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잊지 않고 출석 체크하는 연례행사가 있습니다. 영화제와 음악 페스티벌, 그리고 북페어가 그러한데요. 무한한 가능성과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지닌 독립 출판의 세계를 처음 알게 된 이후, 각양각색의 출판물을 수집하며 언젠가 책을 만드는 날을 꿈꿔왔습니다. 그러다 올해 첫 책을 만들게 되어 얼마 전 독립 출판 페어에 참가팀으로 참여하게 되었는데요. 오랜 독자에서 창작자가 되는 경험은 설레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더없이 벅차오르는 일이었습니다.
책을 매개로 소비자와 생산자가 연결되는 공간이자 축제의 장인 북페어. 매년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도 풍성한 볼거리로 가득한 책 행사가 열리고 있는데요.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로컬의 정체성을 살린 개성 있는 북페어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전국의 독자들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군산부터 제주까지, 도시의 고유한 역사와 전통을 품은 독립 출판 페어 3곳을 소개합니다.
군산북페어
군산 하면 무엇이 생각나시나요?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지로도 유명한 군산은 1899년 개항 이후 항구도시로 번성했는데요. 일제 강점기의 아픈 역사와 시간이 멈춘 듯한 고즈넉한 풍경이 공존하는 도시에, 최근 흥미로운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디자인 잡지 『GRAPHIC』을 발간하는 출판사 ‘프로파간다’가 올해 초 군산에 서점을 오픈했고, 이번 여름에는 군산 최초의 북페어가 열리기도 했으니까요.
올해로 1회차를 맞이한 군산북페어는 군산책문화발전소가 기획과 운영을 맡았는데요. 군산의 동네 책방 13곳이 연합체를 이뤄 주도하는 진정한 로컬 기반의 행사입니다. 북페어는 양일간 6천 명이 넘게 방문하며 성황리에 막을 내렸죠. 행사 장소인 군산회관은 한국 1세대 건축가 김중업의 유작으로 알려졌는데요. 10년간 굳게 닫힌 공간은 도시재생사업으로 편의성을 개선해 활기찬 모습으로 방문객을 맞이했습니다. 1층의 분장실은 강연 장소로,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문 2층의 공연장은 100개 팀이 참여하는 북마켓으로 변신했죠.
군산북페어는 ‘Books For Sale, Sail For Books’를 주제로 전시부터 강연, 워크숍 등 풍성한 콘텐츠를 선보였습니다. 군산을 문학적으로 탐구하는 시인들의 낭독회부터 책방 대표들의 대담까지 펼쳐졌고요. 페스티벌형 북페어를 꿈꾸는 군산북페어는 단순히 책을 사고파는 장소를 넘어, 책을 매개로 모두가 경계 없이 연결되는 콘텐츠 비중을 높여 진정한 소통의 장을 만들 예정이라고 합니다. 교역 도시의 정체성을 지닌 군산에 역동적인 변화의 물결이 세차게 일고 있습니다.
WEBSITE : 군산북페어
INSTAGRAM : @gsbf.kr
전주책쾌
전주책쾌는 올해로 2회차를 맞이한 독립 출판 북페어인데요. 지난 7월에는 “책에 살고 책으로 쾌하는 오늘, 우리 모두가 책쾌다!”라는 힘찬 슬로건 아래 전국의 창작자와 독립 출판사, 독립 서점 등 총 90여 팀이 참여했습니다. 1회차의 열기와 흥행에 힘입어 이번에는 더 넓은 장소인, 옛 원예공판장을 개조한 남부시장 문화공판장에서 독자들과 만났습니다. 붓의 질감으로 그려낸 덕진공원의 오리와 전주천의 수달, 도깨비시장의 도깨비를 대표 캐릭터로 내세워 전주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드러내기도 했죠.
16세기 무렵 처음 등장한 ‘책쾌’는 전국 팔도를 돌며 책을 판매하던 조선시대의 서적 중개상을 뜻하는데요. 행사 첫날 개막식에서는 전주 사투리로 책쾌 선언문을 낭독하거나, 국내 유일 책쾌 연구자와 책쾌 문화를 살펴보며 과거와 현재를 하나로 잇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명절처럼 풍성한 이벤트도 돋보였는데요. 윷놀이나 제기차기 등 전통 놀이 체험을 하거나, 책쾌 복장 체험을 하고 SNS에 인증하면 선물을 제공하기도 했죠.
경쾌한 어감의 이름 덕분인지 전주책쾌는 올해도 많은 방문객의 발걸음을 이끌며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책 재고를 모두 소진하거나 역대급 판매량을 달성한 팀도 많았다고 합니다. 하루 종일 현장을 돌며 20권을 넘게 구매한 손님도 있었다는 후기도 들려오죠. 천년의 역사 도시이자, 조선 후기 전주에서 출판된 목판본인 ‘완판본’의 도시 전주. 한옥과 영화제의 이어 책으로 뻗어나가는 전주에서, 지역 북페어의 새로운 가능성을 목격합니다.
제주북페어
제주시 탐라도서관이 주최하는 제주북페어는 매년 4월마다 한라체육관에서 개최되는데요. 올해로 벌써 4회차를 맞이한 행사는 이제 200여 팀이 참여하는 대규모 축제로 자리 잡았습니다. 전국의 독립 출판물 제작자와 소규모 출판사, 독립 서점 등이 참여하며 특히 제주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50여 팀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죠. 한라체육관 인근은 아름다운 벚꽃 명소로도 유명해, 행사 기간이면 꽃놀이와 책을 즐기러 온 사람들로 주변은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현장에서는 다양한 전시와 세미나도 만나볼 수 있는데요. 제주 4·3사건을 주제로 한 전시부터 탐라도서관의 책 만들기 프로그램에 참여한 수강생들이 만든 책을 열람할 수도 있습니다. 제주북페어 참가팀들이 꼽은, 그들에게 영감을 준 도서도 만날 수 있죠. 어린이를 위한 놀이나 체험 공간도 마련되어 있으며, 작년에는 배리어프리(barrier-free)를 주제로 점자와 촉각 도서를 큐레이션 하여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제주북페어는 제로웨이스트를 실천하는 행사이기도 합니다. 방문객은 책을 들고 다닐 가방을 지참해야 하며, 행사장에는 일회용품 반입이 금지되죠. 배출되는 쓰레기를 최소화하기 위한 소소한 이벤트도 함께 진행되는데요. 텀블러를 들고 올 경우 입구에서 무료로 커피를 제공하며, 현장에서 에코백을 기증받아 나눔하는 장도 열립니다. 제주 감귤 농가에서 나온 폐자원을 활용해 만든 업사이클링 배너도 눈에 띄고요. 내년의 첫 벚꽃은, 화사한 봄이 찾아온 제주도에서 맞이해 보는 건 어떨까요?
INSTAGRAM : @jejubookfair_2024
몇 년 전 방문했던 독립 출판 페어에서 보았던 문구를 또렷이 기억합니다. ‘혹시 모르죠. 언젠가 내 이야기도 책으로 만들어 볼까? 했던 그 언젠가가 분명해질지요.’ 마치 새가 모이를 모으듯 하나씩 모았던 책들은 서재와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 훌륭한 거름이자 반짝이는 창작의 씨앗이 되어주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각자만의 이야기를 간직한 한 권의 책이 아닐까요? 전국 곳곳을 북적이는 열기로 물들이는 북페어가 더 많아지기를, 우리가 책을 통해 더 넓게 연결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