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빠르다는 말을 가장 많이 하게 되는 시기인 연말입니다. 어른이 되어갈수록 새로운 경험을 하지 않고 익숙한 일상만 반복하게 되니, 인생의 체감 속도가 어릴 때보다 훨씬 빠르게 흐른다고 하죠. 같은 길을 걸어도 가는 시간보다 돌아오는 시간이 더 빠르게 느껴지는 것처럼요.
올 한 해 바쁘게 사느라 기억에 남는 순간이 없다고 느끼셨나요? 하지만 우리에겐 또 새로운 사계절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계절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으니, 계절의 경계마다 변화를 온전히 느끼고 행복해하는 일은 결국 우리의 몫이겠죠. 1년을 4개의 계절, 12개의 달, 24개의 절기로 섬세하게 나눠 누리기 위한 안내서가 되어 줄 책 세 권을 소개합니다.
바로 지금만 누릴 수 있는
행복에 대하여
『제철 행복』
“새해가 되면 1월부터 12월까지 한 해가 한눈에 보이는 연력을 펼쳐두고 제철 행복을 적어두는 루틴이 생겼다. 5월엔 여길 가야지, 7월엔 이걸 해야지 하는 목록들. 그렇게 내 일상에 ‘기다려지는 일들’을 미리 심어두는 게 좋았다. 자연에 마음을 기울이고 계절에 발맞추는 것만으로 잘 살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인생의 질문은 결국 ‘나에게는 무엇이 행복인가’로 돌아오곤 했는데, 나의 행복은 자주 제철과 자연에 머물렀다.”
_김신지, 『제철 행복』
24절기를 따라 1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면서, 각 절기마다 꼭 챙겨야 할 제철 행복에 대해 쓴 김신지 작가의 에세이 『제철 행복』입니다. 각 절기에 대한 소개와 저자가 그 절기를 보내는 법에 대해 이야기한 뒤, 마지막에는 독자들에게 제철 숙제까지 쥐어줍니다. 봄의 절기 곡우에는 ‘봄비를 기다리며 돌미나리전을 사 먹거나 해 먹어보기’, 여름의 절기 망종에는 ‘살구, 자두, 앵두처럼 장마 전에 먹어야 더 다디단 과일 찾아 먹기’처럼 그 계절에만 할 수 있는 작지만 중요한 일들이지요.
이렇게 주어지는 숙제들은 나중으로 미룰 수 없습니다. 부지런히 숙제를 마치지 않으면 그 계절이 다시 돌아오기까지 1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려야 하죠. 그렇기 때문에 이 숙제들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계절과 절기를 핑계 삼아 제철 행복을 부지런히 좇는 일은 사실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걱정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를 현재로 데리고 오는 일이기도 합니다. 먹고사는 일에 치여 종종 계절의 아름다움을 놓쳤다면, 이 책을 머리맡에 두고 매 절기마다 펼쳐보세요. 저자가 내주는 제철 숙제만이라도 성실히 해낸다면, 그 어떤 해보다 자주 행복하고, 자주 주변을 돌아보는 1년을 보낼 수 있을 거예요.
“일만 하다가 한 해가 다 간 것 같고, 기념할 만 한 일이 좀체 없었던 것 같지만 얘기하다 보면 알게 된다. 돌아보면 좋은 순간들도 많았다는 걸. 예고 없이 슬픈 일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기다리면 다시 웃는 일도 생기는, 그게 삶이기도 하다는 걸.”
_김신지, 『제철 행복』
누군가에게 절기마다 띄우는 편지
『어떤 비밀』
“청명, 봄이 오기를 기다리며 겨우내 미뤄두었던 것들을 하기 좋은 때라고 합니다. 당신은 무엇을 미뤄두었나요. 나는 미움을 미뤘습니다. 더 사랑하기 위해서요.”
_최진영, 『어떤 비밀』
『구의 증명』, 『단 한 사람』 등 사랑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소설가 최진영 작가의 첫 산문집 『어떤 비밀』입니다. 저자의 연인은 제주의 바닷가에서 뾰족한 세모 지붕 아래 넓은 창이 하늘을 비추는 카페 ‘무한의 서’를 운영합니다. 저자는 연인의 카페에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 소설가의 특기를 살려 절기마다 편지를 씁니다. 그리고 카페를 찾는 손님들에게 절기를 담은 다정한 편지를 건네죠. 실제로 저자의 편지를 받고 싶어서 일부러 이 카페를 찾는 손님들의 이야기도 꽤 많이 보여요.
