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소비기한을 생각해본 적이 있나요? 식품에 소비기한이 존재하듯이, 공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머무르며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의 기간은 한정적입니다. 다만 공간의 소비기한은 식품보다는 훨씬 복잡한데요. 기능적으로, 경제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고려해야 할 요소가 많기 때문이죠.
어떤 공간은 그 건축물의 물리적 수명으로 인해 소멸되기도 하고, 또 어떤 공간은 하드웨어가 안전하지만, 경제적 혹은 문화적 쓰임을 찾지 못해 사라집니다. 반대로 문화적 가치를 통해 공간의 하드웨어를 수선하고, 소비기한을 연장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번 아티클에서 주목하고 싶은 지점인데요. 문화적 의미 부여는 어떤 방식으로 공간의 소비기한을 연장할까요?
소개할 세 공간은 오래된 건물의 자산을 새로운 문화적 기능과 영리하게 결합해 사람들에게 다가섭니다. 단순히 개보수를 하는 것이 아닌, 풍성한 의미를 지닌 문화 공간을 생성함으로써 사람들이 공간에 머무를 이유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내는데요. 공간의 소비기한이라는 관점에서 세 공간이 거쳐간 크고 작은 규모의 리모델링 과정을 살펴보세요.
윤현상재 EXP:8 Seasons
최소한의 리모델링으로 탄생한 브랜드 공간
타일로 대표되는 건축 자재 전문 회사인 윤현상재는 철거 직전의 논현동 건물을 새로운 프로젝트의 발판으로 삼았습니다. ‘EXP:8 Seasons’, 일명 ‘유통기한 프로젝트’로 이름 붙인 문화전시공간의 기획은 공간의 소비기한을 인식하고, 새롭게 조명합니다.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문영빌딩은 여덟 개의 계절, 2년의 기간 뒤에 철거와 재건축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건물을 바로 철거하는 대신 2년의 기간을 두고, 남은 기간을 전면에 내세웠는데요. 공간의 유한성은 오히려 프로젝트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합니다.
윤현상재는 본사 쇼룸을 Stage 1, 이곳 문영빌딩을 Stage 2로 명명했습니다. Stage 2에서는 8번으로 예정된 매 계절마다 새로운 전시를 기획하고 진행합니다. 지금까지 5번의 전시가 이루어졌으며, 추후 아티스트 레지던시로의 확장을 예고했는데요. 건물의 용도는 바뀌었지만, 곧 철거되는 건물인 만큼 리모델링은 최소한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문영빌딩의 오래된 현판을 비롯해 외부 파사드 역시 많은 부분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데요. 그 대신 경사로 인해 생긴 독특한 외부 계단을 타일로 덮어 브랜드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역할로 활용했습니다. 창을 전면 개방할 수 있도록 바꾼 1층은 환대의 공간이 됩니다. 논현동 골목의 오래된 4층 건물이 관람객으로 북적거리는 공간으로 변모하는 모습을 볼 때, 2년 남짓의 소비기한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연장되었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내부 공간 역시 대부분 기존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데요. 3, 4층의 방을 나눈 벽체는 철거하지 않고, 작게 구획된 전시 공간으로 활용했고, 타일 외에는 별도의 마감재 없이 콘크리트를 노출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이는 변형과 낭비를 최소화한 선택이지만, 되려 타일의 소재를 강력하게 드러내는 전략이 되기도 합니다. 자재 유통이라는 비즈니스의 성격을 넘어서 영감을 주는 문화예술 브랜드로 거듭나고자 하는 윤현상재는 건물의 히스토리를 활용함으로써 브랜드가 지향하는 전시 공간을 효과적으로 드러냅니다.
주소: 서울시 강남구 논현로 132길 5 문영빌딩
마곡문화관
복원과 발굴로 만든 역사적 전시 공간
기능이 소멸된 공간은 어떻게 지속될 수 있을까요? 서울식물원 내에 위치한 마곡문화관은 배수펌프장으로 이용되다가 1980년대 산업화에 따라 용도가 폐지된 공간입니다. ‘서울 구 양천수리조합 배수펌프장’의 흔적인데요. 1927~8년에 강서 평야의 논농사를 짓는 물을 관리하기 위해 지어졌죠. 본래의 기능을 잃어버린 텅 빈 공간은 방치되다가, 2000년대부터 문화재로서 재조명받습니다. 마곡문화관은 본격적인 복원과 리모델링 작업을 거쳐 역사적 의미를 가진 전시 공간으로서 소비기한을 연장한 사례입니다.
