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삶에서 많은 경계를 지나갑니다. 미성년에서 성인으로, 전공과 직업의 변화에 따라, 거주하는 지역이나 방식을 바꿔가면서요. 여러 경계와 변화를 맞닥뜨리며 우리의 세계가 넓어지고 내면이 견고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오늘 소개할 회화 작가 최예임은 삶의 변화와 경계를 마주하며 작품 세계를 넓혀갔습니다. 디자인에서 회화로, 독일에서 강릉으로, 작업과 삶의 경계에서 수많은 변화와 과정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며 나아갑니다. 다채로운 경험과 감각으로 가득 찬 그녀의 삶은 예술적 재료이자 행복을 전하는 도구가 됩니다. 작업실 겸 클래스 공간으로 운영되는 ‘아뜰리에 리베’에서 최예임 작가가 지나온 삶과 예술적 여정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디자인에서 회화로
예술적 여정의 전환점
작가 님을 처음 뵙는 분들께 자기소개 부탁드릴게요.
저는 평면 회화 작업을 하는 최예임입니다. 어릴 때부터 꾸준히 그림을 그려왔어요. 한국에서 예고를 다니고 디자인 대학 입시를 경험했죠. 그러다 독일 유학을 계기로 회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어요. 한국에서와 다른 전공으로 공부하게 된 것이 저에겐 큰 변화였죠. 디자인과 회화는 굉장히 달라요. 어떻게 보면 분야를 크게 바꾼 셈이죠.
작가 님께 두 가지 전환이 있었어요. 독일과 강릉을 오간 것, 작업 분야를 바꾼 점에서요. 먼저 살아가는 지역이 바뀐 것이 작품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여쭤보고 싶어요. 독일에서 강릉으로 돌아왔을 때 어떤 변화를 느끼셨나요?
독일에서 학교를 졸업한 지 3년이 다 되어갑니다. 한국에는 2021년에서 2022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돌아왔어요. 처음 일 년은 한국에 적응하는 시기였는데, 솔직히 처음엔 적응하지 못했어요. 독일이 그립기도 하고 한국에서 어떤 작업을 해야 할지도 막막했거든요. 일단 서울에 자리 잡고 새로운 것들을 배우면서 한국 생활에 적응해 가는 시간을 보냈어요. 1년 정도 지나니까 어수선하던 정신이 제자리를 찾더라고요. ‘다시 작업해야지’라는 마음이 번쩍 들었어요. 이후 2023년에 제 고향인 강릉으로 돌아와 작업실을 열고 작품 활동을 재개했어요. 그러면서 클래스도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독일에서 처음엔 베를린에 살다가 남부 지역으로 이주해 학교를 다녔어요. 남부 도시는 북부와 달리 따뜻하고 목가적인 분위기가 강해요. 아담하고 예쁜 마을들, 그리고 주변의 포도밭들이 많았죠. 그래서 자연적이고 포근하게 감싸주는 느낌의 작업이 많이 나오게 됐어요.
고향인 강릉에서 어릴 때부터 산과 나무, 바다를 일상적으로 접하며 자랐어요. 그래서 자연은 제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해요. 어릴 땐 이런 환경을 벗어나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성인이 되어 작업을 하다 보니 어릴 때부터 봐온 자연이 그대로 나오더라고요.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작업에 담기는 것이 신기했어요.
작업 분야를 20살 때 크게 바꾸셨어요. 예체능은 어린 나이부터 시작한 경우가 많잖아요. 당시 심정은 어떠셨나요?
그 당시엔 그림을 다시 배우는 느낌으로 시작했어요. 그림 외에는 관심 있는 게 전혀 없었거든요. 한국의 디자인 대학에서는 주로 컴퓨터로 작업을 했어요. 저는 아날로그에 더 익숙한 사람이라 손으로 직접 그리는 걸 좋아하는데, 컴퓨터로 작업하는 것이 어려웠어요. 디자인 프로그램을 다루거나 모니터 화면으로 봐야 하는 작업이 잘 맞지 않더라고요.
결국 ‘내가 하고 싶은 그림을 다시 시작해보자’라는 생각을 했어요. 이후 여러 방향으로 고민하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화가들이 거쳐간 유럽을 가야겠다고 결심했죠. 유럽에 대한 동경도 있었고요. 그렇게 독일에서 회화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림을 다시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여기까지 이어졌네요.
처음에는 어려움보다는 설렘과 즐거움이 앞섰어요. 하지만 전문적으로 공부하려고 보니 입시에 맞춰진 기술을 다시 잡는 게 쉽지 않았죠. 어린 아이가 그림을 처음 배우듯 손동작 하나하나를 다시 배워야 했어요. 지금까지 익숙했던 기술을 모두 내려놓고 새롭게 작업하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순수 미술인 회화는 작가의 생각이나 철학을 담아내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요. 반면 디자인은 개인의 생각보다 공공을 위한 목적이 더 중요해요. 또한 이전에는 대학 입시에 맞춘 기술에 집중했는데, 독일에서 배운 작업 방식은 달라서 적응하기 어려웠어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왜 이런 그림을 그렸는지 등 작업에 내 생각과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이 특히 어려웠죠.
