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are the slaves of objects around us.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물건의 노예다.
_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소비는 자기 자신입니다. 일상에서 먹고, 입고, 쓰는 것은 말보다 더 명확하게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내곤 합니다. 유명 연예인이나 인플루언서의 가방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해하고, 하우스 투어와 룸 투어 등 자신의 소유를 공유하는 콘텐츠가 인기를 얻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겠지요. 오늘 소개하는 바바라 크루거는 이같은 현대 소비 문화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 흑백 사진과 직사각형 텍스트를 결합하여 소비주의를 날카롭게 비평한 예술가 바바라 크루거. 오늘은 소비사회의 단면을 명징한 시선으로 담아낸 바바라 크루거의 작품 세계를 살펴봅니다.
검정, 빨강, Helvetica
직설의 미학 바바라 크루거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는 미국의 개념주의 예술가로 흑백의 사진 위에 굵게 쓴 Helevetica, Fruta체만으로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파슨스 디자인 학교를 다니다 학위를 포기한 후 콘데 나스트의 <마드무아젤> 매거진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때를 “운이 좋았다”며 “콘데 나스트는 남자 상사에게 커피를 타주는 일 말고 진짜 일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물질주의 사회를 지지하는 업계에서 일하는 데에 갈등을 느끼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Aperture와 House & Garden 같은 유수의 잡지사에서도 디자인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이 시기에 사진의 프레이밍과 타이포그래피 활용을 통해 이미지 다루는 법을 터득했습니다.
1970년 크루거는 시각 예술가로 전향을 선언합니다. 하지만 초기의 작품은 여러 재료를 엮어 만든 벽걸이 장식품으로, 현재의 ‘크루거 스타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작품 이후 활동을 잠시 중단하고 사진을 찍기 시작하는데요. 이때의 작품을 엮어 ‘Picture/Readings’라는 책을 출간합니다. 이 책에서 일상 사진과 단편 대화를 절묘하게 결합한 양상을 보입니다. 이는 후일 바바라 작품 스타일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1979년 그래픽 디자이너로서의 경험과 사진작가의 시선이 만나 크루거의 상징적인 스타일이 탄생합니다. 광고 이미지를 확대해 배경으로 사용하고 그 위에 Futura Bold 또는 Helvetica Ultra Condensed 서체의 문구를 올린 것이죠. 그의 스타일은 광고를 연상시키는 강렬한 이미지로 사람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습니다. 이러한 이미지와 텍스트를 공명시키는 방식으로 젠더, 권력, 섹슈얼리티, 인종차별, 그리고 소비주의 등을 묻고 있습니다.
바바라 크루거가 포착한
소비의 초상
1) 소유보다 존재로 살아가기를
바바라 크루거는 소비주의를 현대인의 존재 방식과 가치관을 왜곡하는 현상으로 보았습니다. 그 대표작이 바로 <I shop therefore I am>(1987)로, 데카르트의 “I think therefore I am(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을 트위스트한 작품입니다. 데카르트의 문구는 인간은 생각한다는 것만으로도 의미있는 존재라는 점을 의미하는데요. 크루거는 이를 차용하여 소유물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려는 현대인의 소비 양상을 비판합니다. 작품이 만들어진 1980년대는 근로자들의 경제력 향상으로 개인 소유물의 폭발적인 증가가 이루어진 시기로, 개인적 특성 대신 소유물과 사회적 이미지가 자신을 정의한다고 느끼던 시기였습니다(지금과 비슷하네요). 이에 크루거는 대조적인 “I shop”과 “I am”을 병치하여 물화되는 인간의 정체성을 비판합니다.
