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TV나 뉴스에 등장하는 다양한 유형의 어른들을 보며 나는 저런 어른이 되지 말아야지 다짐하기도, 저런 어른이 되고 싶다고 눈을 반짝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을 어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요? 나이가 들었다거나 어떤 높은 직책을 맡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을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른이 되는 데엔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요? 좋은 어른이란 무엇일까요? 정답이 없어 보이는 이 질문에 각자의 답을 내려볼 수 있게 하는 책 세 권을 소개합니다.
고요한 무채색의 사랑을 주는 어른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사랑은 화려한 광휘가 아니라 일상의 빼곡한 쌀알 위에 있다. 늘어난 속옷처럼 얼핏 보면 남루하지만 다시 보면 우아한 우리의 부피. 매일 산책하는 강변의 기나긴 길과 일렁대는 강물과 버드나무 줄기들.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그런 아름다운 걸 ‘무채’라고 퉁쳐서 불러보았다.”
_고명재,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고명재 시인이 쓴 첫 산문집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는 온통 하얗고 까만 무채색으로만 이루어진 책입니다. 화려하거나 혼자 튀는 색을 사용하지 않죠. 무채색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책에 어울리는 물성을 지닌 책입니다. 고명재 시인은 어릴 적 절에서 지내며 비구니의 손에 자랐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글에는 불교 특유의 초월, 평온, 고요함이 자주 묻어 있습니다. 그는 사랑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하는데요. 그가 전하는 사랑은 밸런타인데이 초콜릿 같은 분홍, 노랑, 빨강의 강렬한 색채가 아닌 스님의 승복과 같은 무채색의 사랑입니다.
보통 사랑은 불타오르고 뜨거운 마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책에서는 겸손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낮은 자세로 고요히 헌신하는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그 깨끗한 사랑을 보여주듯, 저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무채색의 것’을 소재로 삼으며 사랑에 대한 생각을 풀어냅니다. 목련, 빵, 입김, 흑백 사진과 같은 소재들이죠.
나 자신을 작은 존재로 여기는 것, 가끔은 티 내지 않음으로써 상대를 지키는 것, 상대가 위태로울 때 등대처럼 제자리에서 기다리는 것. 저자가 자신을 키워준 비구니로부터, 엄마로부터, 할머니로부터 받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이것이 바로 어른의 사랑하는 태도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사랑의 필요에 대한 메시지가 많아지는 요즘, 과연 나 자신과 내 주변에 어떤 사랑을 전할 것인지 생각해 보게 하는 책입니다.
“대체로 스님들은 기약하거나, 함부로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스님들은 말없이 사랑하고 말없이 죽는다. 불가에서 사랑은 그렇게 기척 없다. 쑥을 캐거나 좌복을 펼치듯 단정하게, 고양이 머리를 쓰다듬듯이. 사랑을 사랑 자체로 발휘하는 것. 그러고 그들은 미련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고요히 사랑을 주다 떠나는 것이다.”
_고명재,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나만의 정답을 가진 어른
『즐거운 어른』
여기 76세의 나이로 베스트셀러를 내고, 2024년 서점 연말결산 기획전의 작가 신인상 후보에 오른 작가가 있습니다. 『말하기를 말하기』의 저자이자 팟캐스트<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를 운영하는 김하나 작가의 어머니, 이옥선 작가입니다. 이옥선 작가는 자신의 책을 내기 전부터 딸인 김하나 작가의 책의 내용 속에서 종종 등장하곤 했는데요. 이옥선 작가가 남긴 명언 중 가장 유명한 명언은 『말하기를 말하기』에 등장하는 ‘만다꼬(뭐한다고)’라는 말 입니다.
“하지만 제가 세월이 흘러서 좀 자라고 난 뒤에 어른이 돼서 생각해보니까 이 ‘만다꼬’라는 말은 아주 중요한 질문이었어요. 사는 게 힘에 부칠 때나 또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제 안에 내재돼 있는 이 ‘만다꼬’라고 하는 말을 되새기면서 저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가 있었어요. ‘만다꼬 이것을 해야 되지? 만다꼬 이렇게 살고 있지? 내가 정말로 이것을 원하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사니까 나도 그렇게 살아야 된다고 떠밀려서 생각을 하는건가?’”
