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규정하고 분류하길 좋아합니다. 어떤 대상을 파악한 뒤에는 꼭 그와 유사한 것을 찾아 묶어내곤 하죠. 그렇게 설정한 경계는 우리가 그 영역 안팎의 일들에 무심해지도록 만듭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무언가를 둘러싼 맥락은 바뀌기 마련이고, 우리는 끊임없이 경계와 인식을 다듬어야 합니다. 이런 문제는 내게 밀접하고 익숙한 대상일수록 자주 발생하지만, 동시에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재인식을 등한시하게 되는 또 다른 문제를 낳습니다.
K-Pop 만큼 현재 대한민국 청년 전반에 가까운 문화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 중 대다수는 청소년기를 거치며 적어도 한 번은 K-Pop 아티스트와 노래, 뮤직비디오에 빠졌을 확률이 높죠. 하지만 위에서 설명했듯, 대한민국에서 성장한 이들이 K-Pop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K-Pop을 어떤 기준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요? K-Pop을 구성하는 요소는 무엇이며, 무엇이 K-Pop에 속하거나 속하지 않을까요? 혹은, 애초에 K-Pop이라는 구획을 설정하는 경계 자체가 희미해 우리가 규정할 수 없는 건 아닐까요? 지금부터 그 경계를 찾거나 놓아버리기 위해, K-Pop의 경계를 뒤흔드는 다양한 그룹과 작품을 살펴보겠습니다.
흔들리는
K-Pop의 경계
XG, 경계를 뒤흔드는 과격한 움직임
K-Pop의 경계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킨 그룹은 K-Pop 내부에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시스템과 작법을 완벽히 흡수해 경계를 교묘하게 오가는 이들로부터 시작됐죠. 한일 혼혈이자 미국 국적을 지닌 프로듀서 제이콥스JAKOPS가 제작한 엑스지XG가 그 주인공입니다. XG는 일본의 거대 엔터테인먼트 기업 AVEX의 자회사 엑스갤럭스XGALX에서 제작한 걸그룹입니다. 멤버 전원이 일본 국적, 혹은 일본계로 구성되었고, 영어를 기반으로 한 작사법을 선보이고 있죠. 하지만 XG라는 그룹을 제작하는 단계부터 현재의 활동까지, 그 경로를 포괄하는 시스템은 K-Pop을 기반으로 두고 있습니다. 철저한 트레이닝과 기획, 대규모 자본과 다매체적 작품 활동, 팬덤과 아주 친밀한 마케팅 등이 그렇죠. 이렇듯 XG의 구성 요소는 그 자체로 K-Pop 산업과 팬덤 내외의 논란을 촉발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더구나 그들 스스로 K-Pop이 아닌 새로운 아이돌 팝을 표방한 X-Pop 아티스트로 규정하는 과정에서, 모회사 대표의 비하성 발언과 멤버의 경솔한 답변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XG는 K-Pop 아티스트인가?’라는 논란은 여전히 혼란을 남기고 있음에도, ‘XG가 선보이는 활동이 K-Pop에 포함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메인 프로듀서 제이콥스와 챈슬러를 중심으로 수많은 프로듀서가 참여하는 음악의 퀄리티는 두 말할 것 없고, 에스파aespa, 스테이씨STAYC, 아일릿ILLIT 등 최근 가장 사랑받는 안무를 담당한 레난Renan의 디렉팅으로 짜여진 퍼포먼스도 작품의 매력을 강화하죠. 여기에 더해 한창 뜨거운 주가를 달리는 사진 기반 아티스트 조기석이 구축한 뮤직비디오 비주얼과 세계관은 기존 K-Pop과는 사뭇 다른 감각을 제시합니다. XG를 규정하는 시각은 모두가 다를지라도, 그들의 작품 활동이 작금의 K-Pop의 경계를 흔들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K 바깥에서 느끼는
K-Pop의 향취
babyMINT, K-Pop의 자극을 이식하다
대만의 서바이벌 프로그램 <NEXT GIRLZ (未來少女)>에 출연한 베이비민트babyMINT는 정식 데뷔 전부터 국내 음악 업계 관계자 및 케이팝 팬덤의 화제를 모은 그룹입니다. 해당 프로그램에서 선보인 무대 중 ‘Hellokittybalahcurrihellokitty美味しい’, ‘2023: BBMeme ODYSSEY’ 등의 곡은 마치 2010년대 K-Pop을 휩쓸었던 이른바 ‘병맛 코드’와 맞닿은듯했죠. 괴상하리만치 자극적인 곡 구성과 과격한 퍼포먼스, 인터넷 밈을 녹여낸 음악은 보고 듣는 이의 실소를 자아냈지만, 사실 그 이면에서 드러나는 캐치한 멜로디와 매력적인 프로듀싱은 그들을 사로잡기 충분했습니다. babyMINT는 곧 대중음악 및 K-Pop 업계 종사자, 비평가, 팬덤에 언급되었고, 그들은 과잉된 감각과 끊임없는 자극을 선보이던 십여 년 전의 K-Pop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죠.
