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작성한 아티클 「사진은 무엇을 원하는가: 이미지의 삶과 죽음을 통해 보는 르포르타주 사진의 명과 암」에서는 이미지를 포착하고자 하는 욕망의 위험성에 대해 논하며, 응시의 폭력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았다. 이번 아티클에서는 응시가 가진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본다는 행위’가 가진 긍정적인 힘을 조망하며, 우리가 어떻게 응시 행위 뒤에 전제되어 있는 주체와 대상의 위계를 뛰어넘어 타자와 함께 연대하는 ‘함께 (목격)하기 wit(h)nessing’를 성취할 수 있을지 말해보려 한다. 오늘 필자가 소개하는 이론과 미술작업은 트라우마로 남을 만큼 끔찍한 역사적 사건을 우리가 어떻게 예술을 통해 함께 (목격)함으로, 역사적 비극에 의해 희생된 존재들과 과거와 현재, 주체와 타자, 나와 너 사이의 경계를 넘어 뒤섞이며 연대할 수 있는지를 조망한다.
매트릭스적 응시(matrixial gaze)와
함께 (목격)하기 (wit(h)nessing)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이스라엘계 영국인 화가 브라하 에팅어(Bracha Lichtenberg Ettinger)는 자신의 저술 『트라우마를 함께 (목격)하기와 매트릭스적 응시 Wit(h)nessing trauma and the matrixial gaze』에서 ‘목격하다’라는 뚯의 영어단어 witness에 h를 넣어 새로운 단어 Wit(h)nessing을 만들어낸다. 그는 예술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역사적 트라우마에 대한 증언(목격자의 행위)을 넘어서, 희생자들과 함께하고 그들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기능해야 한다고 말하며 ‘함께 (목격)하기’의 미학을 제시한다. 에팅어는 목격이라는 행위가 가진 폭력성을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목격이 가진 공유의 힘을 예술이 포용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누군가를 대상이자 타자로 전락시키지 않는 목격이 과연 가능할까? 어떻게 바라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의 위계를 넘어선 목격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을 에팅어는 정신분석학을 빌려와 매트릭스적(모체의) 응시(matrixial gaze)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극도의 트라우마 상황을 겪은 인간은 언어로 표현하거나 이미지로 상상하는 등 이를 재현하는 능력을 상실한다. 집단에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역사적 사건이란 우리의 이성적 표현과 이해 능력을 넘어선 극단적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에팅어는 트라우마의 이러한 특징 때문에 예술이 이를 다루기 위해서는 ‘주체’의 창조적 능력을 기반으로 한 기존의 재현 방식을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 주체성이 형성되기 이전인 모체 속 태아의 상태로 응시를 새롭게 시도하자 이야기한다. 모체와 태아는 주체와 타자를 구분할 수 없는 경계 공간 안에 있다. 태아와 모체는 서로를 완전히 분리된 개별 주체로 상정할 수 없다. 모든 인간은 모체-태아 상태일 때 타인의 고통이나 트라우마를 자신의 것으로 공유하고 함께 경험한다. 에팅어는 이러한 매트리스적, 즉 모체적 사고가 우리로 하여금 공통의 인간성(co-humanity)을 받아들이게 한다고 주장한다.
매트리스적 응시는 주체와 타자를 횡단하고 자아 내부의 경계를 뒤섞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타인의 고통과 고난에 대한 정동(affect)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정동은 단순한 공감과 연민과 달리 개인의 주체성에 의거하지 않는다. 따라서 정확한 증거나 고통의 이미지를 요구하지 않는다. 매트릭스적 응시에 의해 촉발된 정동은 우리가 더 나은, 더 분별력 있는 자신이 되기를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을 위협받는 고통받는 타인과, 그 사람의 고난과 뒤섞이게 만든다. 마치 태아와 모체처럼 너와 나의 경계는 무너지고, 너의 고통은 곧 나의 고통이 되며, 너의 인간다움의 박탈은 나의 인간다움의 박탈이 된다.