『어떤 비밀』은 손님들에게 건네진 절기 편지에 저자의 산문을 더해 만들어진 책입니다. 특히 편지라는 형식이 이 글들을 더 돋보이게 해주는데요. 저자는 편지를 통해 여름의 절기 대서엔 당신은 어떤 여름 음악을 듣는지 묻고, 가을의 절기 백로에는 가을의 카디건과 머플러를 미리 꺼내둘지 묻습니다. 누군가를 위한 편지를 쓰는 일 그리고 아무 이유 없이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일이 줄어드는 요즘, ‘잘 지내시나요.’라는 말로 시작하는 편지를 절기마다 받는 기분은 꽤나 근사합니다.
“불행해도 괜찮으니까 함께하자는 사랑”을 전하는 저자의 편지 묶음인 이 책을 절기마다 마다 꺼내 읽어보세요. 시간에 끌려가며 살아가는 일상에 내가 잘 지내고 있는 게 맞는지 온도를 체크하는 마디가 되어줄 거예요.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계절을 핑계 삼아 안부를 묻는 편지를 쓰고 싶어 질지도요.
“별빛은 과거의 소식. 함께 과거를 볼 수 있어 다행입니다. 곧 꽃샘추위가 몰려올테고 그 또한 ‘우수 뒤 얼음같이’살살 녹을거예요. 별빛과도 같은 우리의 시간을 믿으니까 봄, 여름, 가을, 지나 다시 올 겨울에 저 멀리서 빛나는 가장 밝은 과거를 함께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오늘도 사랑한다는 고백이에요.”
_최진영, 『어떤 비밀』
열두 명의 시인이 들려줄 열두 달
난다 출판사의 시의적절 시리즈
난다 출판사의 새로운 에세이 시리즈 ‘시의적절’은 열두 명의 시인이 한 달에 한 권의 에세이를 출간해 일 년을 채워가는 프로젝트입니다. 각 책에는 매달 하루에 한 편씩 읽을 수 있도록 한 달의 날짜가 목차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올해 1월 시의적절 시리즈의 첫 편으로 난다 출판사의 대표인 김민정 시인의 책 <김민정의 1월 – 읽을, 거리>를 출간했고, 최근 <김복희의 12월 – 오늘부터 일일>까지 출간되었습니다. 이로써 총 열두 권의 책을 채우며 올해의 시의적절 시리즈가 마무리되었네요. 시, 에세이, 일기와 사진, 인터뷰까지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다양한 문체를 보여주는 시인들이 각자의 달을 보내는 모습을 담아냅니다.
매달 출간되는 시리즈인 만큼 각 권마다 그 달의 계절감과 정서가 듬뿍 묻어납니다. 봄의 푸르름과 풍요로움을 담아낸 5월 오은 시인의 『초록을 입고』, 여름을 싫어한다고 말하고 싶지 않기에 조금은 사랑해 보고자 노력하는 차분한 여름을 담아낸 8월 한정원 시인의 『내가 네 번째로 사랑하는 계절』, 한 해의 끝인 12월에 시작을 말하는 김복희 시인의 『오늘부터 일일』까지 시인들의 관점에서 보는 색색의 계절을 내보입니다.
시의적절 시리즈는 말 그대로 시의적절하게 독자의 앞에 도착해, 매 달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약 30일이라는 시간을 마주할 태도를 정돈할 기회를 마련합니다. 내년에도 계속 이어질 이 시리즈를 따라 읽으며 달마다 느껴지는 미세한 계절의 변화를 알아채는 한 해를 보내보시면 어떨까요?
“여름에는 정말 미심쩍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게 아닐까. 중지되고 정체되는 감각. 여름을 제일로 사랑했다면 다르게 느꼈을지도. 하지만 여름은 내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이다. 세 번을 거쳐 온 마음은 미약하다. 그래도 싫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은 마음. 한껏 사랑할 수 없다면 조금 사랑하면 되지.”
_한정원, 『내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
시의적절 한정원의 8월, 『내가 네 번째로 사랑하는 계절』 구매 페이지
시의적절 오은의 5월, 『초록을 입고』 구매 페이지
손때 묻은 올해의 일기장과 새하얀 내년의 일기장을 번갈아 들여다봅니다. 빈칸이 가득한 내년의 일기장엔 무수한 가능성과 희망이 펼쳐져 있네요. 색색의 플래그와 즐거웠던 공연의 티켓, 누군가에게 받은 다정한 쪽지가 모여있는 올해의 일기장도 작년 이맘때에는 이렇게 빈칸이었겠죠. 시간이 경계 없이 흘러가 버린 올해를 반성하고 있다면, 내년에는 꼭 모든 계절을 부지런히 누리겠다는 다짐을 해봅시다. “나중에” 라는 말없이, 지금만 누릴 수 있는 유일한 행복들을 다 찾아내고야 말겠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