앞서 소개한 곡 외에도, 최근 발매한 첫 번째 미니 앨범의 타이틀곡 ‘心悸寶貝 BIUBIU (BB Gals of the Galaxy)’의 뮤직비디오는 일론 머스크와 마크 저커버그를 렙틸리언으로 등장시키는 기행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괴한 작품 바깥에는 유려한 R&B와 부드러운 일렉트로닉 장르를 결합한 ‘Ocean Bomb’, 당시 트렌디한 힙합 장르인 드릴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ICKY蛙化 °(╭╮)°’ 등 K-Pop에 충분히 비견할 만한 작품이 존재합니다. 만약 최근 K-Pop에서 사라진 자극과 재미를 찾는다면 babyMINT의 원초적인 감각이 새로운 재미를 제시할 것입니다.
f5ve, 뿌리내린 한류를 흡수한 J-Pop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일본의 댄스•보컬 그룹 에그자일(EXILE)이 속한 LDH는 지난해 5인조 걸그룹 파이비f5ve를 선보였습니다. 음악과 비주얼은 물론, 주요 활동 영역에 이르기까지 파이비는 명백히 일본 내수시장을 공략하는 듯 보이는데요. 그룹의 제작 과정이나 구성 요소는 분명 K-Pop과 거리가 있지만, 그룹의 세계관을 중심으로 콘셉츄얼한 작품을 선보이는 방식, 그리고 babyMINT와 마찬가지로 과잉된 비주얼과 장르적인 음악을 활용하는 방식 등에서 K-Pop의 면모를 엿볼 수 있습니다.
‘차원을 넘나드는 드림 에이전트’라는 세계관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독특한 음악은 f5ve만의 정체성을 구성합니다. f5ve로서 시작을 알린 ‘Lettuce • レタス’의 기이한 콘셉트는 물론, 많은 화제를 모은 ‘Underground’의 댄서블한 드럼 비트와 하이퍼팝을 연상시키는 신디사이저 질감은 분명 K-Pop의 과격함과 닮아있죠. 나아가 최근 발매된 ‘UFO’의 뮤직비디오와 스타일링에서 돋보이는 비주얼도 주목할만합니다. f5ve는 수십 년 전 일본을 덮친 한류의 기세가 일본의 대중문화와 연결되는 지점을 명확히 그려냅니다. 무엇보다 같은 음악 시장 안에서 K-Pop의 문법을 적극 활용했을 때, 일본 대중문화 특유의 매력적인 기괴함이 극대화되는 효과를 자아내는 역량을 엿볼 수 있죠.
BINI, K-Pop을 모델 삼아 세계로 나아가다
2021년 필리핀의 보이그룹 SB19이 방탄소년단과 함께 빌보드 뮤직 어워즈 ‘톱 소셜 아티스트’ 부문 후보에 선정되어 화제 된 바 있죠. 필리핀 최대 방송사 ABS-CBN이 제작한 오디션 프로그램 <Star Hunt Academy>에서 탄생한 걸그룹 비니BINI는 최근 다방면에서 훌륭한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지난 7월 발매한 싱글 ‘Cherry On Top’은 스포티파이, 유튜브 등 온라인 플랫폼에서 놀라운 기록을 세웠고, 트와이스, 태연, 클레어오Clairo 등 다양한 아티스트와 함께 <Teen Vogue>가 게재한 ‘이 주의 추천곡’에도 소개되었습니다. 동남아시아 권역에서는 일찍이 화제를 모아 현재 그룹 공식 계정은 물론 모든 멤버가 수백만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보유하고 있고요.
