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불구불 이어지는 전시장을 발이 아픈 줄 모르고 걷다 출구 앞에 서면 왠지 모를 아쉬움에 뒤를 돌아봅니다.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이해하고 싶어 작가의 인터뷰와 칼럼을 읽다 하루가 훌쩍 지나가기도 합니다. 좋은 영감은 깊은 감동만큼 아릿한 갈증을 남깁니다. 느낌의 세계에 오래 머물며 그 감각들을 할 수 있는 한 정확히 이해하고 싶지만, 모든 순간은 시간과 함께 흘러가 버립니다. 어떤 순간을 영영 잡아둘 수 없다면 그 영감과 기억을 담은 물건을 소장해 보면 어떨까요? 다양한 방식으로 영감을 담아낸 아트북을 소개합니다.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 세계를 담은 책에서 기억하고 싶은 순간과 이어진 통로를 발견해 보세요.
작가와 전집
어떤 책은 그 무게보다 조금 더 무겁게 느껴집니다. 전집도 그중 하나입니다. 견고한 양장과 두께가 주는 묵직한 인상에 더해 한 사람의 일생을 켜켜이 쌓은 종이 뭉치는 그 질량 이상의 존재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생애와 그가 만들어낸 작품 세계, 엄선된 작품이 한 권에 담긴 책은 방대한 규모의 개인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독일의 출판사 타셴은 예술사에 빠질 수 없는 작가를 주제로 작품을 큐레이션하고 예리한 통찰을 덧붙인 아트북 시리즈를 출간합니다. 언젠가 눈을 뗄 수 없는 작품을 만난 기억이 있다면 이 시리즈를 살펴보세요. 흐려진 기억에서 떠오른 새로운 감동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타셴의 클로드 모네 아트북을 선물 받았을 당시 파리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에서 모네의 작품을 보았습니다. 작품이 만들어진 시간순으로 배치되어 있던 전시장의 입구를 잘못 찾는 바람에 작품을 역순으로 관람했었죠. 눈을 감았을 때 남은 빛의 잔상을 옮긴 것처럼 형태가 거의 남지 않은 후기 작품들을 거슬러 도착한 전시장 입구에는 인상주의의 시작이 된 <인상, 해돋이>가 있었습니다. 화풍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거슬러 왔기에 그 작품에서 느껴지는 시작의 질감은 더욱 강렬했습니다. ‘본다’는 행위를 재발명한 작가의 고뇌와 성취가 작품에 담긴 짙은 실험성과 겹쳐지며 마음을 움직였죠.
어떤 책은 펼치면 과거에 느꼈던 강렬한 감각이 떠오릅니다. 그 감각은 시간이 흘러 조금 더 넓어진 느낌의 세계에 새로운 파문을 만듭니다. 그런 책이 책장 한켠에 있는 것만으로 마음 한구석이 환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전시와 도록
아트샵은 전시관만큼이나 흥미로운 영감을 담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책의 레이아웃에 맞게 전시를 편집한 도록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전시처럼 느껴집니다. 인상에 남은 전시나 미처 보지 못한 전시의 도록과 좋아하는 작가의 아트북을 살펴보는 것은 미술관을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입니다.
3차원의 전시장을 2차원으로 옮겨 축적한 아트북은 공간의 제약에서 비교적 자유롭습니다. 공간의 크기는 축적할 수 있는 만큼 넓어지고 공간의 문법은 걸음에서 넘김으로 전환됩니다. 시간과 공간을 워프하는 것처럼 전시장엔 다 담을 수 없었던 비하인드와 수록된 작품을 겹쳐보면 감상은 더 깊어집니다. 무엇보다 소장하고 싶은 전시를 언제든 생생히 펼쳐볼 수 있다는 것은 특별한 경험입니다. 전시장의 출구를 보고 아쉬움을 느꼈던 경험이 있다면 아트북으로 전시의 영감을 소장해 보세요.
