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점을 허무는
국내 패션 브랜드

표현의 경계를 넓히기 위해
눈 여겨 볼만한 국내 브랜드 3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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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명사가 된 브랜드 제품들이 있습니다. 투명 테이프(Clear Tape)를 지칭하는 단어로 굳어진 3M의 스카치 테이프처럼요. 오프로드 자동차를 흔히 ‘짚차’라고 부르는데, 이는 지프(Jeep)를 가리키는 말이죠. 약국에서 두통약을 찾을 때 ‘아스피린 주세요’ 하신 적 있으신가요? 아스피린도 사실 독일 제약회사 바이엘(Bayer)의 해열제 상표 이름입니다.

이처럼, 특정 상표가 유명해져 제품군 전체를 가리키는 일반 명칭으로 인식되는 현상을 ‘상표의 일반화’라고 합니다. ‘초코파이’처럼 상표 관리에 소홀히 해 누구나 쓸 수 있는 명칭이 되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업계 선두를 달리고 있는 브랜드의 상표명이 널리 쓰입니다. 그 이유는 가장 많이 쓰이고 보편적이기 때문입니다.

패션에도 ‘상표의 일반화’와 유사한 현상이 있습니다. 스카치 테이프, 지프처럼 1대1로 제품을 지칭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어떤 제품을 사려면 특정 브랜드의 제품을 사야 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해당 브랜드를 사용하지 않으면, 패션 감각이 떨어지거나, 무지한 소비자로 취급되거나, ‘가성비’라는 명목으로 소비의 가치가 떨어지기도 하고요. 필자는 이런 현상이 ‘패션의 일반화’와 ‘독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패션의 일반화라는 경계 안에 있습니다. 브랜드가 의도했을 수도, 우리가 스스로 갇힌 걸 수도 있죠. 중요한 건, 경계 밖에서도 패션 브랜드는 태어나고, 소비자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굵게 그어진 경계 안에서 발을 내딛으면 더 다양한 선택지가 나타납니다. 독점을 허물며 소비자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는 국내 패션 브랜드 3곳을 소개합니다.


캐치볼
(Catch Ball)

캔버스화

캔버스화는 캔버스로 만든 신발이다

이미지 출처: 캐치볼 스니커즈 공식 홈페이지

면을 튼튼하게 직조한 평직물을 캔버스(Canvas)라고 부릅니다. 밀도가 높아 튼튼하고, 내구성이 좋아 과거에는 범선의 돛에 많이 쓰였으며, 흡수력이 좋아 예술계에서도 애용하는 직물입니다. 가방이나 신발에도 주로 쓰이는데요, 캔버스로 만든 신발을 ‘캔버스화’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캔버스화’라고 부르기보다는, 컨버스(Converse)가 더 익숙하지 않으신가요?

컨버스는 캔버스화를 지칭하는 대표적인 단어로 자리 잡았습니다. 서문에 언급한 ‘상표의 일반화’의 사례에도 포함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튼튼한 천과 고무 솔로 이루어진 캔버스화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오래된 브랜드이니만큼 ‘천으로 만들어진 고무 스니커즈!’ 하면 컨버스가 떠오릅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컨버스를 신고 다니기도 하고요.

이미지 출처: 캐치볼 스니커즈

별 모양 심볼과 날렵한 실루엣, 컨버스라는 이름과 합리적인 가격. 캔버스화를 찾을 때 컨버스를 고려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만, 필자에게 컨버스는 꽤 불친절한 신발이었습니다. 발볼이 넓어서 신는 것보다 고문에 가까웠습니다. 겨우 꾸겨 넣으면 얼마 못 가 옆창이 다 터졌죠. 컨버스를 신으면 어디를 가도 컨버스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하철 맞은편에 앉은 사람의 신발도 컨버스, 직장 동료의 신발도 컨버스. 온 세상 사람들이 컨버스를 신는 것만 같았습니다. 캔버스화는 컨버스밖에 없고, 그 이외의 다른 브랜드들은 캔버스화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했죠. 그러다가 캐치볼(Catch Ball)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캐치볼을 신고 있죠.

캐치볼은 국내에서 캔버스화를 만들고 있는 브랜드입니다. 필자가 캐치볼에 끌렸던 이유는 상세한 설명 때문이었습니다. 요컨대 컨버스를 살 때는 어떤 의도로 디자인했는지 궁금하지 않잖아요. 단지 ‘컨버스’라는 이유로 구매하는 거니까요. 캐치볼은 ‘20세기 군용 운동화 복각 운동화’를 지향합니다. 그래서 앞코를 왜 동그랗게 디자인했는지, 원형은 어떤 모양인지 아주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그냥 캔버스화랑 다르구나’라는 인상을 주는 것이죠.