권하윤,〈증거부족〉(2011)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올해의 작가상 2024》에 참여하고 있는 네 작가 중 한 명인 권하윤 작가는 지속적으로 식민 역사와 그 기억에 대한 작업을 펼쳐오고 있다. 그는 《올해의 작가상 2024》 인터뷰에서 2011년 서대문 형무소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며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서 버튼을 누르면 비명소리가 들리고 ‘사형 체험’을 할 수 있게 하는 등 마치 공포체험처럼 식민 역사를 전시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식민 역사를 깊게 성찰하도록 하기 보다는 이를 오락성 스펙터클로 재현하며, 식민 역사의 희생자를 응시 쾌락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것에 비판적 견해를 갖게 된 권하윤 작가는 서대문 형무소 다큐멘터리 제작을 포기하고, 이후 작업에서 자극적인 이미지 없이도 비극적 역사를 조망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모색한다. 그가 택한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오로지 구술로만 남아있는 비극을 재조명하는 것이다. 그는 사진이나 영상으로 그 참혹함이 박제되지 않은 사건을 미디어 작업으로 재구성한다. 애초에 사건을 기록한 이미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권하윤 작가가 선택한 사건은 응시의 폭력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나 비극적 역사를 기록한 이미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동시에 이 비극이 증언되고 기억되기 어렵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권하윤이 2011년 제작한 〈증거부족〉은 프랑스에 망명을 신청했으나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망명을 기각당한 나이지리아 태생의 인물, 오스카(가명)의 이야기를 다룬다.
쌍둥이는 불길한 존재라고 믿는 나이지리아의 한 마을에서 쌍둥이로 태어난 오스카는 주술사인 아버지에 의해 마을 의례의 제물이 될 위기에 처했으나, 아버지의 계획을 미리 알려준 새어머니의 도움 덕에 가까스로 살아남아 프랑스로 도망친다. 그러나 탈출 과정에서 그의 쌍둥이 형제는 그들을 쫓는 이들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는다. 오스카는 형제의 죽은 육신이 나이지리아의 숲에 싸늘하게 버려졌다 호소하며 망명을 신청하지만, ‘주술’에 대한 믿음이 부재하고, 구술이 아닌 ‘합리적 증거’를 요구하는 프랑스의 관료 사회는 그의 망명을 거부한다.
권하윤은 이렇게 프랑스 관료사회로부터 ‘함께 목격하기’를 거부당한 오스카의 비극을 3D 애니메이션으로 재구성한다. 3D 애니메이션으로 시작해 오스카가 직접 그린 마을 지도로 끝나는 이 다큐멘터리는 ‘리얼’하기보다는 어렴풋하고 엉성해 오히려 관람자가 함께 영상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와 함께 오스카의 기억을 더듬어 가도록 만든다. 마치 내가 그 증언을 들었던 것처럼, 영상에 등장하는 오스카의 증언을 통역해 준 통역사인 것처럼. 그리고 오스카와 그의 형제가 자신들을 죽이러 오는 사람들을 피해 도망치는 장면은 일인칭 시점으로 전개되어 마치 ‘내가’ 그들을 피해 숨가쁘게 도망치던 기억을 되짚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표면 질감까지 매끄럽게 완성된 것이 아니라, 3D 모델링 폴리곤 매쉬가 그대로 노출되도록 재구성된 나이지리아의 산울타리가 우리로 하여금 오스카의 비극에 몰입하게 한다.
폭력의 장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을 거부하고 인간의 기억과 구술의 모호한 속성을 그대로 옮겨 낸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가 불러일으키는 정동은 우리로 하여금 오스카의 비극을 ‘함께 (목격)하게’ 만든다. 오스카의 증언과 손그림 지도를 바탕으로 권하윤이 만들어 낸 애니메이션이, 바로 나와 네가 경계를 모호하게 뒤섞으며 나를 타인의 비극과 함께 하게 만드는 매트릭스인 것이다. 우리는 그 매트릭스 안에서 오스카를 목격하며, 동시에 그와 함께 한다. 비록 프랑스의 관료주의와 서구중심적 사고가 오스카의 비극과 함께 서기를 포기했을 지라도, 우리는 권하윤이 만들어 낸 매트릭스 안에서 정치적으로 배제되고 죽음으로 몰아넣어진 그와 함께 고통을 공유한다.
이 아티클을 작성하는 동안 대한민국의 비극적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우리에게 정신적 외상으로 남아있는 정치폭력의 역사가 다시 사회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불면에 시달리고, 또 지연된 상태로 전달되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예술이 말로 표현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사회적 트라우마를 ‘함께 (목격)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더욱 절박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역사를 잊지 않았고, 지금의 아픔 역시 잊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브라하 에팅어의 이론과 작업을 분석한 미술사학자 그리젤다 폴록의 논문 「Aesthetic Wit(h)nessing in the Era of Trauma」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고 싶다.
“공동의 발생, 공동의 애정, 공동의 포이에시스의 결과물인 자신의 인간성은 타인의 인간성이 침해될 때 잔인하게 훼손될 수 있다. 안전하고, 존엄하고, 충족적인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침해하는 폭력에 수동적으로 가담하거나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한, 나는 점점 인간이 아니게 될 것이다.”
_그리젤다 폴록
- Griselda Pollock, “Aesthetic Wit(h)nessing in the Era of Trauma,” EURAMERICA 40:4 (December 2010): 829-8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