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뉴욕 맨해튼 연방 청사 건물 앞 광장에는 높이 3.6미터, 길이 36미터의 거대한 철판이 광장을 가로지르게 세워진다. 코르텐 철로 제작되어 설치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녹으로 뒤덮인 이 철판은 조각가 리처드 세라가 제작한 <기울어진 호 Tilted Arc>로, 현대미술 사상 가장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공공조각 중 하나다.

공공조각을 둘러싼 논쟁은 <기울어진 호> 이후로도 계속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클래스 올덴버그의 <스프링 Spring>, 최정화의 <초량살림숲> 등 여러 공공조각이 논란에 휘말렸고, 지금도 대한민국 곳곳에서 공공조각을 둘러싼 갑론을박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나 공공조각이 전통적인 조각의 형태와 거리가 멀 때 공공조각에 대한 논쟁은 더욱 거세지는 경향이 있는데, 아마 이는 아직 우리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조각이 결국 ‘기념비’적인 모습을 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이번 아티클에서는 우리나라의 사례에서 살짝 벗어나 공공조각에 대한 수많을 담론을 생산한 <기울어진 호> 논쟁을 주목해 보려 한다. <기울어진 호>는 맨해튼 연방 광장에서 결국 철거되고 말았기 때문에 이른바 ‘공공조각의 실패’를 보여주는 사례로 많이 인용되는데, <기울어진 호>의 철거가 우리에게 던진 메시지를 단순히 실패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다면적이다. 이번 아티클은 <기울어진 호> 논쟁을 분석함을 통해, 과연 우리에게 심리적이든 물리적이든 ‘불편함’을 유발하는 공공조각은 정말 사라져야만 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전개해 보고자 한다.
<기울어진 호>는
왜 불편하게 만들어졌을까
GSA(General Services Administration, 미 조달청)의 Art in Architecture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 1981년 뉴욕 맨해튼 연방 광장에 세워진 <기울어진 호>는 설치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조각의 외관이 흉물스럽고 사람들의 통행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철거를 요구하는 수많은 민원을 받는다. 민원을 제기한 대부분의 사람은 연방 청사에 근무하는 직원들로, 그들은 <기울어진 호>가 광장의 중앙을 가로질러 설치되었기 때문에 청사로 가는 지름길을 포기하고 광장을 에둘러 돌아가야 한다는 점에 크게 불만을 표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기울어진 호>에 제기된 민원은 리처드 세라의 제작 의도가 정확하게 광장에 실현되었음을 알려준다. 세라는 <기울어진 호>에 대한 1980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제작의도를 밝힌 바 있다.
“연방 광장은 공공건물의 앞에 있는 ‘좌대와 같은 장소’다. 그곳은 분수가 설치된 광장인데, 사람들은 대부분 건물을 꾸며주고, 건물과 어울리는 조각을 분수 옆에 설치하기를 원한다. 나는 광장의 장식적인 기능을 탈구시키고 바꿈으로, 사람들을 조각의 맥락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할 방법을 찾았다. 나는 120피트 길이의 반원형 작업을 설치할 계획을 세웠다. 그 조각은 광장의 전체 공간을 가로지르며 길과 청사 건물 사이의 시야를 가로막을 것이다. … 조각이 창조되고 나면, 그 공간 자체가 조각으로 이해된다.”
세라가 원치 않은 바로 그 ‘분수 옆 조각’의 구도는 바로 서양 공공조각에서 수 세기 동안 마치 정석처럼 사용되어 온 기념비의 문법이다.


만일 세라가 오래된 공공조각의 문법을 그대로 따라 분수 옆에 장식적인 조각, 특히 인간의 형상을 한 전통적인 기념비를 세웠다면 그 누구도 세라의 조각을 철거해달라 요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세라는 기념비로써의 조각을 탈피해, 조각이 광장 자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변화시키기를 원했다. 녹이 슬어있는 거대한 철판이 광장을 지나다니는데 초래한 그 불편함은 조각이 완성된 후에 우연히 생겨난 부작용이 아니라, 작품의 의도 그 자체였다. 세라는 사람들이 <기울어진 호> 주변을 돌며 작품의 구부러진 곡선을 따라 이동하고 여러 각도에서 작품을 관람함으로 공간 자체를 점유한 조각의 총체적인 맥락을 파악할 뿐 아니라, 조각이 변형시킨 주변 풍경의 파노라마 자체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길 바랐다.
<기울어진 호> 논쟁의 변질
<기울어진 호>를 둘러싼 당시 뉴욕 사회의 논쟁에서 우리가 다시 눈여겨봐야할 점은, 사람들이 호소한 불편이 작품의 의도였다는 것뿐만이 아니다. <기울어진 호>는 설립 직후부터 민원이 제기되었지만, 철거 요청은 기각되었고 3년간 큰 물의 없이 연방 광장에 서 있었다. <기울어진 호>를 둘러싼 본격적인 논쟁은 1985년 행정관 윌리엄 다이몬드(William Diamond)의 청원으로 다시 불붙는다. 1985년 재개된 논쟁은 이전보다 훨씬 정치적인 성격을 띠었다. 이 해 <기울어진 호>의 철거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심지어 청문회가 열린다. 청문회에서 철거를 요청한 대다수의 인사는 뉴욕 정계 인물이었으며, 철거를 반대한 대부분의 인사는 뉴욕 예술계의 유명 큐레이터들과 예술가들이었다. 마치 지역 정치인과 예술계 인사가 대격돌하는 듯한 모양새를 보인 청문회에서 <기울어진 호>를 철거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애국주의와 포퓰리즘 정서를 이용해 ‘청사 건물을 가로막는’ <기울어진 호>가 공공조각으로서 적합하지 않다 비판하였으며, <기울어진 호>를 옹호하던 많은 예술계 일원들은 <기울어진 호>의 기원을 쇠라(Georges Seurat)와 마네(Édouard Manet) 작품을 비롯한 인상주의로까지 연결해 <기울어진 호>의 정치적 의의를 증명하고자 하였다.

