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적인 이미지 중심의 공간으로 보이는 미술관에도, 살펴보면 언어가 숨어 있습니다. 전시 서문과 작품 레이블, 카탈로그와 도록, 공간 이용에 대한 사이니지까지. 미술관이라는 공간에 들어서면 생각보다 많은 텍스트를 발견하게 됩니다. 혹시 미술관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 좌절하거나, 미술관을 어려워해 본 경험이 있나요? 복잡한 이론을 기반으로 하는 예술 언어는 자칫 관람객에게 차별과 박탈감을 안겨주기도 하는데요. 이에 공공 미술관에서부터 미술관의 ‘쉬운 글쓰기’를 강조하는 움직임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현대미술 글쓰기』의 저자인 길다 윌리엄스는 훌륭한 아트라이팅의 특징을 ‘쉽고 간단하게 쓰기’로 요약했습니다. 쉽게 쓰기는 말처럼 쉬운 과정은 아닌데요. 출발점은 언어가 보이지 않는 경계를 만든다는 걸 인식하는 데 있습니다. 미술관의 언어는 어떤 경계를 만들고, 또 어떤 방식으로 경계를 지우려고 할까요? 미술관에서 쉬운 글쓰기를 실천하는 과정에 대해 세 가지 경계를 축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전문가와 보통 관람객의 경계
미술관이 다루는 예술의 분야는 더 광범위해지고, 예술 이론은 더 복잡해집니다. 작품과 전시를 쉬운 언어로 소화해 내지 못하면 관람객들에게 미술관이 어려운 공간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는데요. 전문가만 이해하는 어렵고, 복잡한 언어는 미술관의 문턱을 높이고, ‘난해하다’는 비판을 만나기도 합니다. 비판의 핵심에는 소외와 위축을 부추기는 언어적 경계가 있는데요. 보통의 관객과 만나기 위해 전문가의 언어 경계를 벗어난 쉬운 언어로의 도약이 필요합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진행된 《연결하는 집: 대안적 삶을 위한 건축》 전시는 건축계 종사자나 전문가가 아닌 일반 관람객도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소통합니다. 어려운 건축 용어 대신 쉬운 일상어를 선택했는데요. ‘작은 집’, ‘고친 집’, ‘동물과 식물과 함께 사는 집’과 같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를 활용해 전시를 구성했습니다. 전시를 마무리하는 에필로그에서는 건축에 종사하지 않는 일반 관람객도 전시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도록 ‘집에 대한 능동적 탐구와 실천을 통해 거주에 대한 각자의 상상을 현실화’하길 요구합니다. 도면, 사진, 영상 등의 아카이브된 자료 위주의 전시 공간과 더불어 건축 치수를 몸으로 체감하는 체험 공간을 마련하고, 전시의 내용을 개인화해보는 워크북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쉬운 글(Easy Read) 프로젝트를 주관하며, 《미래긍정: 노먼 포스터, 포스터+파트너스》 전시 연계 프로그램으로 쉬운 글쓰기 워크숍을 진행했습니다. 워크숍에는 관객과 함께 건축 용어 해설집을 만드는 프로그램도 있었는데요. 일반 건축 용어와 노먼 포스터 건축 용어를 나누고, 워크숍에 참여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 새로운 정의의 사전을 구축했습니다. 건축계 종사자와 일반 관람객의 참여로 건축 용어를 재정의하는 일은 전문가와 보통 관람객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 이전에도 서울시립미술관은 정보 소외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적 기업, ‘소소한 소통’과 협업해 쉬운 해설을 제공해 왔는데요. 전문가가 아니어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글을 만들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느린 학습자의 경계
정보를 이해하는 과정과 속도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누군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외계어처럼 들릴 수도 있는데요. 발달장애, 지적장애가 있거나 글을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 미술관을 즐기기 위해서, 언어는 더 쉬워져야 합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느린 학습자’를 위해 별도의 해설 프로그램을 제공해 왔는데요. 일반 해설 프로그램보다 더 쉬운 전달 방식을 고민했습니다. 또, 서울시립미술관의 《시적 소장품》 전시에서는 작품을 소개하는 레이블 옆에 ‘쉬운 해설 레이블’을 별도로 제작했는데요. 작품을 더 쉽게 해설하기 위해 단어와 문장구조를 바꾸며 내용을 재조직합니다.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추상적 표현과 개념어를 덜어내는 경험을 하는데요. 쉬운 글과 더 쉬운 글에 대한 연구는 미술관 감상의 폭을 훨씬 더 넓혀줍니다.
