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왜곡된 자화상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선
동양의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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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일러문’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쇠 맛’ 과 ‘세일러문’의 합성어인 ‘쇠일러문’은 아이돌 그룹 에스파(aespa)의 콘셉트을 설명하는 수식어로 쓰이곤 합니다. 메탈릭한 은색의 의상과 악세사리, 다양한 모양의 컬러렌즈가 SF 영화를 연상시키는 매끄럽고, 차가우며 날카로운 느낌을 풍기면서도 세일러문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미지 출처: SM Entertainment
이미지 출처: 에스파 Licorice 뮤직비디오 캡처

‘쇠 맛’이미지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서구의 관점에서 소비되던 동양의 전형적 이미지와 닮아 있죠. 서구 사회가 동양에 대한 관점을 토대로 상상한 미래적 디스토피아 속 인류도 마찬가지로 기계적이며 비인간적인 외계인으로 묘사됩니다. 유년 시절부터 대중 매체의 신비롭고 환상적 이미지에 영향받은 김민희 작가는 관습적 이미지를 무너트립니다. 동아시아 기반의 매체에서 인물이 서구의 상상을 토대로 표준화되어 있음에 주목하죠. 게임, 만화, 영화, 애니메이션으로부터 이러한 시각적 잣대가 반영된 이미지를 수집하고, 작가의 관점으로 해석하여 재구성합니다.


달콤 살벌한 디스토피아

영화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이미지 출처: 블레이드 러너 캡처
영화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이미지 출처: 왓챠

고층 건물이 형성한 마천루와 비 내리는 골목, 형형색색의 네온사인, 인공 신체를 지닌 탈-인간적 존재들. 축축하고 화려한 밤거리는 매혹적인 동시에 금방이라도 사건이 벌어질 것만 같은 불안감을 조성합니다. 바로 영화 <블레이드 러너> 속 도쿄의 풍경입니다. 막강한 기술력을 가진 혼잡하고 인공적인 도시 이미지는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 동양 세계를 묘사하는 상징적 요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고도의 기술력과 하위문화의 결합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여러 미디어에서 차용되고, 오마주 되죠.

‘테크노 오리엔탈리즘’은 서구 사회가 아시아를 파편적 정보와 편견을 통해 상상하고 왜곡한 이미지를 지칭합니다. 1980년대, 인터넷이 보편화되지 않고 국가 간의 문화 교류가 활발하지 않던 시기,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는 첨단 기술력과 인적 자원을 바탕으로 산업 발전을 주도했습니다. 이에 서구 사회는 아시아가 미래에 서양을 능가하거나 위협할 것이라는 상상을 전개합니다. 서구의 동아시아에 대한 망상과 기술적 동경은 인간성과 기계의 경계를 흐립니다.

영화 <공각기동대> 공식 포스터,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테크노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인을 비인간적이고,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는 휴머니즘과 대립하는 존재로 묘사합니다. 복제되거나 공학적으로 개조된 신체는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사이보그로 그려집니다. 특히 아시아 여성은 주로 ‘여전사’로서 ‘동양적’인 외모와 폭력성이 결합된 스테레오타입으로 소비됩니다.

오리엔탈리즘적 스타일은 레트로 열풍에 힘입어 ‘힙’하고 세련된 문화 코드로 자리 잡습니다. 독특하고 신비로운 이미지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대중문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죠. 한편으로, 왜곡된 여성상의 지속적 재현은 아시아 여성을 특정한 이미지 틀에 가두고, 상품화하기도 합니다. 서구와 동양의 이분법에서 개별적 주체는 다양성을 잃고, 그저 ‘아시안 걸’로 존재합니다.


허구의 리얼리티

김민희 작가는 인터넷에 떠도는 이미지 파편을 수집해 오리엔탈 이미지의 막강한 영향력과 미학을 조명하는 동시에 이면의 모순적 환상을 역설합니다. 서구적 시각에서 재구성된 동양의 ‘리얼리티’가 사실은 허구가 뒤섞인 복합체임을 시사하는 겁니다. 특히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에서 보편화된 단편적인 여성 이미지에 주목합니다.

1) 혼재된 자화상, “클레어 포트란”과 “에이바”

테크노 오리엔탈리즘은 다시 동양 문화에 편입되어 수많은 원본, 복제본, 그리고 2차 창작 등 다양한 변주를 낳았습니다. 이미지는 원본과 맥락에서 분리되어 가상 세계를 부유했죠. 김민희 작가는 인터넷 세계에서 떠도는 오리엔탈리즘적 이미지를 발췌하고, 재조합합니다. 이렇게 탄생한 작품이 바로 “클레어 포트란(CLAIR FORTRAN)”과 “에이바(AVA)”입니다.