지역 주민의 편의와 작가의 의도가 대립하였던 초기의 논쟁과 달리 다시 불붙은 논쟁에서는 정치, 경제적인 문제가 주요한 화두로 제기된다. <기울어진 호>를 철거하기를 원한 정계 인사들은 이 작품이 청사 건물의 시야를 차단함으로 국가 안보를 위협할 뿐 아니라 베를린 장벽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철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기울어진 호>의 철거를 반대하던 미술계 인사들은 지역 주민에게 <기울어진 호>가 제시할 수 있는 실질적인 사회적 메시지를 이야기하기보다는 미술사를 근거로 들며 이를 옹호했다. 이는 분명히 의미심장하다. <기울어진 호>를 둘러싼 논쟁이 더 이상 작품과 지역 주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정치 문화적 입장을 지닌 사람들의 파벌싸움으로 변질되고만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공공조각 철거 사례를 되짚어보면 공공조각의 철거가 정치적인 공약으로 이행되거나, 지역 주민의 민원을 해결한 특정 정치인의 공로로 홍보되는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파벌싸움이 되어버린 <기울어진 호>의 청문회를 회고하며 미술사학자 더글라스 크림프는 날카로운 비판을 제기한다.
“이 청원은 공적인 장소에서의 예술에 대한 공동체의 연대를 조성하기 위해 열리지 않았다. 비록 <기울어진 호가> 공공장소에 예술 작품을 위치시키기 위해 커미션 된 프로그램에 의해 세워졌다 하더라도, 이 프로그램은 제작된 예술 작품 대한 대중의 이해를 증진하기 위해 노력하는 데는 완전히 무관심하다. 이 청문회는 예술이 우리 삶에 어떠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가에 대한 청문회가 아니다. 이 청문회는 예술과 사회적 기능은 반대급부라고 믿는 어떤 입법가에 의해 제기된 것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예술은 어떠한 사회적 기능도 하지 않는다고 믿는.”
<기울어진 호>의 철거를 반대했던 크림프는 <기울어진 호>가 논쟁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세라의 조각이 교조적인 상징주의를 거부하며, 사회 속 인간들은 개인의 욕구가 다른 이들의 욕구와 충돌하며 살 수밖에 없다는 ‘이기주의의 원칙’을 그대로 노출하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그는 청문회에서 한 보안요원이 <기울어진 호>가 연방 건물의 시야를 차단함으로 보안상의 위험을 불러올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을 인용하며, <기울어진 호>가 국가가 개인을 잠재적인 위험 분자로 간주, 이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바로 <기울어진 호>가 현실의 모순에 대항해 정치적 특수성을 드러내는 방식이라 이야기한다.
레이거니즘으로 흔히 일컬어지는 신보수주의가 사회의 주요 분위기로 자리잡은 1980년대 미국에서 공간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과 침입을 의도하며, 외부의 ‘위험 요소’ 혹은 ‘타자’를 연상시키는 <기울어진 호>는 더 이상 공간에 대한 개인의 인식론적 차원으로만 해석될 수 없었다. <기울어진 호>는 미국의 ‘정상성’과 ‘일상’에 침습하는 타자였고, 불편이었으며, 궁극적으로는 반드시 제거되어야만 하는 ‘흉물’이었다. 이는 당시 미국 사회가 삶에 변화를 불러오는 불편과 타자에 얼마나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이기도 하다.
결국 <기울어진 호>는 1989년 철거된다. 그러나 사람들의 예상과 다르게 <기울어진 호>가 철거된 이후 연방 광장은 예전과 같이 아름답고, 편안하고, 안온한 공간을 돌아오지 못했다. 인적이 없는 밤을 틈타 여러 조각으로 잘려 그 생명을 마감한 <기울어진 호>가 있던 자리에는 긴 상흔이 남았다. 광장 바닥에 남은 흉터는 ‘예상치 못한 것’에 대한 우리의 수용 능력이 충분치 못할 때, 우리가 다른 것을 우리 삶에서 제거해 버리는 과정이 아름답고 순탄할 수만은 없음을 증명한다.

너무 지루한 사례일지 모르겠지만, 살아남은 흉물 에펠탑은 파리의 상징이 되었다. <기울어진 호> 역시 살아남았다면 어땠을까. 우리가 흉물로 간주하는 공공조각이 정말 우리에게 어째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우리가 그들을 제거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의 존재를 견딜 수 없는 이유가 단순히 미적 취향의 문제일까?
조각에도 침습을 허용할 여유가 없는 사회가, 다른 사회적 타자에게도 침습을 허용할 사회가 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우리가 ‘불편함’을 배제하는 순간, 어떤 예술도 도전할 수 없게 된다.
- Storr, Robert. “‘Tilted Arc’: Enemy of the People?” Art in America 73:9 (September 1985): 90-97.