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가
고수하는 삶의 균형

하루키를 통해 보는
균형에 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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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의 감각을 떠올려 봅니다. 발만큼 좁은 연석 위를 걸을 때 양쪽으로 벌린 팔, 요가 매트 위에 한 발로 설 때 지면에 꾹 눌러 붙인 발바닥, 자전거 페달에 남은 한쪽 발을 올리는 순간의 기울기. 언뜻 정적으로 읽히는 균형이라는 단어에서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 세우기 위해 애썼던 어떤 움직임을 떠올립니다. 무게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안정을 이루는 순간에는 이런 기묘한 움직임이 배어 있습니다. 은밀히 읽히는 이 운동성에 삶을 나아가게 하는 미지의 힘과 작품이 탄생하는 불가사의한 허공을 겹쳐보면 어떨까요. 확고한 중심을 가지고 자신의 삶과 작품 세계를 견고히 쌓아나가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통해 균형에 대해 고찰합니다.


러너의 삶과 작가의 삶

이미지 출처: 문학사상

하루키를 작가 이외의 단어로 소개해야 한다면 단연 러너입니다. 매일 아침 10km를 달리고 매년 풀코스 마라톤에 참여하는 그에게 달리기는 삶의 일부입니다. 그가 처음 달리기 시작한 계기는 전업 작가가 되며 줄어든 육체 활동을 보충하는 것이었습니다. 작가 생활을 지속하기 위해서 체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단순한 이유에서 시작된 러너의 삶은 작가의 삶과 점점 내밀하게 연결됩니다. 매일 책상에 앉아 의식을 한 곳에 집중해야 하는 작가의 시간은 오랜 시간 달리는 데 필요한 근육을 훈련하는 러너의 시간과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그 시간은 근육을 자극하고, 상태를 지속하고, 조금 더 한계를 올려 그것을 반복합니다. 길 위를 달리고 종이 앞에서 골몰하며 그는 주어진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효과적으로 자신을 연소해 나갑니다. 그렇게 달리기와 글쓰기는 하루키의 삶을 지탱하는 두 개의 축이 됩니다.

이미지 출처: The New York Times

하루키는 달리기와 글쓰기라는 두 축을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 동안 고수했습니다. 이 견고한 균형의 비결이 궁금해집니다. 그는 자신이 오래 달릴 수 있었던 이유는 강한 의지보단 그저 달리는 일이 성격에 맞았기 때문이며, ‘누구나 그 정도는 쓸 수 있다.’는 데뷔작을 향한 혹평에도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한 사람은 쓰지 않았지만 자신은 썼다는 점이 다르다고 덧붙입니다.

견고한 균형은 자신에 대한 이해와 스스로를 움직이게 하는 필연성 위에 자리 잡습니다. 흔들리는 삶의 궤적에서 알맞은 균형을 찾아낸 사람은 엄격해 보이는 규칙 속에서도 자유롭습니다. 그 균형 속에서 잃어버렸던 본래의 자신으로 복귀하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발성과 독자적인 세계

일본 메이지 진구 구장, 이미지 출처: AFPBBNews

1978년 4월 1일, 하늘이 맑게 갠 봄날의 진구 구장에서 배트에 정확히 맞은 공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날아갑니다. 이제 막 푸른빛을 띠기 시작한 외야석의 잔디 위에 누워 경기를 보던 하루키는 뜬금없이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 소설을 써보자!’ 봄바람이 따스하게 불어오는 진구 구장에서 안타가 만들어낸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들으며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삶의 예감을 멋지게 받아냅니다.

하지만 익숙하게 사용하던 모국어의 발성으로 쓴 첫 번째 글은 다소 진부하고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는 경직된 언어 체계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낯선 언어인 영어로 초고를 쓰고 그것을 번역하기로 결심합니다. 한정된 수의 단어와 구문으로 쓴 글은 조잡했지만, 군더더기가 없었고 무엇보다 나름의 리듬이 있었죠. 그것을 일본어로 다시 번역하자 처음 썼던 것과는 전혀 다른 독자적인 문체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그렇게 완성한 작품으로 군조 신인상을 받으며 작가로 데뷔합니다.

이미지 출처: The New York Times

작가는 언어가 사회와 맺고 있는 엉성한 연결을 끊어내고 자신만의 감각과 리듬으로 언어의 균형을 재조정합니다. 모든 명명이 어떤 실패의 흔적이라는 말을 인용하자면 작가는 실패의 흔적 속에서도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근사치에 닿는 작업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루키는 이 과정에서 발견한 자신만의 발성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합니다. 그 세계에는 혼란과 고독, 상실이 편재합니다. 그가 조명하는 것은 이 세계를 살아가는 인물이 구원받는 광경이 아니라 구원받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것을 이루는 광경입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구원받기 위해서는 홀로 어둠의 가장 깊은 부분까지 내려가야 한다는 것’, 그것이 이 세계의 규칙입니다. 이 세계를 이루는 언어 역시 같은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하루키 월드와 총체로서의 독자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상, 이미지 출처: HARUKIMURAKAMI.com

하루키는 오랜 시간에 걸쳐 ‘하루키 월드’라고도 불리는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그런 스타일로 인해 평단으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전 세계와 세대에 걸쳐 넓은 팬층을 형성할 만큼 시대와 공간을 넘은 설득력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이토록 넓은 팬층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구체적인 독자 상을 그리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누군가를 위해 쓴다기보다 그저 그의 세계와 분명히 이어져 있을 가상의 독자를 인식합니다. 하루키는 개인 홈페이지에서 많은 독자와 메일을 주고받으며 총체로서의 독자가 자신을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개별적인 독자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오해도 있고 비약도 있지만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바라본 총체로서의 독자는 그와 그의 소설을 깊고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지 출처: HARUKIMURAKAMI.com

하루키는 자신이 구축한 세계의 방향과 흐름을 믿고 그쪽으로 따라와 주고 있는 독자들의 확신을 흩트리고 싶지 않기에 소설에 자신 안의 세계를 담으려 한다고 말합니다. 최초의 작품은 작가의 독백입니다. 그 독백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모여 작품은 생명력을 이어갑니다. 일상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와 관계없이 작가와 독자는 작품의 세계에서 이어집니다. 저 아래 어두컴컴한 곳에서 건져낸 자신의 뿌리와 누군가가 이어져 있다는 감촉은 작가가 그 세계를 가꾸어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됩니다.


하루키는 스스로에 대한 균형을 기반으로 작품 세계의 균형을 만들어냅니다. 이 세계는 외부에 존재하는 독자와의 균형을 통해 다시 한번 확장됩니다. 이 모든 균형 이전에 그는 다른 직업을 가지기도, 만족할 수 없는 작품을 쓰기도, 평단의 외면받기도 합니다. 다시 균형에 배어 있는 그 기묘한 운동성을 떠올립니다. 흔들리는 양 팔, 움찔거리는 발바닥, 휘청이는 몸. 돌아보면 모든 균형은 흔들림의 궤적을 담고 있습니다. 불균형 속에서 몸의 무게와 형태, 기울기를 이해했을 때 비로소 몸은 편안한 균형을 찾습니다. 그 궤적 속에서 우리는 잃어버렸던 자신으로 돌아가기도, 실패의 흔적을 모아 그럴듯한 성취를 이루기도, 나의 독백에 귀 기울이는 이를 만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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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연

시선이 오래 머무는 것에 대해 씁니다.
영감을 발견하고 나르고 만드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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