이미지 출처: 캐치볼 스니커즈 공식 홈페이지

캔버스화의 가격대는 다양합니다. SPA 브랜드, 컨버스, 명품 등 만듦새는 비슷비슷해 보이는데, 가격 차이가 큽니다. 캐치볼은 무료 배송, 교환, 수선을 브랜드 전략으로 내세울 정도로 품질에 진심입니다. 착화감에도 신경 써 기존 캔버스화에서 보기 힘든 밴딩 라인을 푹신하게 추가했고, 캔버스 소재도 튼튼하게 짜인 것만 사용하고 있지요. 신다 보면 컨버스보다 비싼 가격대가 이해가 갑니다.

최근 캐치볼은 생산 공장을 이전하면서 제품 라인업을 재정비했습니다. 필자도 한 켤레 새로 구입했는데요, 이전 모델들보다 좀 더 튼튼하고 견고하게 만들어졌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착화감도 여전히 좋고요. 브랜드 이름보다 좋은 캔버스화 한 켤레를 장만하고 싶으시다면, 캐치볼은 좋은 선택지가 될 겁니다.


WEBSITE : 캐치볼 스니커즈
INSTAGRAM : @catchball.official


데밀
(Demil)

청바지

국산 데님도 뒤지지 않는다

이미지 출처: 데밀 공식 홈페이지

필자는 사계절 내내 청바지를 입습니다. 어느 때에 입어도 기본은 하거든요. 격식을 차려야 하는 비즈니스 미팅부터 경조사에서도 청바지를 착용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이용자의 생활 습관에 맞추어 색이 바래고, 옷이 변형된다는 점도 매력적입니다. 이 정도까지 깊게 즐기지 않으셔도 옷장에 청바지 하나쯤은 있으실 겁니다. 그야말로 에센셜한 아이템이죠.

청바지는 유래가 뚜렷한 옷입니다. 리바이스(Levi’s)에서 만든 작업복이 그 시작이었으니까요. 튼튼하고 질겨 거친 노동 현장에서 막 입기 좋은 바지였습니다. 거칠게 염색한 이 바지를 할리우드 스타들이 하나둘 입기 시작하면서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 잡은 거죠.

이미지 출처 : 데밀 공식 홈페이지

그렇다면, 좋은 청바지는 ‘리바이스’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패션 브랜드만큼이나 청바지도 다양합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스타일과 체형에 맞는 청바지를 고르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청바지 매니아들에게는 ‘과거 리바이스 청바지를 얼마나 재현했는가?’가 중요한 지표가 됩니다. 그래서 ‘좋은 청바지’를 논할 때 일본 데님 브랜드들이 빠지지 않습니다. 일본 데님 신(Scene)은 자체적으로 데님 원단을 생산하고, 염색도 할 정도로 ‘리바이스 복각’에 진심인 브랜드들이 많습니다. ‘좋은 청바지는 최소 일본 데님을 써야 한다’는 인식이 퍼진 이유입니다(필자도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국내 도메스틱 브랜드들이 ‘Japan Made’ 택을 달고 청바지를 출시하는 것도 이러한 인식에서 기인한 것이겠죠.

데밀(Demil)은 청바지 생산에 잔뼈가 굵은 세 명의 대표가 의기투합해 만든 브랜드로, 매니아층이 탄탄한 데님 신(Scene)에서 ‘국내에서도 좋은 복각 데님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두 수작업으로 제작되는 아뜰리에 라인의 바지들은 일본 데님과 견주어도 될 만큼 높은 퀄리티를 자랑합니다. 합리적인 가격의 공장 생산 라인은 캐주얼한 실루엣으로 범용성도 넓습니다.

이미지 출처: 데님 공식 홈페이지

데밀도 일본 데님 원단을 주요 소재로 사용하지만, 그들의 100% 국내 생산에 대한 열망을 엿볼 수 있는 제품이 있습니다. 바로 Lot. 009R 제품으로, 데님 원단부터 생산까지 국내에서 진행한 100% 코리안 메이드 데님입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셀비지 원단을 직접 생산했는데요, 이를 위해 1980년대 이후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국산 셔틀 직기를 발굴해 직조했다고 하니, 기념비적인 모델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필자도 몇몇 일본 데님 제품을 경험해보았는데요, 그들의 청바지가 ‘훌륭하다’는 소리를 듣는 이유를 이해했습니다. 품질과 만듦새 모두 이전에 경험한 데님 제품들보다 훨씬 단단했거든요. 하지만 필자에게 ‘좋은 옷’이었느냐, 그러니까 잘 어울리고 편했느냐를 생각해보면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필자의 체형에는 도무지 맞지 않았으니까요. 데밀은 일본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기술력이 뛰어난 데님일 뿐 아니라, 필자에게도 아주 편하게 맞습니다. 오늘도 Lot. 009R을 입고 출퇴근했네요.