사회적 기업 ‘소소한 소통’은 느린 학습자들을 위해 언어의 단순화뿐만 아니라 언어가 보이는 방식도 무척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모든 텍스트가 보기 쉬운 위치에 배치되어야 하고, 가시성이 높아야 하죠. 이를테면 벽에 부착하는 사이니지는 유아차를 탄 어린이나, 휠체어를 타는 어른도 볼 수 있는 높이에 있어야 합니다. 알아보기 쉽도록 서체나 글자 크기 등의 UX도 고려해야 하고요. 한편, 전시와 작품 내용을 텍스트가 아닌 영상·이모티콘으로 소개하거나, 청각과 촉각을 활용하는 전시 해설을 제안하기도 합니다. 시각 및 청각 장애를 가진 관람객의 작품 접근성을 높이고, 비장애인 관람객에게도 전시 체험의 다양성을 선사하는 일입니다. 이처럼 언어에 대한 다양한 접근 가능성을 고려하는 일은 숨어 있던 많은 경계를 허물고, 다채로운 관람 방식을 포용합니다.
어린이의 경계
조용히 작품을 감상해야 하는 미술관은 어린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공간일까요? 어린이에게는 어떤 방식으로 미술을 노출하고, 미술관과 만나게 해줄 수 있을까요? 많은 미술관에서 어린이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합니다. 아예 별도의 어린이미술관을 마련하기도 하는데요. 국내에도 경기도어린이박물관이나 현대어린이책미술관(MOKA), 광주시립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 내 어린이미술관, 성북어린이미술관 등 어린이를 위한 전시 공간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동일한 전시도 어린이들에게는 어렵게 느껴질 텐데요. 어린이미술관은 성인과 어린이의 차이를 이해하고,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는 전시를 제공합니다. 전시 기획에서부터 정보의 난이도를 고민하는데요.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언어를 활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오감을 활용해 전시가 즐거운 놀이처럼 느껴질 수 있도록 만듭니다.
쉬운 언어, 짧은 언어, 생동감 있는 언어, 어린이 관점의 텍스트 사이니지 등 미술관에는 어린이를 위한 언어도 필요합니다. 어린이 전시만의 독특한 특징 중에 의성어와 의태어를 적극 활용하는 점도 주목할 만한데요. 어린이들도 미술관에서 성인들과 마찬가지로 감각을 확장하고,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죠. 동시에, 미술관의 언어 사전 스펙트럼을 넓히기도 합니다. 어린이 친화적인 언어와 교육 프로그램은 어린이에게도 문화생활을 향유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어린이들은 미술관의 조기 학습자인데요. 미술관의 언어가 어린이를 향해 문을 여는 것은 다음 세대에도 미술관을 지속하기 위한 당연한 선택입니다.
미술관에서 쉬운 언어를 만들기 위해 적용하는 공통적인 원칙이 있다면, ‘추상적인 표현은 줄이고, 구체적인 표현 쓰기’, ‘쉽고 간단하게 쓰기’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좋은 글의 원칙이기도 한데요. 쉬운 언어를 쓰려는 노력은 분명 좋은 글을 쓰려는 일과 맞닿아 있습니다. 좋은 글은 본질적으로 글을 읽는 독자를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고려하기 때문일 겁니다.
하나의 텍스트를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쓰기는 당연히 어렵지만, 언어가 가진 경계 짓기의 특성을 이해하는 일은 분명 중요합니다. 언어를 이해하는 일은 오롯이 수용자의 몫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이해의 책임을 전가하는 불친절한 언어가 차별과 경계를 공고히 만들기도 하는데요. 미술관에서 고민하는 쉬운 언어는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이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경계의 벽을 허뭅니다. 어떠한 개인의 차이도 문화생활을 즐기는 데 방해되지 않도록 섬세한 언어가 필요한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