강릉의 소박한 삶을 닮은 공간
아뜰리에 리베
작업 공간이 작품과 비슷한 무드를 가진 것 같아요. 강릉으로 돌아와 ‘아뜰리에 리베’를 오픈하셨다고요. 작가 님께 작업실은 어떤 의미인가요?
아뜰리에 리베는 학창 시절부터 꿈꿔온 이상적인 작업실이에요. 학교에서는 반 친구들과 작업실을 공유했는데, 정말 비좁고 자리를 두고 신경전도 벌어졌죠. 혼자 조용히 작업하고 싶어도 주변에 사람들이 있어서 온전히 집중하기 어려웠어요.
강릉에서 처음 제 작업실을 갖게 되었어요. 제 작품에 자연과 편안한 분위기가 많이 담기기에, 햇살이 잘 들어오는 작업실을 꿈꿨죠. 따뜻하고 창문이 크며, 식물이 가득하고 큰 나무 테이블이 있는 공간을 상상하며 관련 사진들을 모아두기도 했어요. 화려함보다는 소박함을 선호하는데, 이는 제가 살아온 삶과 닮았어요. 강릉에서의 소박한 삶, 어릴 적부터 함께한 식물들과 익숙함 같은 것들이 그대로 반영된 거죠.
이 공간에서 클래스도 함께 운영 중이신데요. 수강생 분들을 가르치고 교류하는 일이 개인의 삶이나 작업에도 영향을 주었나요?
저는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지만, 혼자만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아요. 혼자 행복해서는 완전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그래서 행복을 나누고 싶어요. 행복이 전염되어 퍼지면 좋겠어요. 화실에서 수강생들에게 더 많은 것을 전하려 노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에요. 나누고 베푸는 것이 당장은 손해처럼 보일 수 있지만, 결국 가장 큰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렇다고 억지스러운 마음으로 나누려고 해본 적은 없어요. 작은 것도 사랑하고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챙기다 보니 다른 이들에게 흘려보내는 것들이 특별한 노력 없이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더라고요.
이런 가치관을 제 작업에서도 이어가고 싶어요. 궁극적으로 저는 혼자만을 위한 작업을 하고 싶지 않아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교류하며, 제 행복감과 평안한 마음이 전해졌으면 좋겠어요.
자연의 생명력에서 발견한
순간적인 감각
작품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요. 화사한 톤의 색감이나 자연적인 소재가 자주 보이는데요. 주로 어떤 컨셉이나 주제를 다루시나요?
최근엔 제가 직접 경험한 장면의 ‘인상’을 주로 다뤘어요. 이는 순간적인 감정이자 감각이에요. 예를 들어, 작품 <여름 빛>은 여름 밤의 순간적 감각을 표현했어요. 지난 여름, 작업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낮에는 나오지 못하고 주로 밤에 귀가했어요. 낮의 무더위와 대조적으로, 밤이 되면 여름 밤의 냄새, 공기, 그 모든 감각이 마치 불빛처럼 느껴졌어요. 어둡지 않은 여름 밤, 시원한 공기와 함께 떠다니는 듯한 불빛들의 느낌을 <여름 빛>이라는 제목으로 담아냈어요.
추상적이지만, 직접 피부로 느꼈던 감각과 마치 눈앞에 보이는 듯한 환상적인 인상을 표현해요. 그래서 실제 본 장면을 그대로 묘사하기보다는 그 순간에 느낀 감정이나 생각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요. 이러한 인상들이 색깔, 형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캔버스에 옮겨지죠.
다음 작업으로 <물의 반영>을 그렸어요. 이번 여름 수영을 하러 자주 간 물가에서 영감을 얻었어요. 또한 제가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에서도 영감을 받았죠. 인상주의 화가를 좋아하는 것처럼 드뷔시, 라벨 같은 인상파 작곡가들의 음악을 즐겨 들어요.
특히 드뷔시의 ‘물의 반영’, 라벨의 ‘물의 유희’를 자주 들었는데, 이 곡들은 물의 움직임을 청각적으로 표현한 거예요. 저는 반대로 청각적으로 표현된 음악을 시각적으로 재해석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곡 제목을 그대로 작품 제목으로 가져왔어요. 물 속에서 보는 장면과 밖에서 물이 투명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볼 때 느낀 감정을 개인적인 해석을 담아 표현했어요.
지난 작업 중 꽃도 자주 등장하는 것 같아요. 꽃을 주제로 그리게 된 건 어떤 영향이 가장 컸나요?