_김하나, 『말하기를 말하기』
이외에도 수많은 명언을 남겨온 작가는 결국 본격적으로 『즐거운 어른』이라는 책을 내며, 그동안 70여 년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터득한 수많은 지혜를 전합니다. 그 이야기들은 우리가 보통 ‘할머니’하면 떠올리는 푸근하고, 인심 좋고, 다정하게 건네는 말이 아닙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절대 유명해지지 마라’, ‘내 꿈은 고독사’ 등 솔직하고 통쾌하면서도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하는 할머니의 말이죠.
처음 들으면 의아할법한 말들이지만 저자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면 모두 납득이 가고, 인생을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모두가 아등바등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 세상이 말하는 정답 대신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지금을 즐길 수 있게 하는 자신만의 진짜 정답을 말해주는 할머니를 만난 기분이 들거든요.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할지 모르겠고, 나보다 한참을 더 산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을 때 언제든 펼쳐볼 든든한 책입니다.
지나치기 쉬운 존재를 포착하는 어른
『어린이라는 세계』
우리 어른들은 모두 어린이였던 시기를 지나왔습니다. 하지만 이미 기억 저편으로 넘어간 어린 시절을 마음에 늘 지니고 사는 어른은 많지 않죠. 심지어 ‘노 키즈 존’ 등의 명칭을 만들어내면서 본인도 분명히 지나왔을 어린 시절의 존재를 특정 공간에서 지워버리기도 합니다. 책 『어린이라는 세계』는 이렇게 우리가 지나치기 쉬운 어린이의 세계를 어른들에게 다시 불러옵니다.
이 책을 쓴 김소영 저자는 10년 남짓 어린이책 편집자로 일을 하고, 현재 독서교실에서 어린이들과 책을 읽으면서 그 누구보다 어린이와 가까이에서 생활하고 있어요. 저자가 독서교실에서 혹은 그 밖에서 만난 어린이들이 하는 말들과 행동을 읽다 보면 어린이만이 해낼 수 있는 기발하면서도 순수한 생각과, 감정 표현에 어느새 미소 짓게 됩니다.
하지만 마냥 어린이들의 귀여움만을 내세우는 책은 아닌데요. 어린이의 작은 키와 낮은 시야로 인해 발생하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읽다 보면, 이 사회에 살면서 키가 작은 존재의 입장에서 세상을 생각해 본 적이 언제였더라?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어린이 뿐 아니라 낮은 시야를 가진 다양한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죠. 어린이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민 등 평소에 잘 고려하지 못 했던 사람들의 입장도 이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결국, 어린이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죠. 나의 삶에 집중하느라 나의 주변을 잘 돌아보지 않게 된 우리에게, 때론 무릎을 굽히고 시야를 낮추어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존재들이 아직 많이 있다고, 이들의 입장에 대해 한 번쯤은 시각을 바꾸어 고민해 보는 그런 좋은 어른들이 가득한 세계를 만들자고 말하는 책 『어린이라는 세계』입니다.
“어린이는 착하다. 착한 마음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어른인 내가 할 일은 착한 어린이가 마음 놓고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나쁜 어른을 응징하는 착한 어른이 되겠다. 머리에 불이 붙고 속이 시커매질지라도 포기하지 않겠다. 이상한 일이다. 책은 내가 어린이보다 많이 읽었을 텐데, 어떻게 된 게 매번 어린이한테 배운다.”
_ 김소영, 『어린이라는 세계』
글을 쓰는 내내 ‘과연 나는 좋은 어른인가?’ 되물었습니다. 답은 ‘모르겠다’입니다. 여전히 순간의 감정에 가시를 세운 뒤 후회하고, 어려운 문제 앞에선 도망치고 싶고, 누군가의 편애에 유치하게도 기뻐하는 사람일 뿐이에요. 그럼에도, 나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더 나아지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것 자체가 더 나은 어른, 더 나은 사람이 되는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유형의 어른들을 직접 혹은 책을 통해 만나면서 배워나갈 수 있겠죠. 우리 모두 새해에는, 매 순간 더 지혜롭고 현명한 결정을 내리는 어른이 되기 위한 고민을 시작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