교토의 교세라 미술관을 방문했을 때 무라카미 다카시의 전시를 보았습니다. 귀여움과 기괴함, 화려함과 덧없음이 뒤섞인 작품이 주는 시각적인 압도와 함께 애니메이션을 소재로 하는 작품 구석구석을 살피며 멋대로 스토리를 상상하는 재미가 있었죠. 다리가 아플 때쯤 아트샵으로 가 이 책을 구매했습니다.
책을 펼쳐 전시장에서 봤던 작품을 보고 작품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읽는 것은 현장에서 느꼈던 즐거움을 되살립니다. 때로 작품을 보며 가진 감정이나 생각이 작가의 의도와 완전히 겹쳐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시의 설명을 읽어보는 건 답지를 열어보는 마음과는 조금 다를 겁니다. 좋아하는 것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 안에 빗금은 없습니다. 감상은 시간의 선을 따라 연결되며 그저 더 넓고 깊어집니다.
『Takashi Murakami – Summon Monsters? Open the Door? Heal? or Die?』 구매 페이지
영화와 사진집
발상은 담는 그릇에 따라 그 형태를 달리합니다. 하나의 발상이 여러 매체에 담길 때의 형태를 음미하면 그 틈에서 새로운 미감을 만나기도 합니다. 특히 영화는 다양한 공식 도서를 출간합니다. 각본집, 스토리보드 북, 사진집 등 영화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책은 영화의 한 장면이 완성되기까지의 발상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보여줍니다.
어떤 발상이 지문으로 적히고, 그림으로 그려지고, 영상에 담기는 그 틈을 응시해 보세요. 영화에서는 미처 보지 못했지만, 제작의 틈 사이에 분명히 존재했던 순간을 음미하는 일은 어떤 장면을 더 사랑하게 만듭니다.
마음에 들었던 영화가 유독 많았던 그해, <헤어질 결심>은 끝내 마음속에 남았습니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솜씨와 아름다운 미장센은 물론이고 주인공이 사용하는 어눌한 한국말이 꿰뚫는 본질은 여운이 길었습니다. 각본집, 스토리보드 북, 포토 북에 이어 출간된 사진집 <어떻게 헤어질 결심을>에는 발상부터 시작해 영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영화는 시간의 흐름과 인물의 발화를 보여주지만, 사진은 시간의 파편을 보여줍니다. 영영 멈춘 어떤 순간을 보는 일은 그 순간을 깊게 보게 합니다.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시간 속에서 캐낸 순간이 겹겹이 쌓인 사진집을 넘기다 보면 문득 어떤 장을 오래 잡고 있게 됩니다. 그 한 장을 원하는 만큼 볼 수 있다는 것도 영화와는 다른 점이죠. 손가락 사이로 얇은 종이를 잡고 그 순간을 오래 보고 있자면 오래 여운이 남은 어떤 장면이 겹쳐집니다. 그것은 풍경을 담아낸 우물의 바닥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고요하고 또 아득합니다.
집 안을 돌아보며 작년과 올해의 다른 점을 찾아봅니다. 새로 산 옷은 작년과 비슷한 듯 조금 다른 취향이고, 욕실에는 핸드워시 대신 비누가 생겼고, 책장의 가장 위 칸은 새로운 책과 올해 자주 꺼내보았던 책으로 채워졌습니다. 한 해 동안 새롭게 생기고 또 다르게 자리 잡은 물건에서 한해의 마음을 발견합니다. 그중 가장 열렬했던 것은 좋아하는 마음을 모아두는 일이었습니다. 눈높이 맞는 책장에 자리잡은 책들은 좋아하는 마음을 보고 만질 수 있다는 비유 같기도 합니다. 올 한 해 탐냈던 영감을 꺼내 펼쳐봅니다. 좋아하는 것을 더 정확하게 좋아하고 싶은 마음으로 그것을 오래 들여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