바바라 크루거의 작품에는 ‘I’, ‘You’, ‘Us’ 등 관람객을 지칭하는 말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특히 <I shop therefore I am>의 손이 뻗어 있는 부분은 나머지 요소보다 더 밝게 처리되어 빨간 사각형과 강렬한 시각적 대비를 만들어내죠. 또한 시선이 가장 많이 쏠리는 검지가 ‘I am(나는)’ 부분을 가리키고 있어 관람객은 ‘나는’을 가장 먼저 읽게 됩니다. 텍스트의 구성에 있어서도 ‘therefore(고로)’가 다른 단어들보다 작게 표현되어서 관람객은 ‘나는 쇼핑한다’ 다음에 잠시 멈춘 후 전체 텍스트를 읽게 됩니다. 이러한 디자인은 두 개의 ‘나는’을 강조하게 만들어 크루거의 작품은 관람객이 가장 중요한 존재로여기고 있음을 표현합니다. 그는 이 작품 외에도 소비주의를 비판하는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며 존재보다소유에 집중하는 현대인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2) 소비재로써의 여성을 해방하라
미디어와 광고는 여성의 미적 기준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신체를 도구화하여 소비 심리를 자극합니다. 이로 인해 여성의 신체는 사회가 규정한 미의 기준에 따라 평가되고 통제되며 여성은 자신의 외모에 대한 결정권마저 상실한 채 사회적 담론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화장품, 패션, 성형 산업의 급격한 성장은 이러한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많은 여성들은 이러한 억압의 메커니즘을 인식하지 못한 채 이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내면화하고 있습니다. 바바라 크루거 또한 이러한 여성의 상품화를 비판하는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대표작인 <Your body is a battleground(당신의 몸은 전쟁터이다)>(1989)에서는 이분법적 구도를 통해 여성의 신체를 둘러싼 외부의 억압 그리고 여성 자신이 내면에서 겪고 있는 갈등과 투쟁의 상황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작품은 1989년 워싱턴 D.C.에서 있었던 낙태 합법화 찬성 행렬을 위한 포스터로 쓰였는데요. 당시 합법적 낙태 지지에 대한 문구를 덧붙였으나 이후 대형 실크 스크린으로 제작하며 ‘Your body is a battle ground’만 남겨두어 가부장적 사회 구조를 비판하는 작품으로 의미가 확대되었습니다. 특히 ‘Your’라는 단어를 통해 관객들이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게 만듭니다.
<You are not yourself(당신은 당신 자신이 아니다)>(1981)또한 타자화된 여성의 현실을 강렬하게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작품 속 울고 있는 여성의 모습은 미디어가 의도적으로 구축해온 전형적인 ‘약자로서의 여성상’을 보여줍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작품 상단의 충격으로 인한 균열과 깨어진 얼굴의 이미지입니다. 이는 남성 중심적 문화의 지배 구조에 대한 작가의 저항적 메시지를 강렬하게 전달합니다. 즉 ‘You are not yourself(당신은 당신 자신이 아니다)’라는 텍스트는 가부장 문화에서 사회화된 여성들은 타자화된 존재가 되어 온전한 자신일 수 없다는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바로 바바라 크루거는 사회적으로 규정된 성(性)인 젠더의 틀에서 벗어나 섹슈얼리티의 주체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기꺼이 가져가세요,
제 ‘스타일’!
1) 슈프림과 ‘슈프림 비치’
그런데 바바라 크루거의 그림, 어딘가 익숙하지 않으신가요? 빨간 바탕에 흰 굵은 서체. 바로 스트리트웨어 브랜드 Supreme의 로고입니다. 슈프림은 크루거의 스타일을 그대로 가져와 자신들의 로고로 사용했습니다. 이는 원작자인 크루거와의 어떠한 협의나 허락도 없이 이루어진 것인데요. 그러나 크루거는 “나는 그 글꼴을 소유하지 않는다(I don’t own a font)” 라고 대응하며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죠.