WEBSITE : 데밀
INSTAGRAM : @demilmfg


월스와일 무브번트
(Worthwhile Movement)

가방

OOO맛 가방이 전부가 아니다

이미지 출처: 월스와일 무브번트 공식 홈페이지

‘OO맛 자켓’, ‘OO맛 후드’라는 말을 들어 보신 적 있을 겁니다. 주로 가격대가 높은 브랜드나 아이코닉한 디자인의 제품과 비슷한 무드를 낼 수 있는 가성비 제품을 가리키는 표현인데요.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고가 브랜드의 느낌을 낼 수 있다니, 이보다 합리적인 소비가 있을까요?

하지만 ‘OO맛’에는 ‘특정 브랜드를 향한 욕망’과 ‘소비’를 더욱 촉진시키는 힘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가 브랜드를 소유할 수 없으니 비슷한 대체재를 찾는 것인데, 대체재를 구매함으로써 증명되는 것은 결국 그 브랜드를 갖고 싶은 욕망뿐인 것 같습니다. 물건을 대체재로 바라보는 순간부터 만족의 정도는 상대적으로 낮아지는 법이니까요.

이미지 출처: 월스와일 무브번트 공식 홈페이지

최근 유니클로에서 출시한 숄더백과 크로스백이 일본 가방 브랜드 포터(Porter)와 유사하다는 이유로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가성비 포터맛’이라는 꼬리표와 함께 말이지요. 포터의 스테디셀러인 ‘탱커’ 시리즈는 약 40만 원대입니다. 이에 비해 유니클로 가방은 3~4만 원대로, 1/10 수준의 가격으로 ‘포터의 느낌’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살 이유가 없겠지요. 물론 포터가 아니라 유니클로를 산 것이지만요.

몇 년간 일본 현지에서도 한국과 중국 관광객들이 줄을 서서 구매할 정도로 포터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결코 낮지 않은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없어서 못 살 정도였죠. 그러면서 ‘포터맛 가방’에 대한 소비자들의 니즈는 더욱 커졌습니다. 대체로 ‘포터맛’은 나일론으로 만든 탱커 시리즈를 가리킵니다. 1983년 출시 이래로 포터를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스테디셀러 라인이니까요. 그런데 나일론으로 만든 가방, 혹은 그와 유사한 느낌의 가방이라면 모두 ‘포터맛’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요?

이미지 출처: 월스와일 무브먼트 공식 홈페이지

월스와일 무브먼트(Worthwhile Movement)는 실용적인 디테일과 디자인을 강조한 패션 의류를 전개하는 브랜드입니다. 그중 가방 라인업은 브랜드가 추구하는 정체성이 확실히 녹아 있다고 할 수 있는데요. 겉으로 보기엔 미니멀하지만, 패턴과 소재, 주머니의 위치 등 가방을 구성하는 모든 디테일이 실용성을 기준으로 엄선되었습니다. 또한, 가방 전문 공장에서 30년 이상 숙련된 백 메이커들에 의해 제작되고 있어 생산 품질도 매우 우수합니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토스터 백’은 나일론/폴리 혼방 원단을 사용해 오묘한 질감이 매력적인데요. 발수 코팅이 되어 있어 오염에도 강합니다. 게다가 3.5L의 용량에도 불구하고 메인 공간을 개폐식으로 디자인해 수납 공간을 알차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심플하지만 사용할수록 숨은 디테일이 많아 더욱 매력적인 가방입니다. ‘포터맛 가방’만을 찾아다녔다면 결코 발견할 수 없었을 디테일이라고 생각합니다.


WEBSITE : 월스와일 무브먼트
INSTAGRAM : @worthwhile_movement


패션의 가치는 ‘자유로운 표현’에 있습니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를 담은 아이템을 선택해 입는 행위는 그 자체로 의미 있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표현이 제한된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누군가의 가치를 무의식적으로 대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고의 경계 밖에서도 새로운 시도와 표현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소개한 브랜드들이 허물고 있는 것은 단순히 ‘특정 브랜드의 독점’이 아니라, 소비자의 사고와 선택의 경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경계 밖으로 나아가 경험해 보세요. 그리고 자신만의 기준으로 고르고 선택해 보세요. 표현의 폭이 더욱 넓어질 것입니다.


Picture of 지정현

지정현

새삼스러운 발견과 무해한 유쾌함을 좋아하는 사람.
보고, 듣고, 느낀 예술을 글로 녹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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