마곡문화관의 리모델링 과정은 세 가지의 차원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상부는 복원하고, 기단부는 변형하고, 지하부는 발굴한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이는 건물의 독특한 구조에 기인하는데요. 상부는 목조 건축물이고, 기단부는 육중한 콘크리트 구조체이며, 지하에는 수로 공간이 있습니다. 상부의 건축물은 목조 원형을 간직한 문화유산이자, 근대 농업 관련 시설물로서 유일하다는 점, 일본과 한국의 건축 기법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를 인정 받습니다. 때문에 보존과 복원을 가장 우선시했는데요. 반대로 콘크리트의 기단부는 전시 공간으로서 현재의 관람객을 맞이할 수 있도록 변형했습니다. 바닥의 유리를 통해서 지하 시설을 엿볼 수도 있는데요. 발굴된 지하 공간은 오래된 건물의 옛 기능을 경험하고, 체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다양한 역사적 레이어는 이 공간을 한층 더 매력적으로 만듭니다. 1920년대부터 1980년대까진 농업사회의 기반이 되는 배수펌프장으로 활용되고, 1990년대부터 한국농촌공사의 공장으로 활용되었던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이후 방치된 기간의 낙서까지도 보존하고 있는데요. 작년에는 이 공간을 활용한 기획전 <빛이 깨울 때>를 통해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아티스트 그룹 사일로랩의 <반디>는 조명을 활용한 설치미술로, 마곡문화관의 암전된 공간은 빛을 강조하는 훌륭한 전시 공간이 되어주었습니다. 겹겹이 적층된 역사적 레이어는 과거를 만나는 공간으로서 현재의 가치를 사람들에게 설득하고, 공간의 소비기한을 미래로 연장합니다.
주소: 서울 강서구 마곡동로 161
동해 무릉별유천지 폐쇄석장
도시재생의 가능성을 엿본 문화공간
농업사회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준 것이 마곡문화관이라면, 동해 폐쇄석장은 산업사회의 얼굴을 띠고 있습니다. 석회석을 깨트리는 공간인 쇄석장은 석회석을 주재료로 하는 시멘트 산업의 주요 시설이었습니다. 동해시 무릉3지구에 위치한 폐쇄석장은 본래의 용도가 종료된 뒤, 2021년 복합문화공간으로의 리모델링을 마쳤는데요. 석회석을 채광하던 폐광산 전체를 관광 목적의 무릉별유천지로 바꾸면서 쇄석장과 같은 산업시설 역시도 새로운 공간으로 변모해야 했습니다. 시멘트 산업을 이끌었던 공간의 정체성을 살리되, 지역 시민과 관광객이 참여할 수 있는 문화공간을 만드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동해 폐쇄석장의 리모델링 과정에는 보존과 변용 사이의 고민이 엿보입니다. 기존 공간과 새로운 기능의 공간을 시각적으로 명확하게 분리하면서 주어진 과제를 풀어냈는데요. 특히 그대로 남겨둔 거친 콘크리트와 새롭게 덧붙인 매끈한 표면의 콘크리트 사이의 대비는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모습을 흥미롭게 그립니다. 다채로운 질감의 콘크리트는 시멘트 생산시설로서의 정체성 역시 잘 보여줍니다. 수직의 내부공간과 수평의 외부공간의 대비는 기존 쇄석장 공간에 대한 해석이자, 리모델링의 중심 축입니다. 내부를 가로지르는 계단과 엘리베이터는 쇄석장의 수직성을 강조하고, 공중에 부유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 전시 공간은 마치 크레인이 움직이듯이 수평으로 뻗어 나갑니다.
과거의 기억을 간직한 폐쇄석장은 박물관처럼 옛 기능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폐허의 분위기, 산업시설의 압도감을 선사합니다. 버려진 옛 공간은 훌륭한 스토리텔링의 자산이 됩니다. 리뉴얼된 동해 폐쇄석장은 관광시설로서 존재할 뿐만 아니라, 지역 문화의 거점으로 활용할 준비를 갖추고 있는데요. 이미 기능과 역할이 끝나버린 공간에서 새로운 문화적 가능성을 찾고, 도시재생의 출발점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동해 폐쇄석장은 공간의 소비기한을 재부여합니다.
주소: 강원 동해시 이기로 97
공간의 소비기한을 연장한다는 건 단지 건축물의 외형과 구조를 유지한다는 의미는 아닐 겁니다. 사람이 머무르고, 사용하는 공간으로 남아있기 위해선 유의미한 소프트웨어가 더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리모델링에 있어서 맹목적인 수명의 연장, 복원을 위한 복원보다는 현재의 사용자들에게 머무를 가치를 어떻게 제공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다행히 오래된 건축물은 그 자체로 역사적, 문화적 헤리티지를 잠재하고 있습니다. 이를 활용한 스토리텔링이 공간을 소비하는 이유가 되어줄 것입니다. 세 가지의 리모델링 사례를 살펴보며, 문화적 차원에서의 공간 소비기한에 대해 생각을 더해볼 수 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