특히 대중음악 산업에서 변방국으로 취급받던 필리핀과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뜨겁게 떠오르는 아티스트라는 점에서 BINI를 주목할만합니다. 2024 KCON에서 선보인 ‘Cherry On Top’은 물론 ‘Karera’, ‘Salamin Salamin’ 등의 트랙의 만듦새도 아주 훌륭하고, 올해 시작한 단독 콘서트 ‘Biniverse’는 필리핀 전역을 넘어 북미 투어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몇 달 전 그래미 어워즈가 발행한 기사에서 영국의 R&B 트리오 플로FLO, 우리나라의 키스오브라이프KISS OF LIFE, 이후 소개할 비춰VCHA, 니쥬NiziU 등 그룹과 함께 소개되었을 만큼 전 세계 음악시장에서 주목받는 BINI와 동남아시아의 아이돌 팝이 일으킬 돌풍에 관심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K-Pop의 나라에서
K 너머로 나아가기
K-Pop의 해외 진출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보아의 전례 없는 활약을 시작으로 동방신기, 카라, 소녀시대, 슈퍼주니어 등 동아시아권 진출을 목표로 한 2000년대, ‘강남스타일’의 기록을 이어 방탄소년단, 블랙핑크 등 본격적인 세계화를 도모한 2010년대의 사례가 우선 포착됩니다. 특히 2010년대 K-Pop의 세계화에서 주목할 점은, 에이티즈, 드림캐쳐 등 국내보다 해외 시장에서 먼저 주목받은 그룹의 등장에 있죠. 마지막으로 최근 K-Pop 산업은 해외 진출을 넘어, 해외 현지화를 향한 열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국 시장을 타겟팅 한 아티스트가 해외 시장에 적합한 활동을 전개하는 방식을 넘어, 아예 해외 시장에 적합한 아티스트를 제작해 해당 시장을 기반으로 성장하는 모델을 찾은 것이죠.
SM의 웨이션브이WayV, 엔시티 위시NCT WISH, JYP의 니쥬NiziU, 보이 스토리BOY STORY, HYBE의 앤팀&TEAM 등 아시아 권역을 기반으로 한 현지화 그룹은 비교적 익숙한 편입니다. K-Pop이 공유하는 문화적 맥락은 물론, 아주 가까운 인종 및 민족의 멤버로 구성된 그룹이기에 거부감도 덜한 편이죠. 그러나 최근에는 영미권을 타깃으로 SM의 디어 앨리스Dear Alice, JYP의 비춰VCHA, HYBE의 캣츠아이KATSEYE 등 아시아계 멤버 비중이 적거나 아예 없는 현지화 그룹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K-Pop의 트레이닝과 오디션, 서바이벌의 과정을 거쳐 제작된 그룹으로, 각자의 콘셉트와 다채로운 콘텐츠를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합니다.
이는 곧 K-Pop이 글로벌 시장에 진출한 지도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한국을 넘어 전 세계에서 K-Pop을 바라보는 관점을 투영합니다. 여전히 우리나라에서는 기존 K-Pop의 요소를 포함하지 않는 그룹에 단호히 거리를 둡니다. 그러나 지금 K-Pop이 노리는 글로벌 시장에서는 단지 한국인과 동아시아 국적의 멤버로, 혹은 한국어나 한국 시장을 기반으로 제작되는 아티스트와 작품만을 K-Pop으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K-Pop 특유의 기획•제작 시스템, 그리고 팬과 아주 밀접하고 적극적인 마케팅을 하나의 방법론 삼아 그 산업을 이해하고 응용하는 모습이죠.
엄밀한 구획화는 오히려 영역 안팎의 단절을 유도합니다. 그 이름에 명시된 ‘한국’의 흔적 때문이든, 우리나라 대다수 국민의 성장기에 큰 영향을 끼친 경험 때문이든 K-Pop은 유독 더 철저한 경계 설정을 요구받는 것처럼 보이죠. 하지만 K-Pop은 태초에 명확한 기준을 두지 않았고, 그 덕에 수많은 장르를 흡수하고 여러 콘텐츠를 생산하며, 국가와 시장을 가리지 않는 확장을 이룩했습니다. 여전히 K-Pop을 향한 관점도, 기준도 혼란스러운 지금, K-Pop의 경계를 세심하게 설정하고 그 안팎을 완전히 분리하는 방식은 유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경계는 때로 내부를 지키는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외부를 배척하는 일을 맡으니까요. 오히려 K-Pop이 포용할 수 있는 경계를 더 흐릿하게 만들어 경계를 확대한다면, 지금까지 K-Pop이 그랬듯 더 많은 가능성과 더 넓은 영역을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건 K-Pop의 고유한 특성을 분석하는 동시에 K-Pop이 담을 수 있는 경계를 확장하는 과정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