“에이바(AVA)”, 2023, 이미지 출처: 김민희 작가 웹사이트
“클레어 포트란(CLAIR FORTRAN)”, 2022, 일민 미술관 ≪히스테리아: 동시대 리얼리즘 회화≫, 이미지 출처: 김민희 작가 웹사이트

두 작품은 <파이널 판타지>, <베르세르크>등 각종 게임과 만화, 애니메이션으로부터 출발합니다. 클레어 포트란과 에이바는 세기말 문화를 지배했던 다양한 매체 속 캐릭터들의 공통된 외형적 특질을 모아 만든 허구의 인물입니다. 다양한 서사와 맥락이 뒤섞인, 기원을 알 수 없는 모호한 정체성을 가졌죠. 각기 다른 캐릭터임에도 머리, 표정, 배경, 장신구 등 유사한 시각적 요소를 포개어 어디서 본 듯한 익숙함과 생경함을 동시에 자아냅니다. 기시감뿐인 가상의 인물을 목격한 관람객은 이미지 소비 메커니즘의 균열과 혼란을 겪게 됩니다. 서로 다른 맥락과 내용을 지닌 캐릭터에 대한 일관된 묘사가 반복된 스테레오타입이었음을 깨닫게 되죠. 그러면서도 우리가 열광한 요소를 모두 갖춘 클레어 포트란과 에이바에 이끌리게 됩니다. 익숙하면서도 매력적인 이미지는 거부할 수 없을 만큼 흥미롭고 매혹적이기 때문이죠. 테크노 오리엔탈 이미지가 세계를 강타하고 지금까지 재현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일 겁니다.

2) 세기말의 밀레니엄 디바

20세기 말 한국은 아날로그에서 테크놀로지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예견된 혼란을 드러냅니다. 하이-테크가 편리함을 제공하는 동시에 기술에 대한 의존은 인류의 생활 양식을 송두리째 흔들며 불안을 야기했기 때문입니다. 불안 속에서도 당시 X세대는 기술을 활용한 사이버네틱한 요소들을 단순한 유행을 넘어선 문화적 정체성으로 수용합니다. ”크리스탈 아이즈(Crystal Eyes)”와 “디. 스. 코(D.I.S.C.O)”는 이러한 시대의 산물로서, 두려움과 선망의 대상이었던 기술적 디스토피아가 한국 문화 전반에 침투했음을 보여주죠. 당시 기술에 대한 인류의 복합적인 감정까지도 호출합니다.

“크리스탈 아이즈(Crystal Eyes)”, 2022, 이미지 출처: 김민희 작가 웹사이트
“디스코(D.I.S.C.O)”, 2022, 이미지 출처: 김민희 작가 웹사이트

두 작품은 1990년대 후반, ‘세기말 여전사’의 상징이었던 이정현과 엄정화의 뮤직비디오 속 감각 요소를 차용하고 시각화합니다. 디지털 아트와 컴퓨터 그래픽의 결합, 사이보그 같은 의상과 메이크업은 작품에서 증강된 인공 신체와 그 파편, 단단하고 반짝이며 차가운 질감으로 드러납니다. 기계의 부품으로 이뤄진 신체와, 메탈릭한 표면은 화면 속 인물이 휴머노이드처럼 보이게 합니다.

우리는 본 적 없는 생경한 뮤직비디오에 매료되지만, 동시에 현실 세계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시각 요소에 불쾌한 위화감을 느끼게 되죠. 작가는 인간성이 제거된 인물을 재현하고, 이질적인 비-인간의 시선을 확대해서 보여줍니다. 뮤직비디오를 구성하는 기술적 혁신에서 오는 양가적 감정을 가상의 인물에 투영한 겁니다. 인간의 삶을 압도하는 디스토피아적 미래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매혹과 두려움이라는 양면성을 극대화합니다.

이미지 출처: 이정현 <와> 뮤직비디오 캡처

“크리스탈 아이즈”와 “디. 스. 코”는 ‘쇠 맛’ 이미지가 국내 문화를 풍미했던 당시 시대적 성격을 반증합니다. 비록 동양을 절대적 타자로 설정한 오리엔탈리즘적 관점에서 출발했지만, 한국 문화 산업 만이 구현할 수 있는 독창성을 확보할 기회이기도 했죠. 영화, 음악, 광고에서 재현된 공상적 이미지를 수용함으로써 다채로운 장르적 유산이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시각적 상징과 기호는 한국의 사회문화적 특성을 토대로 변형과 전유를 반복하고, 지금까지도 대중문화에서 재현되고 있습니다.