꽃은 엄마의 영향이 가장 컸어요. 어머니께서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약 스무 살, 성인이 될 때까지 꽃집을 운영하셨거든요. 꽃이 저에게 주는 의미는 단순히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아요. 안정감을 주고, 어린 시절의 따뜻한 추억을 불러일으키며, 일상에 녹아든 상징적인 존재예요. 어릴 때 찍은 필름 사진을 보면 3분의 1 이상이 꽃집을 배경으로 한 것들이에요. 꽃집에서 뛰어놀고, 식사하고, 잠들며 보낸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죠.
꽃은 많은 작가들이 다루는 흔한 주제이기도 해요. 하지만 저에게는 특별한 의미로 영감을 주는 소재예요. 특히 어릴 적부터 쌓아온 추억이 담긴 이미지로 다가와요. 그래서 꽃을 주제로 작업을 시작하게 됐어요. 흥미로운 건, 제가 꽃을 그리면서도 왜 자주 그리는지 한동안 인식하지 못했다는 거예요.
일상에서
창작으로 향하는 과정
한 장면을 관찰하고, 철학적인 관점을 생각해보고, 이야기를 붙여나가는 과정이 신기해요. 다른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한 것들을 관찰하면서 감각을 느끼는 경험은 예술가의 특권인 것 같아요. 작업하는 과정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어요.
작가 노트를 쓰면서 깨달은 점이 있어요. 제가 인상적이라고 여기는 대부분의 것들에는 생명력이 있더라고요. 사람이나 사물보다는 자연의 섭리에 따라 변화하는 것들, 예를 들어 계절의 변화나 해가 뜨고 지는 현상 같은 것들에 더 관심이 가요. 이런 것들의 공통점을 찾다 보니 ‘생명력’이라는 키워드를 발견했어요.
그 순간을 잘 기억하려면 온몸으로 느끼는 게 가장 좋아요. 하지만 금방 잊어버릴 수 있어서 사진도 찍어두죠. 작업할 때는 이 사진을 보며 그때의 감정을 떠올리고 드로잉해요. 때로는 바로 큰 작업으로 넘어가기도 하지만, 확신이 없을 때는 드로잉을 여러 번 해보고 나서 큰 작업으로 옮겨가요. 다만 이 과정을 너무 오래 끌지는 않아요. 시간이 지나면 ‘잘 그려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순간의 감정과 인상을 놓칠 수 있거든요. 저는 느낌 없이 노동만 하는 그림보다는, 그 순간의 감정을 되새기며 즐기는 과정을 좋아해요.
작업 방식은 사람마다 달라요. 어떤 분들은 1부터 100까지 꼼꼼히 계획을 세우고, 스케치부터 물감 번호까지 정해놓고 작업하기도 해요. 하지만 저는 그런 방식이 잘 맞지 않아요. 대신 그 순간의 감정을 계속 떠올리며 작업해요. 처음에는 사진을 참고하지만, 나중에는 사진 없이 감정만 곱씹으며 작업해요. 내가 받은 인상을 계속 되새기면서 작품을 완성해 나가는 거죠.
작품을 통해 어떤 의도를 전하고 싶나요?
작업할 때는 개인적인 감정과 인상에 충만해 진행하기도 해요. 하지만 작업을 마친 후 결과물로서는 저에게나 감상자에게나 하나의 시각적 이미지로 전달되길 바라요. 그래서 화려하고 희망적이며 아름다운 색감의 그림을 주로 그리죠. 이런 스타일이 독일에서는 좀 튀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독일은 개념 미술이 발달해 철학적인 주제나 작가의 개성, 사회 비판적 시각을 강조하는 작품들이 많거든요. 그에 비해 제 작품은 다소 언밸런스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저는 작품에 치유의 의미를 담고 싶어요. 감상자들이 제 그림을 보고 위로받고,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이것이 제가 추구하는 작업이자 삶의 방식이에요. 저는 작가와 작품이 일치해야 한다고 믿어요. 진실되게 표현하고 싶고, 제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과 가치관이 작품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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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빠르고 짧게 지나가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순간의 감각에 온전히 집중하기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새롭고 자극적인 콘텐츠를 찾다가 지쳐서 잠드는 날이 많아지곤 하는데요. 자연의 생명력과 순간의 감동을 캔버스에 담아내는 최예임 작가의 작품은, 우리에게 일상 속 작은 순간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합니다. 어쩌면 예술은 사소한 것을 특별하게 바라보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나뭇잎에 햇빛이 통과하는 모습, 물이 출렁이며 움직이는 장면 등을 보며 관찰하고 감탄하는 것처럼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하게 느껴진다면, 그녀의 작업 과정을 따라 주위를 관찰해보는 건 어떨까요? 일상의 많은 순간을 빠르게 지나치는 우리에게 주변을 돌아보고 새로운 생명력을 발견하는 시간이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