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어떻게
타자화 되는가

떠나온 시절을
경계하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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붐비는 지하철 안, 찢어질 듯한 아기 울음소리에 무심코 눈살을 찌푸린 적이 있는가? 비행기를 탔는데 옆 좌석이 주구장창 뽀로로를 찾을 것만 같은 꼬마 아이라 속으로 절망해 본 경험은? 동네 어르신들이 모여 계시는 공원 벤치를 지날 때면 “요즘 애들은…”으로 시작하는 대화가 어김없이 걸음을 재촉하게 만든다. 열심히 생산적인 삶을 살아내는 어른들에게 아이들은 종종 그저 불편하게 우리 사이에 낀, 이물감을 주는 존재들이 되곤 한다.

어떤 사회에서든 세대 간의 부조화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각각의 세대는 지나온 경험의 성분 뿐만 아니라, 앞으로를 살아갈 맥락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쉽게 섞일 수 없는 시각과 가치관을 형성하게 마련이다. 특히 20세기와 21세기의 4분의 1을 지나며 급변해 온 한국 사회에서는 그 나이테의 간격이 촘촘하지 않아 이러한 차이가 더욱 극명하게 체감된다. 최근 들어 더욱 뜨거운 감자가 된 ‘노 키즈 존’, 촉법소년 범죄에 대한 성난 비판들, 그리고 ‘MZ세대’라는 인구학적 용어의 문화적 꼬리표화 등의 현상들은 ‘아이들’이라는 어른들로부터 동떨어진 존재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무관용적인 냉소를 보여 준다. 이번 그레이에서는 이러한 시선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은 대중 미디어 속 세 작품을 곱씹으며, 아이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를 돌아보고자 한다.


법적, 사회적 심판의
대상으로서의 아이들

아이들은 때로 잔인하다. 사회적 규범에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그들은 어른들이 주도하는 세상이 불편하다는 듯 반항하고, 잘못을 저지르며, 스스로의 ‘다름’을 드러낸다. 이러한 모습을 목도한 우리는 경악하고, ‘아이들’이라는 존재가 어른의 통제 밖에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두려움을 마음에 새기게 된다. 물론 아이들이 저지르는 도덕적 잘못은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잘못이 아이들에게 사회적 기준을 가르치고 양지의 삶을 이해시키는 교육의 기회로 작용하기보다는 단순한 손가락질과 증오로 이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는 점이다.

드라마 <소년심판>(2022)은 이러한 현실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작품은 촉법소년과 청소년 범죄를 다루며,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이 사회에서 어떻게 평가받고 타자화되는지를 생생히 그려낸다. 극중 이야기들은 실제 사건들을 모티브로 하고 있으며, 가정 폭력으로부터 비롯된 비행, 학교 폭력, 절도, 유괴, 집단 폭행과 살인까지 충격적인 사건들을 다룬다. 순수함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아이들이 이러한 범죄의 주체라는 사실은 시청자를 더욱 경악하게 만들고, 소년부 판사 나혜석이 소년범들에게 단호하게 법의 심판을 내리는 모습에서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드라마 ‘소년심판’ 스틸컷, 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그러나 이러한 통쾌함은 동시에 아프다. 현실로 돌아와, 보호받아야 할 아이들이 그러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분명 우선적으로는 개인의 잘못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사회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단지 극중의 통쾌함에 머문다면, 우리는 아이들이 더 깊숙한 음지로 들어가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소년범죄를 해결하려 한다면 처벌 만큼의 엄중함으로 그들의 맥락을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이 갖게 된 기형적인 분노를 덜어주는 일에 힘 써야 한다는 것을 <소년심판>은 그 내용 뿐 아니라 시청자와의 감정적 소통을 통해 역설하고 있다.


이제는 멀어져버린
미지로서의 아이들

또한 아이들은 어른들의 세상 너머의, 불가해한 낯선 존재로 비춰지기도 한다. 그들만의 언어, 규칙, 유희,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지고 살아가는 듯한 아이들은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아이였음에도 신비롭고 난해한 존재로 다가오곤 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괴물>(2023)은 이렇듯 한때 나의 모습이었지만 이제는 멀어져버린 미지로서의 아이들을 대하는 어른들의 착시와 혼란을 보여 준다. 영화는 한 초등학교에서 발생한 의문의 폭력 사건의 전말을 이해하기 위해 분투하는 학부모와 교직원 등 어른들 사이의 갈등과, 정작 그 사건 내부의 주체인 아이들의 내면 세계를 여러 화자의 시점을 빌려 보여 준다. 사건이 파헤쳐질수록 겉으로 드러난 사실이 반드시 진실인 것은 아님이 암시 되며, 극중에서 어른들이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라고 처음부터 못 박았던 두 주인공 아이들의 관계는 사실 누구보다 순수하게 서로를 위하는 우정으로 결속된 친구였다는 것이 드러난다.