그러나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슈프림이 자신들의 로고를 모방한 스트리트웨어 브랜드 Married to the Mob(MTTM)을 상대로 1,000만 달러의 소송을 제기한 것입니다. MTTM은 스트리트웨어와 스케이터 문화에 만연한 남성 중심적 사고방식을 비판하는 브랜드로, 바바라 크루거의 디자인 스타일과 슈프림의 로고를 패러디한 ’Supreme Bitch‘ 라인으로 큰 성공을 거두던 중이었습니다. 이에 MTTM이 ‘Supreme Bitch’ 상표 등록을 신청하자 슈프림 대표 제비아는 상표 위조, 불공정 경쟁, 허위 원산지 표시 등을 주장한 것이죠. 소비자들이 MTTM 제품을 슈프림의 제품으로 혼동할 수 있다는 것이 주된 논리였습니다. 결국 몇 달 후 두 브랜드는 합의했고, MTTM은 ‘Supreme Bitch’ 제품 판매를 중단했습니다. 이에 대해 크루거는 “완전히 쿨하지 않은 바보들의 말도 안 되는 혼돈(What a ridiculous clusterfuck of totally uncool jokers)”이라며 강하게 비판했죠.
2) 본질은 스타일이 아니라 메시지 <The Drop>
2017년 바바라 크루거는 <Untitled(The Drop)>라는 퍼포먼스를 통해 슈프림의 드롭(Drop) 문화를 패러디했습니다. 드롭은 현대 스트리트웨어 브랜드들이 자주 사용하는 특별한 판매 방식입니다. 브랜드는 아주 적은 양의 제품을 깜짝 발매하고, 발매 일시와 장소를 공지합니다. 소비자들은 제품을 구매하기 위해 매장 앞에서 긴 줄을 서서 기다립니다. 이러한 방식은 제품의 희소성을 높여 가치를 상승시키고, 과열된 소비 심리를 유발하며, 리셀(재판매) 시장을 형성하는 악영향을 미치죠. 대표적인 ‘드롭’ 브랜드인 슈프림의 매장 앞의 긴 줄은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 되었고 이들을 인터뷰하는 콘텐츠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바바라 크루거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이같은 소비문화를 다시 한번 비판합니다. 뉴욕 소호에 임시 상점 형태로 설치된 매장에는 ‘Don’t be a jerk’가 적힌 스케이트보드, ‘Whose hopes? Whose fears? Whose values? Whose justice?’라는 문구의 티셔츠, ‘Want it Buy it Forget it’이 써진 비니와 후드티 등이 전시되었습니다. 모든 제품은 ‘크루거 스타일’인 빨간 배경에 흰색 텍스트로 디자인되었는데요. 이 전시의 핵심은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시간 동안 줄을 서서 기다리며 정체를 모르는 제품에 대한 욕망을 키우고 결국 돈을 지불하게 되는 과정 자체였습니다. 크루거는 이를 통해 현대 소비문화, 특히 스트리트웨어 브랜드들의 드롭 문화가 만들어내는 욕망과 소비 메커니즘을 비판적으로 조명했습니다. 다만 크루거는 <The Drop>이 슈프림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소비문화에 대한 비판이라고 밝혔습니다. 슈프림을 둘러싼 현상을 역이용해서 본인 예술의 본질은 스타일이 아니라 그가 전달하는 메시지 즉, 패션계가 소비주의를 양산하고 고도화한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했던 것이죠.
“네 진짜를 보여줘!” 바바라 크루거의 세계를 접하며 머리에 맴돈 말입니다. 소유물이 아닌 인간 그 자체로서의 ‘나’, 젠더가 아닌 섹슈얼리티,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그만의 메시지. 아무리 많은 이들이 그의 스타일을 가져가도 결코 그가 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크루거의 예술에 열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포장해야 하는 시대, 우리는 모두 무언가에 둘러싸여 진짜 자신을 잃어가고 있으니까요. 크루거는 지금 당신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잃어버린 진짜 당신은 누구입니까? 진짜 당신은 어떻게 살고 싶나요?
- Emma Hope Allwood. 2017.12.14. Barbara Kruger on staging a fake Supreme drop. DAZED.
- Barbara Kruger/Supreme: who’s hijacking whom?. 2022.01.29. grapheine.
- 안동선. 대담하고 도발적인 예술가, 바바라 크루거. 2019.05.24. BAZA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