양한 사진 자료를 참고했다.


르 그레의 해양풍경사진과
쿠르베의 ≪파도≫ 연작

쿠르베 회화와 사진의 연관은 단순히 쿠르베가 아카데미즘 전통에 저항하기 위해 사진 자료를 사용했다는 것만으로는 온전하게 설명될 수 없다. 쿠르베의 회화와 당대 사진과의 보다 밀접한 관계는 쿠르베 후기 풍경화, 그 중에서도 그가 1969-1970년 노르망디 에트르타 지역에서 그린 ≪파도≫ 연작에서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귀스타브 쿠르베, 파도, 1870, 캔버스에 유채, 80× 100cm.
귀스타브 쿠르베, 파도, 1870, 캔버스에 유채, 80× 100cm.
귀스타브 르 그레, 거대한 파도, 1857, 알부민 프린트, 34× 41cm.
귀스타브 르 그레, 거대한 파도, 1857, 알부민 프린트, 34× 41cm.

자신의 풍경사진을 예술의 영역에 올려놓고자 다양한 노력을 기울인 르 그레는 1857년 런던에서 노르망디의 해변을 찍은 해양풍경사진 전시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1858년 파리 카푸친 대로(Capucines) 35번지의 스튜디오에서 동일한 내용의 전시를 연다. 그는 당시 콜로디온 습판법을 가장 잘 다루는 사진가 중 한 사람으로 해안에 밀려오는 파도의 생생한 질감을 사진에 담아내 많은 영국과 프랑스 관람자들의 찬사를 받았다. 르 그레의 해양풍경 사진은 노출시간을 섬세하게 조절해 뚜렷한 콘트라스트를 만들어냄으로 바다 풍경을 구성하는 파도와 구름 등 다양한 물질들의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쿠르베의 ≪파도≫ 연작은 이러한 르 그레의 해양풍경사진과 많은 시각적 유사점을 보인다. 쿠르베는 팔레트 나이프와 붓을 이용하여 물감을 두텁게 화면 위에 얹는 임파스토 기법을 거칠게 이용함으로 높게 이는 파도와 하늘을 가득 채운 구름의 물질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으로 이들이 공명하는 지점은 바로 해안가 풍경이라는 전체적인 조망에서 하늘과 바다를 때어내 화면 속에 분할하는 방식이다.

웨이는 르 그레에 대한 자신의 비평에서 르 그레가 네거티브를 사용하는 방식을 마니에르(maniére)라고 부른다. 이는 음화를 사용함을 통해 사진에서 뷰포인트를 조절하는 방식을 이르는 말로, 실제로 르 그레는 원하는 구도를 자신의 사진에서 창조하기 위해 사진가 중 최초로 여러 음화를 조합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르 그레는 렌즈 밖의 자연을 그대로 재현할 수밖에 없는 사진이 예술적 역량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자연을 보는 사진가의 세심한 개입, 즉 사진가가 설정하는 사진의 구도가 풍경사진의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다.

조합 인화 사진의 대표적인 예시인 헨리 피치 로빈슨의 <Fading Away>, 1858.
조합 인화 사진의 대표적인 예시인 헨리 피치 로빈슨의 , 1858.

쿠르베의 ≪파도≫ 연작이 사실적인 파도를 묘사하며 자연을 구성하는 파도라는 물질 자체를 관람자가 생생하게 경험하게 하는 방식도 바로 ≪파도≫ 연작의 독특한 화면구성과 구도에 기인한다. 쿠르베의 ≪파도≫ 연작은 파도가 화면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만들며, 다른 당대 프랑스 해양풍경화는 매우 다른 화면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높게 이는 저류가 화면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파도와 하늘 외에는 어떤 요소도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파도≫ 연작의 마치 파도가 앞으로 쏟아질 듯 보이는 꽉 찬 화면 구성은 관람자로 하여금 바다를 구성하는 파도의 물질성 자체를 매우 강렬하게 경험하게 만든다. 실제로 ≪파도≫ 연작이 1870년 살롱 전에 전시되었던 당시 이를 풍자한 스톡(Stock)의 캐리커처는 나이프로 파도를 마치 버터나 잼처럼 떠내는 손을 보여주며, 하단에 “이 그림의 가벼운 한 조각을 당신에게 서빙하게 해주시오… Permettez-moi de vous offrir une tranche de cette peinture légère…”라는 조롱을 써넣었다.

스톡의 캐리커쳐
스톡의 캐리커쳐

흥미로운 지점은 ≪파도≫ 연작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당대의 인물들 역시 ≪파도≫ 연작의 물질성을 주목, 이를 극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화가 폴 세잔(Paul Cézanne, 1839-1906)은 ≪파도≫ 연작을 각각 베를린과 루브르에서 보고 “(그림 앞에선) 사람은 이 그림이 즉시 가슴께를 때리는 것을 느낀다. 뒤로 물러서면 방 전체가 파도의 포말로 가득 찬 것을 느끼게 된다.”라고 이야기한다.

세잔의 언급에서 눈여겨 볼 지점은 그가 마치 전시장에 “파도의 포말로 가득한 것을 느끼게 된다”고 이야기하며 ≪파도≫ 연작의 물질성을 예찬했다는 것뿐만이 아니다. 세잔은 ≪파도≫ 연작 이 제시하는 독특한 구도와 그 구도에서 파생되는 관람자의 시점을 예리하게 파악한다. 그는 ≪파도≫ 연작의 파도가 자신의 “가슴께를 때린다”고 표현한다. 세잔의 관찰을 통해 다시 ≪파도≫ 연작의 구도를 바라보면 관람자의 독특한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관람자는 기존의 해양풍경화가 관람자에게 제시하는 자리, 멀리서 파도를 관조하는, 따라서 창조주의 위대한 계획을 엿볼 수 있는 자리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바다 안에 그대로 잠겨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진이 제공하는 새로운 시각 구도의 영향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쿠르베는 자신에 회화에서 실제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구도를 사용해 관람자를 온전히 파도라는 물질 속으로 이동시킴으로 물질에 앞서 존재할 수 없는, 항상 물질로 가득 찬 자연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재적 조건을 드러낸 것이다.


쿠르베의 절친한 친우이기도 했던 피에르-조제프 프루동은 자신의 책에서 쿠르베에게 이와 같은 충고를 남긴다. 사진이 등장하고 ‘실재’란 과연 무엇인지를 더욱 첨예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화가에게, 프루동은 이제 중요한 것은 실재가 아닌 ‘참’이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사고의 전회는 단순히 회화에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사진 역시 단순히 실재의 등가물이라는 통념을 벗어나, ‘마니에르’ 즉 사진가의 의도적인 개입이 사진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는 것을 회화와 닮아가고자 하는 과정에서 깨닫게 된 것이다. 우리 역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예술로서 회화와 사진은 서로 균형을 이루어왔음을 우리는 19세기 회화와 사진의 공진화 관계를 되짚어보며 깨닫는다.


Picture of 유진

유진

예술과 사회, 그 불가분의 관계를 보고 기록하고 탐구합니다.

에디터의 아티클 더 보기


문화예술 전문 플랫폼과 협업하고 싶다면

지금 ANTIEGG 제휴소개서를 확인해 보세요!

– 위 콘텐츠는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로 ANTIEGG에 저작권이 있습니다.
– 위 콘텐츠의 사전 동의 없는 2차 가공 및 영리적인 이용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