3) 광기의 여고생 고고 유바리

“유바리(YUBARI)”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킬 빌 Kill Bill> 속 캐릭터 ‘고고 유바리’를 자기 자신에 투영해 재구성한 작품입니다. 인터넷에서 수집한 유바리 이미지를 자신의 자화상에 대입해 페티시화되고 상품화된 아시아 여성의 이미지를 전복합니다.

이미지 출처: Alamy

고고 유바리는 무릎까지 올라오는 니삭스, 단정한 교복, 빽빽한 앞머리 등 일본 여고생의 전형성을 극대화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작품에서 일본 여고생을 상징하는 요소들은 최소화되는 반면, 유바리의 잔인하고 무자비한 면모는 극대화됩니다. 붉은 색조로 가득한 클로즈업된 얼굴, 살기 어린 눈빛, 얼굴을 가로지르는 붓 자국, 머리카락에 이어지는 알 수 없는 물질 등은 시각적으로 불쾌한 긴장감을 조성합니다. 이러한 시각적 장치를 통해 탈-인간적인 신체를 가진 유바리의 광기와 잔인함을 증폭시켜 동양 여성을 특정한 기호로 소비하는 서구적 시각을 비틀어 보여줍니다. 일본 여고생과 탈-인간이라는 상징적 기호를 분리함으로써 오히려 각각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관습적으로 소비해온 이미지가 특정 관점에서 재현된 허구임을 고발하는 겁니다.

“유바리(YUBARI)”, 2022, 이미지 출처: 김민희

비인간화를 통한 ‘도덕적’ 이미지 소비는 테크노 오리엔탈리즘이 이미지 소비 시장에서 작동하는 메커니즘입니다. 유바리가 인간성을 초월한 존재라는 이유로, ‘여고생’ 캐릭터를 그저 판타지로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처럼요. 김민희 작가의 유바리는 도덕적 부담 없이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화면 너머 소비자들을 응시합니다. 오리엔탈리즘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이미지를 보편적으로 여기고,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감상하는 소비 행태를 성찰하게 하죠.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문화 비평가인 호미 바바(Homi K. Bhabha)는 ‘혼종성’ 개념을 통해 단일하고 순수한 문화는 존재하지 않으며, 문화적 상징은 근본적인 통일성을 지니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동양의 주체들이 서구의 담론을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정체성과 동일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의 시각에 저항하고 주체적으로 전유하여 서구에서 설정한 체계와는 다른 ‘문화적 혼종’을 창출한다고 말하죠.

혼종성의 관점에서 보면, 김민희 작가의 작품에서 테크노 오리엔탈리즘적 요소는 동시대 문화, 동양의 개별적 정체성과 뒤섞이며 모호한 채로 공존합니다. 서구적 고정관념을 지닌 이미지를 작가 본인의 자화상이나 허구의 인물에 대입해 이미지의 상징을 적극적으로 전복하고, 타자가 아닌 주체로서 새로운 문화를 선도하죠. 미래주의적 레트로가 유행하고, 에스파가 ‘쇠일러문’으로 등장하는 동시대를 작품에 투영하며 이미지를 변주하고, 서구적 관점의 상징을 우리의 주체적 문화로 대체하는 겁니다.

이러한 혼종성은 주류 사회의 욕망과 보편적 소비 구조에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작가가 관습적 이미지를 조립해 새로운 정체성을 창조한 것처럼, 기존의 보편적 틀을 수용하되 우리의 문화적 배경과 역사에 맞춰 재구성하는 겁니다. 아시아를 단편적으로 상징했던 이미지는 우리의 정체성과 공존할 수 있게 됩니다. 결국 작품의 근간을 이루는 혼종성이 문화적 식민주의에서 벗어나 세계 소비 시장에서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 돌파구였던 셈이죠. 이제는 그저 과거의 영광으로 회귀가 아니라, 문화적 혼종성을 통해 동양의 정체성을 다시 쓰고, 글로벌 문화의 중심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할 시점입니다.


WEBSITE : 김민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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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연

하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일도 많은 미술 노동자.
경계없는 문화예술을 옹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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