영화 ‘괴물’ 속 두 아이, 이미지 출처: 씨네21

그러한 서사를 통해 <괴물>은 어른들이 추구하는 진실이 과연 늘 옳은지, 그 과정에서 희생되는 아이들의 감정과 시선은 무엇인지를 섬세한 연출로 보여 준다. 극중의 어른들은 아이들을 지성과 능력을 미처 갖추지 못한 약자이자 스스로를 표현할 때에는 반드시 성인의 대리를 필요로 하는 ‘객체적‘인 존재로 치부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이들도 자신만의 주관이 있는 온전한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간과하는 치명적인 편견이자, 우리 사회가 아이들을 어떠한 ‘대상’으로 타자화 하고 있다는 증거 중 하나이다. 이에 대해 미국의 퀴어 이론과 대중문화 연구자인 잭 핼버스탬은 자신의 저서 『실패의 기술과 퀴어 예술』 (현실문화, 2024)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핼버스탬은 아이들을 단지 시기적인 무질서함과 어른들에 비해 자연스레 부족한 능력 때문에 결핍된 존재로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성인 중심적인 시각을 지적하며, 아이들의 인격적인 위상에 대한 존중이 부족함을 지적한다.

영화 ‘괴물’ 스틸컷, 이미지 출처: 뉴시스

결국, 바라는 것은
함께 살아가는 것

이러한 맥락 속에서 아이들의 비행, 반항, 혹은 난해한 행동들을 바라본다면, 그 이면에는 사실 단절된 소통을 회복하고 자신을 바라봐주기를 바라는 그들의 간절한 욕구가 담겨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드라마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2024)는 이런 아이들의 내면적 갈등과 소통의 필요성을 잘 보여 준다. 극중 중심인물인 고등학생 하빈은 ‘아이답지 않게’ 감정 표현이 적고 어딘가 서늘한 느낌을 주는 아이였고, 그 때문에 아버지 태수로부터 어린 시절 동생을 죽였다는 일방적인 오해를 받으며 자라왔다. 해명을 하고 극구 부인하고 싶었던 하빈의 마음마저 묵살 하듯, 태수는 한 번도 그녀에게 그것이 어떻게 된 일이었는지, 정말 동생을 죽인 것이 맞는지 묻지 않았다. 의심 받는 아이로 자란 하빈은 고등학생이 되자 반항적인 태도로 태수와 대립하며 가출과 고의적인 비행으로 답답함과 아버지로 인한 뿌리 깊은 상심을 표현하지만, 결국 그 밑바탕에는 태수가 진정한 어른으로서 아이의 진심을 알아봐주기 바라는 마음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 극중의 서사를 통해 드러난다.

드라마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스틸컷, 이미지 출처: 매일신문

갈등을 반복하던 지수와 태수는 결정적인 순간 오해를 거두고 서로를 이해하며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을 선택하고,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시청자도 아이들이 겪는 난기류와도 같은 반항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는 아이들이 겪는 심리적 고립과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즉 사회와의 화해와 이해를 어떻게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한 실천적인 물음을 던진다. 결국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그들만의 사회적인 영역을 점령하고 스스로 선택한 고립을 인정 받는 것이 아니라, 그 고립의 장벽을 허물어서라도 어른들이 그들의 목소리에 끝까지 귀 기울여 주는 것일 것이다. 사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그들과 같은 아이였으니까.

드라마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마지막 화 스틸컷, 이미지 출처: OSEN

결론적으로, ‘아이들’이란 우리 모두의 과거이자 공통된 경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와 환경이 급변함에 따라, 오늘날의 아이들은 기성 세대의 어른들이 경험했던 것과는 다른 맥락 속에서 성장하고 있다. 이러한 간극은 때로 우리를 불편하고 혼란스럽게 만들고, 그만큼 우리의 아이들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로서의 본질적인 욕구와 감정은 시대를 초월하여 유사하다는 점을, 그들은 결코 단순한 ‘타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인식해야 한다. 어른으로서의 관용과 공감을 바탕으로, 아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만의 세계관을 존중할 때 비로소 우리는 언젠가 어른이 될, 새로운 세대와의 존엄한 공존을 꿈꿀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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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주

예술이 모두에게 난 창문이 되는 날을 위해
읽고, 쓰고,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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